우리는 쉽게 오픈마인드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고 한다.
그러면,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여는 것이 마음공부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자.
문을 닫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것도 문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
다만 문 안의 주인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들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으면
내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깥의,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유로이 내 존재의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게 된다.
그 모든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힘들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내게 이득되는 것만,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음을 활짝 연다는 것은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애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을 닫고 있을 때는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중심이 되어,
문을 열 것인지 닫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닫으며,
내 입맛에 맞는 것, 내 견해와 일치하는 것은 열고
내 입맛에 안 맞거나,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닫는 것이다.
즉, 문을 닫고 있을 때는
아상에 갇히게 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있을 때
아상은 타파되고
내가 아닌 우주법계의 질서와 차원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된다.
즉 문을 닫는 것은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하는 것이고,
문을 열 때
비로소 온전한 ‘내맡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을 열고
이 우주법계의 진실에 삶을 내맡길 때,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살게 된다.
그 때 모든 지혜와 힘이
무한한 자비로써 나를 돕기 시작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깨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아니 완전히 열었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바로 삶의 완전성,
원만구족과 온전함이 깃드는 때다.
존재는 본래 완전하고,
모든 것이 구족된 존재이고,
완전히 깨달아 있는 존재인데,
‘나’라는 아상과 이기가
문을 닫고 막아 섬으로써
그 완전성과 원만구족과 깨어남과 자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존재 근원의 깊은 차원의 질서에 내맡기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오다,
문득 깨달아 문을 활짝 열게 되면
우주적 깨달음과 완전성이
허물어진 벽과 툭 트인 문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깨어남은 더뎌진다.
지혜도 자비도 내게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있는 건,
아상 뿐!
아상만이 나를 집어 삼키고,
아상이 시키는 대로,
이기와 에고가 시키는 대로의 삶만을
반복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전혀 새롭지 않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의 삶이 반복된다.
아상은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고,
과거에 안주하며, 안정만을 쫓는다.
아상의 기준에서
문을 선택적으로 분별하여 열고 닫기 때문에,
언제나 비슷한 것만을 열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결정은 죽어도 못 한다.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될지라도
병원과 현대의학만을 신봉하는 사람은
대체의학이나 명상과 기도를 통한 치유는
다분히 기복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 매도하며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느 한 종교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거나,
어느 한 집단, 사상, 이념, 가치만이 옳다고 믿는 이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과 다른 사상, 종교, 이념,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 이에게는
계속적으로 똑같은 진부한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열지는 못하는 것이다.
당장에 마음만 열면
내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먼저 내 마음 속에서 반복되는
좋고 싫다는, 옳고 그르다는, 맞고 틀리다는
분별과 차별심을 잘 관찰하고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두 가지 극단적인 분별이 있으면
좋고 옳고 맞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문을 열게 되고,
싫고 틀리고 그른 것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는
좋은 것도 유효하고 싫은 것도 유효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내 생각의 틀일 뿐 실체가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배울 수 있고,
순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경과 순경을,
행복과 불행을,
맞고 틀리는 모든 것을,
그 양 쪽 모두를 향해
완전히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그저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맞다고 여기면서,
바보가 되라는 말로 여겨선 안 된다.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좋고 나쁜 선호 조차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좋아해도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싫어해도 너무 증오하지 않으면서
그 두 가지 모두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경계 모두를 받아들여
그 양 변을 통해 깨달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닫지 말라는 것이다.
역경을 통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순경계에서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역의 좋고 나쁜 모든 경계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양 쪽 모두에서 영적인 진보, 깨달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찬란하고도 눈부신 삶이라는 축제를 온전히 즐기라.
우주법계는 언제나 완벽하고도 충만한 지혜와 자비로써
당신의 삶을 조화롭게 균형 잡아 줄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써,
선택적으로 좋은 것들만 받아들임으로써,
우주법계가 내게 무한히 공급해주고 있는
진리의 법비를 뿌리치지 말라.
법신부처님께서는, 신성의 하느님과 성령은
언제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나에게 딱 걸맞는
완벽한 인생의 시나리오와
삶의 교과과정을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다.
그것도 저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식으로 정확히 필요한 일들을 균형 있게 내보내 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할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다 똑같지 않고 다 다른 것이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어느 때에는 잘 풀리며 행복해 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안 풀리며 괴로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있는 삶과 인생의 교육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곧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귀의(歸依)라는 구도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본래 부처였고, 본래 진리였으며, 본래 청정한 수행자인
바로 그 본향인 자성의 귀의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하는 것,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향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귀의의 숭고한 여정은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 신의 가호,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완벽한 도움이
매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온전한 도움이 바로 인생이라는 수업이다.
저마다에게 딱 걸맞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만을 위한 맞춤식 인생수업이
바로 나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인생의 수업을 온전히 이수해야지,
내가 선택적으로 원하는 수업만을 들음으로써,
좋아하는 수업만 선별해서 들음으로써,
균형과 조화로운 영적 진보와
성스러운 귀의로 가는 구도의 길을
에둘러 멀고 먼 길로 돌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완전히 열고 받아들이면
수업의 진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깨달음에로의 당도는 멀지 않지만,
마음을 닫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지지부진하게 깨어남의 속도는 느려지는 것이다.
그 수업을 완전히 이수해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괴로움도, 병도, 아픔도, 스트레스도, 역경도
빨리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 거부하던 것은 계속되고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부하면 거부하는 것이 계속된다.
결국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그러니 어떤가.
삶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놀이하듯 즐기며 살아내라.
설사 그 인생의 길에
굴곡진 역경이 놓여질지라도
‘괴로운 삶’이라고 해석하고 판단함으로써,
그리고 그 괴로운 삶을 거부함으로써,
그 인생의 수업을 이수 못한 채
다음 생에까지 나머지 공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살하는 사람이 바로 나머지공부의 대표적 사례다.
주어진 역경을 못 견디고 거부하고 저항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는 곧장 그 수업을 끝마치기 위해
그 역경을 다시 선택해서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 생에 거부하고 저항하던 에너지를 듬뿍 양분으로 받아
다음 생에서는 지금보다 더 힘겨운 수업을 이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고 느끼며
놀이하듯 가지고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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