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깨달음에 대하여 총정리

장백산-1 2011. 3. 30. 02:13

깨달음에 대하여 총정리 개똥철학

2011/03/14 00:25

복사 http://blog.naver.com/doremi9981/20124391454

출처 카페 > 파르재마을 | 아무개
원문 http://cafe.naver.com/pareujae/4722

 

 

깨달음이란?

‘깨+알음’이고, ‘깨어서 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을 깨서 안다는 말일까?

이는 ‘나’를 깨어서 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또 ‘나’는 무엇일까?

‘나’는 딱딱한 껍질에 싸여있는 돌멩이와 같은 존재이다.

딱딱한 껍질의 주성분은 바로 ‘콤플렉스’이다.

 

인간은 콤플렉스라는 딱딱한 껍질에 싸여서 자기 스스로 작고 못난 돌멩이로 착각하고 산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자신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면서 겉모습에 집착하여 돌멩이를 더 크게 하거나 화려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깨달음이란? ‘돌멩이와 같은 딱딱한 껍질을 깨어 돌멩이가 아닌 하늘의 설계도를 품은 씨앗’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인간적인 능력의 2~3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200~300배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과 부처가 남긴 ‘네 안에 등불이 있다.’라는 말은 ‘네 안에는 하늘이 너를 창조한 창조목적을 품은 설계도가 있다’라는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세 살까지 부모의 불행한 마음의 상처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10세까지 들은 부정적인 말이 마음의 상처가 되고, 그 상처는 딱딱한 콤플렉스가 되어서 자신을 작고 못난 돌멩이라고 생각하면서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겉모습에만 집착하면서 평생을 돈과 명예, 물질 등의 조건 변화에 매달린다. 그리고 자기 안에 품고 있는 하늘의 창조 목적을 잃어버린 채 인간은 19세 이후 성인이 되면서 ‘상처받은 나’ ‘불완전한 나’를 치유하기 위해서 책과 스승과 종교를 찾아 세상을 헤매면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뇌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면서 ‘의식은 무의식의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나 아무개는 ‘의식은 무의식의 껍질’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무의식(無意識)은 무(無)의식이 아니라 신의식(神意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의 뇌만을 활용하고 무의식 즉 신의식(무의식)은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머리가 그렇게 좋았다는 아인쉬타인도 뇌 능력의 10%도 채 활용하지 못했다. 인간의 뇌의 10%는 인간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뇌이고, 나머지 90%는 하늘(신)이 활용하고자 하는 뇌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마음의 상처(원죄)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이기성을 채우고자 하기 때문에 평생 10%의 의식의 뇌도 활용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나면 나머지 90%의 무의식(신의식)의 뇌(달란트)를 활용하게 되어서 인간의 창조목적인 ‘세상을 널리 이롭게...’하기 위한 이타적 설계도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부처와 예수는 10%의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90%의 신성을 발휘하면서 세상을 살다간 사람의 좋은 예이다. 신은 절대로 차별을 두지 않는다. 석가와 예수가 특별한 인간이라면 아무개와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특별한 인간이고, 아무개와 당신이 평범한 인간이라면 석가와 예수 또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석가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 우주상의 모든 개체는 유일하며 어떤 대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독특한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소우주라 하는데 ‘우주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우주가 있다.’라는 말과 같다.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려 할수록 더 오리무중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심리는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그 이상의 우주(하늘, 신)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프랙탈의 개념이다. 프랙탈은 ‘부서진 돌조각’의 뜻으로 작은 조각(부분)에 원래의 큰 것(전체)을 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예로 고사리의 작은 잎은 고사리 전체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고, 체세포(조각)를 이용하여 양이나 개(전체)를 복제해 낼 수 있다.

 

인간이라는 한 개체 역시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우주와 닮은꼴이다. 인간을 하나의 계란과 같은 모양으로 생각한다면 그 계란 속에는 무한의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 된다. 즉 인간의 10%의 의식이라는 껍질 안에 90%의 무의식(신의식)이 들어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마음의 상처와 콤플렉스라는 껍질을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의식할 수 있는 10%의 껍질이 자신의 전부인줄 알고 조건(껍질)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고통의 바다(苦海)를 헤매다가 ‘인생무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왜 인간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마무리 하게 되는 것일까?

공자는 성선설을 말했다. 이는 하늘이 모든 개체를 창조한 이유는 ‘세상에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했기 때문에 성선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이유는 인간은 생후 10년 동안 몸과 마음이 성숙되기 위한 이기성을 채워야 하는 기간을 필요로 하는데, 순자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채워야 할 이기성을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인간이 생후 10년 동안 온전히 사랑을 받으면서 이기성을 채우게 되면 10년 이후에는 저절로 이타성을 발휘하게 된다.

 

모든 창조물의 이타성의 발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의 법칙이며 자연의 순환과 흐름 속에서 모든 개체는 이타적 목적으로 쓰여 지고 있다. 식물들은 초식동물을 위해서, 초식동물은 육식 동물을 위해서 존재한다. 파리는 개구리에게 도움이 되고, 개구리는 뱀에게 도움이 되고, 뱀이 죽으면 뱀은 다시 파리에게 도움을 준다. 이는 자연 속에 있는 하나하나의 개체가 따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개체가 하나의 자연의 흐름과 순환 속에서 ‘하나’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 살 전후에 물려받은 부모의 마음의 상처와 동일시하고 몸과 마음이 성숙해지기 위한 이기성을 채우려는 과정에서 도리어 더 큰 상처를 받으면서 딱딱한 콤플렉스라는 껍질로 감싸게 되어서 자연의 흐름과 순환 속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채우지 못한 이기성의 허기 때문에 10세 이후의 삶을 자신의 이기성을 채우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이기적인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한 인간들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면서 이기적인 구성원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다 보니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 일 수밖에 없다.

 

--왜 인간의 삶은 허무한 것일까?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색깔에 지나지 않고, 그 색깔은 없음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내 마음이라는 영사기의 콤플렉스라는 색깔 렌즈를 통해서 비춰진 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공간에 살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콤플렉스라는 색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이야기 하는 것과 과거에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은 결국 똑 같은 환상(色)에 지나지 않지만 영화의 한 장면은 ‘가짜’라고 믿고, 과거에 겪은 일은 ‘진짜’라고 믿기 때문에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까지 상처로 남는 것이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핑크대왕’이라는 우화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나라의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은 핑크색을 너무나 좋아해서 자신이 입는 옷과 집기와 가구 그리고 궁궐을 모두 핑크색으로 칠을 해서 행복해 했다. 그러나 궁궐 밖에는 핑크색이 아닌 것을 알고 모든 백성들에게 핑크색 옷을 입게 하고, 길과 집 그리고 소와 돼지를 비롯한 모든 가축까지도 모두 핑크색으로 칠하도록 명 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왕이 산 너머 세상을 바라보니 여전히 핑크색이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파란 하늘색을 핑크색으로 색칠 할 수 없을 알게 되어 왕의 마음이 근심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하늘의 색도 핑크로 색칠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을 수소문 했다. 그 소문을 들은 지혜로운 나그네가 왕의 근심을 간단하게 덜어주었다. 왕에게 핑크색 안경을 쓰게 한 것이다. 핑크색의 안경을 쓴 핑크 대왕은 하늘과 땅 모든 것이 핑크색인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생후 10년 동안 이기성을 채우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가 있는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콤플렉스라는 부정적인 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든 계획을 자신의 이기성을 채우기 위한 초점에 맞추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정해준 이타목적의 설계도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상처와 무능함을 감추기 위한 목적의 설계도를 만들어서 그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뇌 능력의 의식부분에 해당되는 10%의 능력 도 채 활용하지 못한다.

 

뇌 능력의 10%를 활용했다는 아인쉬타인의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아인쉬타인의 과학 이론은 과학을 발전시켰을지는 모르지만 그 발전된 과학 때문에 자연의 흐름을 깨고 인류를 더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이론을 제공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행복하기 보다는 ‘인생무상’을 느끼면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인간은 완전한 존재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 공으로부터 온 존재이다. 아무개인 나는 39세에 콤플렉스라는 껍질이 모두 벗겨지면서 그 안에 있던 수증기와 같은 ‘나(진아眞我)’ 망망한 후주에 퍼지는 경험을 하면서 ‘지구와 하나’되는 ‘한 생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내 마음’은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하늘)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흘러가는 내 마음을 생각으로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었다.

 

또한 지구와 한생명감이 느껴진 그 이후로 길가에 버려진 매립될 쓰레기 더미를 보면 내 머리를 파내고 묻는 듯 한 느낌이 들었고, 과식을 해서 배가 부르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겨울에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올 때 버려지는 찬물을 보면서 먹을 물이 없어서 흙탕물을 먹는 사람들이 떠올라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구에서 종이컵을 몰아내자’는 환경운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수중기와 같은 무(無)의 존재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과 ‘나는 인간으로서 완전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나의 존재는 수증기(無)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를 창조한 창조주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내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마약을 먹으면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내 생명을 있게 한 자체가 감동이었고, 펄떡거림과 숨 쉼 자체가 엄청난 감사로 느껴졌으며 ‘이 느낌이라면 인간이 아닌 잡풀이나 하루살이 곤충의 삶도 감사 충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을 얻어서 해탈 한다는 것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은 벗어나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상태에서도 ‘감사’의 마음만 갖는다면 모든 것에 걸림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100%의 완전성에서 의식 뇌인 10%(좌뇌)만을 인식하고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무의식(신의식:神意識)이라는 90%(우뇌)가 콤플렉스라는 껍질 속에 그냥 묻혀 있기 때문에 신성, 즉 우주에너지와 교감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님을 품고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늘과 는 하나의 ’이라는 말이다. 내가 인식하는 ‘나’의 주성분은 ‘의식, 마음의 상처, 콤플렉스’라는 딱딱한 껍질이다. 그래서 ‘나’를 불완전한 존재, 무능한 존재, 변화시켜야 할 존재라고 여기면서 ‘나’를 부정하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세상을 헤매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존재는 내 콤플렉스의 껍질 속에 들어있다.

 

내가 부정하고 버리고 싶어 하는 ‘나’라는 돌멩이가 바로 내가 그토록 찾고 있는 보석인 것이다. ‘나’라는 보잘 것 없는 돌멩이를 부정하고, 감추고, 버리면서 결국 내 안의 하나님(보석)을 함께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모른 채 자책하고, 불평하고, 하늘을 원망하면서 허무한 삶을 살아간다.

 

하늘아래 목적 없이 창조된 창조물은 하나도 없다. 하늘은 완전하기에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완벽하게 창조 했다. 그러나 10%의 껍질이 전부인줄 착각한 채 나를 부정하고,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내 안의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내 이기적인 계획만을 추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이기성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나의 계획이 사라지게 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계획이 임하게 된다. 그 이후의 삶은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 속에서의 모든 인연에 맡기기만 하면 저절로 돌아간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에서 벗어나 과학이라는 인위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자연의 순환의 고리를 끊으면서 자연을 위협하기 때문에 자연 역시 더 큰 자연 재앙으로 인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씨앗과 애벌레들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러나 우주의 큰 틀에서 볼 때에는 인간과 씨앗과 애벌레들이 아무런 차이 없이 자연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씨앗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싹이 트고, 애벌레와 벌 나비들의 도움과 사계절에 순응하면서 200~300배 이상의 풍요로운 열매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창조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기성을 채우고 나면 콤플렉스라는 껍질에서 벗어나 우주와의 합일을 이루면서 사는 동안 만나는 일과 사람의 인연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사용하지 못한 인간의 무의식(신의식:神意識)의 90%의 뇌를 활용하면서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도 저절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 하늘은 나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말을 한다. 이는 온 곳으로부터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온 것은 어디인가? 바로 하늘인 것이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내의지가 아니고, 내 몸 또한 내 것이 아니기에 눈 깜박임조차 내 의지로 할 수가 없다. 나는 하늘로부터 왔기에 하늘의 뜻에 따라 살다가 하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늘이 소금을 창조한 목적은 녹여서 짠 맛을 내기 위함이고, 하늘이 양초를 만든 이유는 불을 붙여서 어둠을 밝히기 위함이고, 하늘이 씨앗을 만든 이유는 썩어서 200~300배 이상의 열매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 이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창조목적을 가지고, 각기 다른 달란트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하늘이 부여한 재주를 이용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이타적 목적으로 창조했다. 그래서 하늘은 나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와 같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마음의 상처와 동일시하면서 단점회복에만 초점을 맞추고 껍질(조건)변화에만 매달려 자신의 이기성을 채우기 위한 계획만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하늘의 계획을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꿈이라고 해서 다 같은 꿈이 아니다. 꿈 중에는 가짜 꿈과 진짜 꿈이 있다. 가짜 꿈은 자신의 마음의 상처나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이기성을 채우기 위한 꿈의 설계이고, 진짜 꿈은 하늘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아타적인 꿈이다.

 

가짜 꿈은 뇌의 10% 즉 의식의 뇌만을 활용하기 때문에 이루기가 어렵고, 그 꿈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이룬 것으로 착각하면서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허무감에 빠지거나 이룬 것이 쉽게 무너지게 된다. 그에 반해 진짜 꿈은 뇌의 90% 즉 무의식(신의식:神意識)의 우주 에너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힘이 들지 않는다.

 

진짜 꿈은 이기와 이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나무와 나비와 같이 서로 도우면서 모든 인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적인 상상력을 초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그것은 하늘이 목적한 바를 이룬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으로 돌리게 된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지구 전체에 풍요를 제공하는 나무처럼... 하늘의 계획에 따라 나무처럼 살다간 부처와 예수와 테레사와 같이.....

 

-- 깨달음은 결국 ‘나는 작고 못난 돌멩이가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창조된 씨앗 이었구나!’ 하는 것을 아는 일이다. 크기를 부풀리고, 화려하게 하면서 껍질에 집착하는 돌멩이로서의 삶이 아니라 껍질을 깨어 물을 흡수하기만 하면 때가 이르러 싹과 꽃을 피우고 200~300배 이상의 풍요로운 열매로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씨앗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 아무개는 아버지의 조울증과 어머니의 생선행상으로 인한 부모님의 마음의 상처를 나 자신과 동일시하고, 사춘기에 이르러 ‘무능한 존재’로 자학하면서 살 가치가 없는 스스로 ‘볼품없는 작은 돌멩이’로 여기면서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했지만 죽음 보다는 ‘못난 그대로 인정하면서 살아가기’ ‘있는 그대로의 나 사랑하기’를 선택했다. 작고 못난 돌멩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크기를 부풀리고, 껍질을 화려하게 하기 보다는 있는 돌멩이 그대로를 사랑하면서 물을 흡수 했다. 그렇게 나는 19세부터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내 모습 그대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면서 살았다.

 

결국 나의 무능함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었다. 나는 난독증이 있어서 책읽기를 포기했고, 대인기피증이 있었기 때문에 스승과 종교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 나는 20년 동안 물에 떠있는 낙엽과 같이 모든 것을 인연의 흐름에 맡긴 채 오직 못난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면서 고치속의 번데기와 같이 외부의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 하루에 3~4회 ‘창현아 널 사랑해’라는 말만 되뇌었다. 그렇게 20년이 흘러 39세가 되던 해에 ‘내 안에 나를 통해 이 땅에서 하늘이 이루고자 하는 일의 엄청난 설계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20년 동안 사랑의 물을 머금은 나는 단순히 작고 못난 돌멩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꽃과 풍요로운 열매를 품은 씨앗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1965~ 2011년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무개인 나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1. 알 시절(김창현: 생후 10세까지)

: 알 속에 갇혀 있는 상태로 외부환경이 나 인줄 알았다. 내가 태어나면서 조울증의 아버지, 생선행상의 어머니의 마음의 상처를 물려받고, 내가 들은 부정적인 말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나는 못난 존재’로 생각했다.

 

2. 애벌레 시절(김창현: 10세~18세까지)

: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처럼 못난 나를 타인과 못난 나를 비교하면서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모든 에너지를 나를 감추는데 사용하면서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용기가 없어서 시도하지도 못했다.

 

3. 번데기 시절(김창현: 19세~38세)

: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되어서 외부의 시선과 차단시키고,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오직 나 자신에 대해서 ‘못난 그대로 살자’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 ‘변화하려 하지 말고 내 모습을 사랑하자’는 생각에 하루에 3~4회 정도 나사또(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또...)를 했다. 나를 부정하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번데기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4. 나비 시절(파르재: 39세~ 45세)

: 고치 속에서 벗어나면서 나비가 되었다. 나는 번데기가 나비가 된 것처럼 39세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고, 못난 돌멩이로만 알았던 내가 내 안에 엄청난 설계도를 품은 씨앗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을 ‘김창현’이 아닌 전혀 다른 ‘파르재(팔인재: 여덟 인재가 태어난다는 내가 태어난 고향의 지명)’로 바꾸었다.

 

나비시절이 되면서 내 안에서 10%의 의식의 껍질(마음의 상처, 콤플렉스)가 모두 사라짐과 동시에 지구와 한 생명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저절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행복을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90%의 무의식(신의식:神意識)의 에너지가 작동하면서 난독증으로 책을 거의 읽지 않은 나에게 깨달음에 관한 글 쓰는 능력과 전혀 새로운 초등수학지도법(우뇌기록법)의 달란트가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달란트로 김영사를 통해서 초등수학에 관련한 49권을 출판 했고, 자비로 ‘나이깨’(나는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다.)를 출판하게 되었다. 또한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행복을 위해서 ‘파르재 마을’ 빌딩을 지구 전체 마을마다 짓는 비젼과 지구에서 종이컵과 1회용품을 몰아내는 비젼이 보였다.

 

5. 나비가 사라진 이후 (아무개: 46세 이후 )

: 지금은 나비가 사라져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인 아무개(我無개. 명사형 어미 ‘개’-지우개, 털이개 : 내가 사라진 존재)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나에게 비춰졌던 파르재 빌딩과 여러 가지 비젼은 내가 이룰 것도 아니고,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이 이루어 놓은 것을 나에게 미리 비추어준 것뿐이라는 확신과 ‘나’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닌 오직 하늘이 쓰고자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사라졌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인간적인 상상력을 뛰어 넘어서 하늘이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 즉 ‘아무거나 다 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10%의 의식은 이기성이 모두 사라지고, 90%의 이타적인 무의식(신의식:神意識)이 하고자 하는 일을 현실적으로 적용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한 삶 보다는 나를 통해서 하늘이 이루고 싶어 하는 이타적인 일에 이 목숨이 쓰여 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죽음 계획은 침대에서 시간낭비 하는 일이 없이 ‘지구의 모든 생명들의 행복을 위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위에서 자연사하기’이다.

 

* 삶의 목적을 알고 싶다면 나사또 방법을 권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깨달음까지는 필요 없고.... 내 삶의 목적을 제대로 찾아 방황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신비하고 대단한 그 무엇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하늘이 나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는 진짜 꿈을 찾는 것입니다.

 

자학의 극에 달했던 19세의 나는 ‘이 못난 나를 이끌고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나?’라는 허무를 느끼면서 자살을 생각도 했지만 용기가 없어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죽는 것 보다는 차라니 못난 그대로 인정하고 사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깨달음이고 뭐고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나는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외부세계와 내 마음을 차단한 하고 내 삶을 변화시키려 는 노력을 포기한 채 못난 그대로를 인정하고 나 자신에게 사랑의 말을 고백했습니다. ‘창현아 널 사랑해’라는 말을 하루에 3~4회씩 20년간 나사또를 하면서 완전한 마음의 치유를 얻고, 콤플렉스의 껍질이 모두 사라지면서 ‘내 마음이 곧 신성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 마음에 순종하면서 내 안에서 나오는 달란트를 이용하여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나사또(나는 나를 사랑합니다.)의 과학적 치유 효과

말은 파동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은 용기 속에 있는 물은 얼리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눈꽃 결정체가 생기고, 부정적인 단어를 적은 물은 일그러진 눈꽃 결정이 생기는 실험을 한 ‘물은 답을 알고 있다’(저자: 에모토마사루)라는 책은 ‘사랑’의 말로 물이 변화됨을 증명한 책입니다. 화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잘 자라는 이유 역시 화초 속에 물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물을 담은 ‘물그릇’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가 바로 탁한 물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파동에너지는 몸속의 탁한 물(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거나 잘못된 과거의 일을 후회하면서 현재의 1/3의 에너지를 빼앗깁니다.

 

또한 치유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염려하면서 또 현재의 1/3의 에너지를 빼앗깁니다. 그래서 남은 1/3의 에너지로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지치고, 두려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파동 에너지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살고 있는 애정결핍으로 상처받은 세 살 아이가 치유되어 떠나가게 됩니다. 과거의 두려운 기억이 사라지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되어서 오늘 하루에 솟은 에너지 3/3을 모두 오늘에 몰입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몰입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미래는 저절로 오게 됩니다. 씨앗은 꽃이 되는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물만 흡수하면 때가 되어 저절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벌과 나비가 도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애벌레 또한 나비가 되기 위한 그 어떤 노력이나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애벌레의 삶에 충실히 살다보면 하늘이 정한 때가 되어 저절로 나비가 됩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씨앗과 애벌레의 삶과 똑 같은 삶을 살아가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와 동일시 한 인간만이 자신의 콤플렉스라는 껍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무개의 20년간의 나사또 효과

1. 생후 10년 동안 채워야 할 이기성을 20년간 나사또로 모두 채웠습니다.

: 선과 악의 기준은 바로 ‘내 이기성을 채울 수 있으면 선한 일’ ‘내 이기성을 채울 수 없으면 악한 일’입니다. 이기성을 모두 채우고 나니 내 기준의 선과 악의 틀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면서 하늘의 본래 창조목적에 따라 나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2. 내 안의 달란트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깨달음에 관한 글이 39세 이후로 매일 계속 뿜어져 나와서 ‘나이깨’(나는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다.)라는 책과 수학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는데 ‘우뇌기록법’이라는 초등수학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게 이미지계산법(김영사)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3. 내 안에서 하늘의 설계도를 발견했습니다.

: 나는 나를 위해서 창조된 존재가 아닌 ‘하늘에서 이룬 선을 이 땅에서 이루라’는 창조목적을 가진 존재로서 남는 것을 가져다 놓고, 필요한 것을 그냥 가져가는 지구의 마을 마다 ‘파르재 빌딩’을 지으라는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나에게 준 두가지 달란트가 있습니다. 깨달음에 관한 글쓰기 달란트를 통해서 파르재 빌딩을 운영할 사람을 모으고, 초등수학에 관한 책을 팔아서 파르재 빌딩을 운영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4. 나의 진짜 꿈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진짜 꿈은 파르재빌딩에 오는 모든 사람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진정 이루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 나사또의 단기 과정

나사또 단기 과정은 제가 직접 해본 것이 아니라 ‘파르재마을 카페’ 주민들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경험담을 통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나사또를 100일 이상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족이 변화되는 모습을 경험하고, 베이비시터를 하시는 어느 분은 아이와 함께 나사또를 하니 잠을 잘 못자고, 폭력적인 아이가 잠도 잘 자면서 폭력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경험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1. 하루 3천 번 소리 내어 나사또 하기

: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를 오전에 1천 번, 오후에 1천 번, 잠자기 전까지 1천 번 합니다. 밥을 먹을 때에는 생각으로만 해도 되고, 걸으면서, 운전하면서, 단순 노동을 하면서 나사또를 하면 됩니다. 마음먹고 하자면 하루 3천 번이라는 횟수는 절대로 어렵지 많은 않습니다. 소리 내어 나사또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 이외에 지나간 일을 생각하거나, 미래에 올 일에 대한 두려운 생각 등을 쫒아버리는데 효과적입니다. 불안한 생각만 하지 않아도 마음은 치유됩니다.

 

2. 친숙한 멜로디에 ‘나사또’ 가사를 붙이기

: 말이나 생각은 좌뇌에서 작동하고, 몸으로 체험하거나 멜로디 등은 우뇌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마음은 우뇌에 있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치유 하는데 멜로디에 나사또 가사를 붙여서 흥얼거리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입가에 금 새 미소가 번지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3. 변화하기 위해 ‘나사또’하는 것은 절대 금지

: 변화나 치유를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나사또를 하는 것은 치유의 효과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성인의 몸을 입고 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지 못한 상처받은 세 살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마음속의 상처받은 세 살 아이는 오직 ‘조건 없는 사랑’만이 치유가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또를 하면 언젠가 반드시 치유될꺼야’라는 생각은 ‘조건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마음속의 세 살 아이가 눈치를 채기 때문에 치유 효과가 없습니다.

 

4. 산 정상의 목표를 세우지 않기

: 깨달음과 치유라는 산 정상의 목표를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오직 이 순간에 ‘나사또를 하고 있는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한 걸음을 걸었는가?’에만 초점을 맞추어야지 산 정상을 목표를 둔다면 나사또를 하면서 치유가 되어 중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산 정상을 두고 있기에 아직도 산 정상에 이르지 못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힘겨움과 허무감을 느껴서 나사또 방법에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직 ‘오늘 한 걸음을 걸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한 걸음씩 그렇게 쉬지 않고 걷다 보면 어느 새 정상은 내 발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과정은 나의 몫이지만 결과는 오직 하늘의 몫입니다.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왔듯이 하늘의 때는 내가 조급해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5. 적어도 100일 이상 쉬지 않고 실천하기

: 어떤 생각이나 마음먹은 일이 몸 전체의 세포로 퍼지는 기간이 약 100일 이라고 합니다. 나사또를 10일 정도 하다가 쉬면 ‘사랑’이 몸의 10%정도 퍼져나가다 다시 원 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개를 올라가다가 쉬면 다시 원점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100일이 지나고 나면 한 고개를 넘은 것이기 때문에 원상태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6. 깨달음은 ‘나’ 없애기

깨달음은 ‘나의 없앰’을 통한 ‘우주와 하나 됨’입니다. 그러나 나를 없애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나를 반을 없애면 반이 남고, 그 반을 또 없애면 또 반이 남기 때문에 나를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초록 바탕에 파랑은 있음이고, 초록바탕에 초록은 없음이듯이 ‘나’를 없애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일은 우주와 같은 성질인 ‘사랑’으로 나를 채우면 됩니다. 나사또를 통해서 내 안의 마음의 상처를 사랑으로 채워지면 우주와 같은 성질이 되어서 ‘나’가 사라짐과 동시에 우주와 합일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우주 운행의 근본 에너지인 ‘사랑에너지’가 돌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에너지를 전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지금 까지 늘어놓은 말을 한 줄로 정리해보면....

‘아무 목적 없이 나사또를 하루 3천 번 이상 100일간 실천하기’입니다.

목적 없이 나사또를 실천한다면 분명 치유의 효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데 실패하는 이유?

1.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세 살 까지 부모의 마음의 상처를 내려 받으면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성장하는 동안 주로 단점만을 지적받으면서 자신을 부정하는 잘못 세뇌 된 세뇌교육으로 불완전성을 회복하고자 세상을 헤매면서 점점 더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하늘이 부여한 자기 안의 달란트와 설계도를 잃어버린 채 세상을 헤매기 때문입니다.

 

2. 마음의 상처와 채우지 못한 이기성 때문입니다.

생후 10년 이라는 기간 동안 몸과 마음이 성숙해지기 위한 조건 없는 사랑과 채워야 할 이기성을 채우지 못하고 세 살까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마음의 상처와 이기성을 채우려는 과정에서 얻게 된 마음의 상처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스스로 ‘불완전한 인간’으로 낙인을 찍고, 자연스러운 이기성을 버려야 할 악으로 규정하면서 세 살부터 시작된 애정결핍 즉 이기성의 허기로 인해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속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이타적인 삶 보다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남긴 유언은 ‘네 안에 등불이 있다’와 ‘나를 위해서 탑도 절도 짓지 말라! 오직 명상하라! 명상하다가 내 모습이 나타나거든 당장 칼로 목을 베어라’이고, 예수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상과 십자가로 부처와 예수의 형상을 만들어서 우상화 하면서 외부의 신비한 힘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신성의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4.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가지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욕심이 자신의 이기성을 채우기 위한 강한 기준이 생기면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분별이 생기고, 지혜의 눈을 가리게 되어서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욕심은 마음의 상처와 콤플렉스를 돈과 명예로 감추려는 욕심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깨달음은 비움입니다. 온전한 비움을 통해서 하늘의 뜻이 나에게로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하늘의 뜻을 내 안에 품고 있기에 목심을 비우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씨앗은 꽃과 열매가 되려는 목적의 욕심을 갖지 않고, 애벌레 또한 나비가 되려는 목적의 욕심을 가지지 않고 온전히 하늘의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5. 책을 통한 이성적 지식의 논리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유학(有學)은 무학(無學)을 뛰어 넘지 못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우주의 이치와 지혜를 아는 것은 생각과 지식이 아닌 오직 마음의 비움이라는 말 입니다. 지혜 혜(慧)의 한자를 분석하면 ‘빗자루와 마음’의 합성어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혜는 마음을 쓸어내야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지식과 생각은 주로 좌뇌로 저장이 됩니다. 좌뇌(뇌의 10%이하)는 비교, 분석, 판단하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책을 통한 지식 습득은 생각에만 머무를 뿐 행동의 변화까지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식은 깨달음의 결정적인 문제인 마음의 상처와 콤플렉스라는 껍질의 치유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깨달음에 관한 잘못된 상(象)을 짓기 때문에 라즈니쉬는 ‘지식은 화근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느낌과 마음을 담고 있는 우뇌(뇌의 90%이상)는 인류 진화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소우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좌뇌에 비해 무한대의 저장용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뇌에 담긴 마음을 치유하면 마음에너지는 전기에너지와 같이 온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여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면 저절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활짝 핀 꽃에 꿀과 향기가 피어올라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어서 꽃이 열매가 되도록 돕듯이 나를 돕고자 하는 많은 인연들이 엮기면서 하늘이 나를 창조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됩니다.

 

6. 스승과 종교를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이미 꽃과 열매를 품고 있고, 애벌레는 이미 나비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순환과 인연 속에서 억지로 노력하지 않고 순간 순간에 충실해서 살아가다 보면 하늘의 때가 이르러 저절로 씨앗은 꽃과 열매가 되고, 애벌레는 저절로 나비가 됩니다.

 

인간 또한 신성을 품은 이미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승과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얻은 마음의 상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스승과 종교에 집착하면서 단점 회복에만 매달리게 되어서 하늘의 준 달란트 즉 자기 안의 등불과 보석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인간으로서 완전한 존재이기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기만 하면 자기 안에서 하늘의 창조목적의 설계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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