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 신임주한미대사, 김대중, 임창영, 박정희
한반도 최근세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우리 한민족의 최근세사가
얼마나 더럽게 꼬여 있는지도 아마 잘 알 것이다.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나는 역사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소위 "재야사학자"도 아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로서는 그저 무수히 많은 평범한 국민들 중에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역사상식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역사문제들에 대해 깊이 추적해보지 않는다.
다만 그저 진실왜곡적 역사지식에 세뇌당하여
우민이 되는 것을 스스로 방지할 수 있는 정도의 역사상식만 알고자 할 뿐이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어떤 학생들은 오늘이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이나 제사날 정도로 아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있는 "현충사" 라는 명칭 때문에 현충일의 의미와
헷갈리는 것이 아닐까.....생각해 본다.
현충사.....
그건 아마도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 아닌가 싶은데...
나도 소시적에 가보니 아주 긴 칼들이 전시되어 있더군.
누군가는 그 긴 칼들이 사실은 왜놈들의 칼이라는 말도 있는 것 같고...
그것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지는 내가 모르겠다.
그런데.....위키백과 사전을 찾아보니 놀랍게도
현충사라는 것이 조선왕조 숙종시절부터 있었던 것이로군요.
나로서는 그동안 현재의 "현충사"란 친일매국노 박정희가
최초로 건립한 건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가 현충사를 엄청 띄우는 작업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현충사를 그렇게 엄청 띄우면 자신의 친일매국노 역사가
독립투사나 애국자로 둔갑될 수 있는 줄 착각했었던 것인지....하여튼
현재의 현충사는 박정희에 의해 신축된 것이 확실하군요.
해방 이후인 1963년에는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충사의 구역을 확장하고 숙종 때 세웠다는 옛 본전을 대신하여
새로운 본전을 신축함에 따라 충무공의 영정을 옮기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의 현충사 내에는 왜놈들 잔재가 많다고 들었는데...
예컨데, 충무공 영정이 친일매국노 화가에 의해서 그려졌다던가....어쨌다던가 등등..
[정보] 충무공 이순신 영정의 비밀
충무공 이순신 영정
(1953, 장우성張遇聖)
- 1973년 10월 충무공 표준영정으로 지정 -
http://cafe.daum.net/gunplaworld/1QGk/2326?docid=wsj8|1QGk|2326|20100227003643&q=%C3%E6%B9%AB%B0%F8%20%BF%B5%C1%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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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
장우성(張遇聖, 1912년 ~ 2005년 2월 28일)은 한국의 한국화가이다. 아호는 월전(月田)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1] 친일 행적과 관련하여 그가 그린 유관순의 표준 영정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며[2][3],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가족들은 장우성이 "일제시대 화가로 입문하기 위해 상을 받고 활동을 했을 뿐"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라든가, 유관순 열사라든가 등 애국자들을
웃기게도 일제패망후 한국에서 친일매국노들이 자기들 멋대로 다루었다는 사실.
현충일....
오늘이 애국열사들을 기리는 날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대한 존경심이 별로 들지 않는다.
왜냐면 거기엔 친일매국노들도 바글바글 묻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16) 부끄러운 역사 친일 ‘미완의 청산’
ㆍ친일파 죗값 치르긴커녕 기득권 대물림 ‘끝나지 않은 국치’이토 히로부미 통감(오른쪽)과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의 얼굴이 함께 나온 기념엽서.
친일파란 일본의 이익과 요구에 따라 적극 협력한 무리를 일컫는다. 일본의 이익과 요구는 시기마다 다르게 등장했고 그 때마다 친일파들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다. 1910년 이전 일제의 근본 요구는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치라는 것이었고, 여기에 조응한 무리들이 이완용과 같은 ‘매국행위에 가담한 무리’였다. 이들이 곧 ‘매국형 친일파’다.
이완용은 자신을 친일매국노로 부르는 것에 대해, 당시 국제정세를 보아 대한제국은 어차피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부질없이 저항운동을 하다 헛된 생명들만 희생되느니 차라리 자신이 나서서 희생을 구하고자 합병조약 체결에 나섰다고 강변했다.
정말 그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기에 나라를 넘겼을까? 거짓말은 바로 드러난다. 이완용은 망국 후 병합기념 은사금으로 20만원(약 40억원)을 받았다. 원금을 은행에 예치하고 연 5%의 이자를 받았으니 1년에 한번씩 2억원의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해마다 2억원의 로또복권에 당첨된다고 상상해보라! 또 그는 조선 귀족이 되어 백작을 수여받았으며, 조선총독의 최고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나라가 망해 모두가 노예 신세로 전락했지만 이완용을 비롯한 불과 70여명의 매국형 친일파들은 오히려 부와 권력과 명예를 통째로 거머쥐었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신의 부귀영달만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긴 것이다.(혈서 군관지원)
1910년 8월 이후에는 나라가 없어졌기 때문에 매국형 친일파를 대신해 새로운 유형의 친일파, 곧 ‘직업형 친일파’가 등장했다. 일제는 조선을 악착같이 수탈하는 것을 ‘통치의 효율화’라고, 조선인의 반항을 무력으로 짓밟고 영구히 지배하는 것을 ‘통치의 안정화’라고 내세웠다. 제2세대 직업형 친일파란 바로 일제 식민통치의 ‘효율화와 안정화’에 적극 협력한 무리를 말한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일제 수하의 조선인 고위공무원들이었다.
일본 또는 그 괴뢰국인 만주국의 소위 이상도 친일파의 핵심이었다. 일제나 만주국의 사관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면 자동적으로 고등관이 되었다. 조선인이 사관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물며 당시로는 선망의 대상인 교사직도 내팽개치고 혈서까지 써서 일본군 예비역 장교이자 만주군 소위로 복무한 경우 어찌 그 죄가 가볍다 하겠는가.
일제 말 새로운 DNA를 가진 친일파, 이른바‘황국신민형’ 또는 ‘전쟁협력형 친일파’들이 나타났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이래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말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 시기 일제는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조선인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총동원했다. 조선인이 일왕(천황)과 일본을 위해 모든 재산을 갖다 바치고 나아가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세뇌공작이 필요했다. 이러한 대규모 이데올로기 세뇌공작과 전쟁 동원을 위해 일제는 조선인 명망가,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교육자 등을 앞세웠다. 이들은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내선일체) 또는 ‘우리는 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자식이다’(황국신민)라며 민족말살에 앞서는 한편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했다.
이들 지식인은 훗날 ‘일본을 찬양하고 전쟁에 나가라는 글을 쓰거나 연설은 했을지언정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거나 미미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고대 이솝우화에 이들을 향해 질타하는 내용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승전국의 왕에게 포로로 잡힌 나팔수가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저는 당신의 군사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기도 없고 이 나팔뿐이랍니다.” 그러자 왕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정녕 네 목숨을 앗아야겠다. 나팔을 불어 우리를 공격하도록 독려한 놈이 바로 너였구나!” 일제의 민족말살과 침략전쟁의 나팔수들이 바로 친일 지식인, 언론인, 문화예술인, 종교인들이었다. 조선인의 정신마저 마비시켜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몬 죄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친일파들은 마땅히 그 죗값에 따라 처벌을 받은 후 새로 건국된 나라에서 새 삶을 사는 기회를 제공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승만과 미군정,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한국민주당이 야합해 친일파를 중용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세웠다. 그 결과 제1공화국은 친일공화국으로 출범했다. 그 후 친일세력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를 장악했고, 학연·지연·혈연 등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그 기득권을 이어오고 있다.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빈곤을 대물림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는 대한민국만의 속담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독립운동가 영령을 모신 국립현충원에는 40명 가까운 친일파들이 국가유공자로 버젓이 안치되어 기려지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자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를 주류 언론이 빨갱이조직이라고 매도하고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이상한 나라가 여기 있다. 친일청산에 앞장섰다는 게 일부 권력층과 보수 세력에 의해 죄과가 되어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이 주홍글씨로 낙인찍히는 나라. 어쩌면 친일청산이라는 제2의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안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100년 전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 국치인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152133215&code=210000
신임 주한미대사 성 김....
성 김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신임 주한미대사로 온다고 해서
친일매국노 짓을 했던 수구 찌라시들은 마구 가슴이 설레는지
마치 한국국적을 가진 한국인이 주한미대사를 하기라도 하는 양
떠들어대고 있다. 그래서 무지몽매한 독자대중들은 아마도
그것이 매우 좋은 현상으로 착각하거나 자랑스러운 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한국말 잘하는 한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미국국적을 소유하고
미국관리가 된 자들은 모두 미국정부의 충직한 하수인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가 한국인 유전자를 가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국익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성 김이라는 인물 개인에 대해서는 도대체 아무런 관심도 없다.
다만, 기묘하게도 그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들이...갑자기 나의 흥미를 끌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주한 미국대사에 첫 한국계 성 김… 이민자 출신 ‘한국명 김성용’ 그는 누구
(동아일보)
국내에서 출생한 이민자가 고국의 대사로 부임하는 것은 한국 외교 사상 처음이다.김 내정자는 미국 주류사회에 도전해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집안에서는 철저하게 한국식 생활을 한다.
1960년생으로 한국 이름이 김성용인 그는 서울 은석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녔다.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 부친인 김재권 전 주일공사가 1974년 공직을 떠나 캘리포니아 주로 이민을 가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또 한미관계를 한국인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국 외교관인 그는 지역 한인 커뮤니티와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한미관계의 발전 방향에 대해 폭넓은 의견교환을 해왔다.
김 내정자의 모친은 가수 임재범 씨 부친인 임택근 전 아나운서의 누나다. 그는 임 씨와 사촌지간이다. 또 동갑인 정진석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과는 어릴 적부터 오랜 인연을 맺어 그가 결혼할 당시 정 수석이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한국식으로 함을 졌다.
http://media.daum.net/politics/view.html?cateid=1068&newsid=20110606031124191&p=do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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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한에 납북됐던 駐日공사의 아들이…
주한미국대사 내정 성 김
임재범·손지창과는 사촌
조선일보 | 김진명 기자 | 입력 2011.06.06 03:29 | 수정 2011.06.06 05:39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특사의 부친은 김기완(다른 이름 김재권) 전 주일공사다. 김 특사는 1993년 폐암 판정을 받은 김 전 공사가 1994년 사망하기까지 1년간 국무부를 휴직하고 간병을 도맡아 할 만큼 아버지를 각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김 특사의 부친은 1958년 괴한이 부산 발 서울행 경비행기를 납치해 북한 으로 끌고 갔을 때 탑승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여일 후 판문점을 통해 한국에 돌아왔으나, 북한과의 인연은 아들 대로 이어졌다.
김 특사는 어린 시절을 서울 성북동에서 보냈다. 청와대 정진석 (51) 정무수석과는 성북동 골목을 함께 누비던 '동네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김 특사 가족은 그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73년 당시 주일공사였던 아버지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의 여파로 공직을 그만두면서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김 특사는 한국말을 꽤 유창하게 하지만, 북한과 협상에 나설 때면 철저히 영어만 사용한다고 한다.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view.html?cateid=1011&newsid=20110606032913327&p=chosun&RIGHT_COMM=R11
그러면 이제 성 김의 아버지라는 "김재권" 전 주일공사라는 인물에 대해 약간 알아보자.
[6/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1분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3&uid=53950
차기 주한 미국대사에 성 김 6자회담 특사가 내정됐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198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언론은 1882년 한-미 수교 이후 12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가 탄생했다며 반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족사를 보면, 역사의 기이하고도 서글픈 인연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부친은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 정보요원이었습니다. 전 주일공사 김재권 씨(본명 김기환)입니다. 그가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불명예스럽게도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사건입니다.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당시 주일공사 직에 있던 그는 납치사건의 일본 내 총지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7/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1분
1977년 미국 하원 소위원회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밝힌 김대중 납치 실행범 명단을 보면 △최고책임자 이후락(중앙정보부장) △한국 내 지휘 감독 김치열(중정 차장), 이철희(중정 차장보) △일본 내 총지휘 김재권(주일공사) △실행그룹 윤진원(공작 1단장), 윤영로(주일 대사관 참사관), 김동운(1등 서기관), 유춘국(2등 서기관), 홍성채(1등 서기관), 백철현(1등 서기관), 유영복(요코하마 총영사관 부영사) 등이 등장합니다.
1993년 9월 한국의 민주당 진상조사위와 일본 측 진상조사위 조사에서도 납치사건 관련자 12명 명단에, 김재권 당시 주일공사는 ‘총책지령’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행적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회고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워커힐 총지배인으로 있던 김재권 씨를 중앙정보부로 데리고 간 사람이 김형욱 정보부장이고, 납치사건의 전모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회고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8/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1분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3&uid=53950
김형욱 씨는 김재권 씨에 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는 김재권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박정희에게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지 않으면 납치사건을 공개하겠다’고 편지를 보내라. 김재권이 편지를 보냈고, 돈을 받은 후 김재권은 나를 찾지 않았다. 그는 주인을 할퀴고 가는 고양이 같은 위인이다.”
김형욱 씨는 왜 김재권 씨에 대해 이처럼 혹평을 했을까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미 CIA의 한국과 일본 책임자는, 훗날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그래그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 CIA와 그래그는 납치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납치사실을 알게 된 건 김재권 씨의 배신 때문이란 게 김형욱 씨 판단입니다.
[9/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2분
즉김대중 납치 살해계획이 실패하자 김재권 씨는 곧바로 그래그에게 공작 전모를 실토하고선 제 살 길을 찾았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납치공작 총책을 맡았던 사람이, 공작이 실패하자 조직을 배신하고 미국에 기대어 탈출구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결국, 김형욱 씨 회고에 따르면, 김재권 씨는 납치사건 총책도 했다가, 작전이 실패하자 조직을 배신하고 미국에 밀고도 했다가, 나중엔 그 공작을 갖고 한국과 거래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대가까지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니, 혹평을 들을 만도 합니다.
[10/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2분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총책이자 성 김 대사 부친인 김재권 씨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은, 박정희 군사독재가 반대파 야당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국가기관을 앞세워 저지른 극악무도한 정치테러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런 사실은 2007년, 중앙정보부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서도 확인됐습니다.
다만, 납치의 최종 목표가 살해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이 사건의 종착지는 ‘김대중 암살’ 혹은 ‘김대중 실종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연구자들 견해입니다.
[11/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2분
새삼 이 사건을 돌아보는 이유는, 새로 부임하는 주한 미국대사의 가족사를 들춰내 당사자에게 흠집을 내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역사의 기이한 인연이 놀랍고 한국의 처지가 왠지 초라해 보여, 이면사를 소개할 따름입니다. 그의 부친이 사건의 모든 진실을 역사 앞에 고해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작고(1994년 6월)한 상황에서 굳이 부자를 연관 지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감정적으로야 ‘미국이 한국을 뭐로 보고 그런 인사를 보내느냐’고 불편해하며 우리 정부에 아그레망 거부라도 촉구할 수 있겠지요. 만일 과거 미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사람의 아들이 한국으로 귀화했다가 주미 한국대사로 부임한다면 아그레망은커녕 미국 입국이나 가능했겠느냐며 불쾌해할 수도 있겠지요.
[12/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3분
그러나 현재 미국 국적의 미국인인 그에게 한국 국적이었던 부친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물을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더구나 박근혜 의원이,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숱한 살인과 인권 유린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한국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습니다. 과거사를 놓고 어떤 자격, 무슨 낯으로,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의 부친의 과거 행적에 대해 씁쓸한 것은 한국민들의 감정일 뿐이고, 미국과 그가 문제의 납치사건에 대해 얽매일 이유도 없겠지요. 다만, 우리 언론이나 국민들이 성 김 대사의 부임을 보는 시각이 줏대 있고 지혜롭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초 한국계 대사” 따위의 막연한 혈연적-감성적 보도는 순진한 접근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의 부친이 누구든 무슨 일을 했든, 그는 이제 미국인입니다.
[13/17] *심청사달 (leebywan) IP 119.195.223.33 작성일 2011년6월5일 20시33분
철저히 미합중국 연방정부 훈령에 따라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러 올 뿐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이익이 대립될 때 무조건 미국 이익을 위해 일 할 미국 외교관일 뿐입니다. 외교적 친근감까지는 모르겠으되, 단순히 한국계 출신이라고 반기고 좋아하는 것은 줏대 없는 아전인수나 짝사랑에 불과합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그늘이 잔뜩 몰린 한 지점에 그는 서 있습니다. 말하기도 그렇고 그냥 넘어가려니 찜찜한 문턱에 그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최초 한국계 대사” 운운의 소갈머리없는 보도나 태도는, 우리 처지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양정철
[17/17] S.F.인 IP 75.95.194.115 작성일 2011년6월6일 07시01분
거의 모든 재미 한국계 2세들은 미국인일 뿐입니다. 우리말을 한다해도 개독교에서 배웠기에 철저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입니다. 반미감정이 앞으로 높아지는데 오히려 보탬이 될 것 뿐입니다. 그놈 애비가 미국에 납치사실을 넘겨주었다는 것은 김형욱의 잘못된 추측입니다. 미국은 많은 돈만 있으면 이민이 가능한 곳이지요. 당시 김대중과 함께 회의를 하기위해 방일중이었던 미 대사 임창영씨는 태평양함대사령관과 절친한 사이였읍니다. 납치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는 것을 막지 못했던 임창영씨는 곧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설사 그놈 애비가 밀고를 했다고해도 미 CIA가 미 해군 헬기를 즉각 출동시킬 수 있는 제도는 없었지요.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34921
이제 성 김의 아버지라는 김재권(김기환, 김기완)이 누구인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는 참 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국정원(과거 안기부 및 중정) 간부 출신이라면...엄청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일 것 같은데...
그리고 한민족 최근세를 아는 사람이라면....미국이란 나라는 한민족의 철천지 원쑤같은 그런 나라인데
이상하게도 그들 국정원 간부 출신들은 미국으로 이민가서 사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결국 그들은 미국 끄나풀들이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미국이라는 나라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미국에 가서 사는 것일까요? 더구나 김대중 납치와 연관된 인물을 미국이 순순히 받아준 이유는
또 뭘까요? 미국은 정말로 그 사건에 대해 처음에는 몰랐던 것일까요?
어쨌든......
위 게시글들을 일별하면서...."임창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군요.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임창영이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고 말이지요.
[길을찾아서] 키신저, 아옌데 내치고 김대중 살리고 / 정경모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에 실려 팔다리를 묶이고, 오른팔에 쇠뭉치가 달린 채 바다로 내던져지기 직전, 비행기인지 헬리콥터인지가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살아났다는 김(대중) 선생의 증언이 전해진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소이다.
김 선생은 증언하길, 배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이고 비행물체의 폭음이 들리더니 배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 그로부터 30~40분 뒤 선원 한 사람이 선창으로 내려와 경상도 사투리로 “김대중 선생님, 이제는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인데, 그때 배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시간은 9일 새벽 5~6시께였다는 것이외다.
그렇다면 암살 중지를 지령한 그 비행물체는 어디 소속으로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나? 그것은 오늘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이나, 다음해가 되어 잇따라 나를 찾아온 핸더슨과 코언이 전해준 이야기로 미뤄 대체로는 짐작할 수가 있었소이다.
핸더슨이 임창영 선생의 긴급전화를 받은 것은 뉴욕시간으로 7일 새벽 2시, 그 전화를 즉시 코언 교수에게, 코언은 곧 라이샤워에게, 마침내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휴양중이던 키신저 장관에게 사태가 전해진 것은 뉴욕시간으로 새벽 4시(플로리다 시간 새벽 1시)였다는 것이외다. 그때 키신저 장관이 어떤 ‘액션’을 취했는지는 자기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김 선생의 목숨을 살린 그 비행물체가 키신저의 수배에 의한 것이라는 것쯤이야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http://www.hani.co.kr/arti/SERIES/185/367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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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영 [1909.10.30~1996.1.25]
[출처] 임창영 | 네이버 백과사전
황해남도 은율군 구월리에서 출생하였다. 1933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1935년까지 뉴욕 한인교회 목사로 있었으며, 1938년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이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청년시절 상해임시정부에 관계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참가하였다. 1948년 서재필 박사의 개인비서로 있다가 1949년 다시 미국으로 갔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유엔주재 한국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사임하였다. 1961년부터 1978년까지 뉴욕주립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반독재투쟁에 참가하였다.
북한에서는 그에게 국기훈장 제1급과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6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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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임창영 박사 일가족 축하공연 관람
15일 오후 광주 동구 서석동 조선대 운동장에서 진행된 6.15공동선언 발표 6돌 기념 축하공연장에 故 임창영 박사의 아들 임램지씨(63.보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며느리 임조안씨(59), 손녀딸 임월산(28)씨가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60615210612056&p=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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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작가 심훈·임창영 前유엔대사 손녀 反FTA 원정시위대 도우미로
임씨는 고 임창영 박사의 쌍둥이 손녀딸 가운데 둘째로, 보스턴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아버지 램지 리엠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장소 섭외와 가두행진 코스 설정은 물론 시위 관련 프로그램 등을 짜는 '집회 코디네이터'로서 원정시위대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심씨와 이씨는 그동안 각각 워싱턴과 뉴욕에 거주하면서 교포 1.5세 등 미국내 한국 동포들의 지위와 권익 향상을 위한 시민단체 활동을 활발히 벌여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나라와 국민을 위해 평생을 매진한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심씨와 이씨는 "미국이 약소국인 한국에 공정하지 못한 협상을 강요하는 것이 바로 한·미 FTA이에요. 한국에 계신 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피해가 클 것이기 때문에 함께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합니다."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view.html?cateid=1010&newsid=20060607085212469&p=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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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회] 한민통 발족위해 동분서주
김대중은 7월 6일 워싱턴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국본부를 결성했다. 임창영ㆍ안병국ㆍ동원모ㆍ김성동 등 30여 명이 참석, 김대중을 명예회장에 선출하였다.
한민통은 명칭대로 한국의 민주회복과 통일을 위한 교포 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뒷날 한국의 독재정권과 어용화가 된 사법부는 이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빌미로 삼았다. 한민통 미국본부를 결성한 김대중은 7월 10일 일본본부 구성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차 망명 기간 중 세 번째의 일본행이었다.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96686
결국...한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하면
일제패망후 남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승만시절부터 기득권을 틀어쥔 친일매국노들과 독립투사 및 그 후예 세력들이
서로 권력쟁취를 위한 다툼을 벌여왔는데....이승만 숭미사대 똥개가 무너진 뒤에야
임창영이 비로소 유엔대사 등으로 출세를 시작했는데....친일매국노 박정희의 쿠데타로
그것마저 물거품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한나라당 전신정권들이란.....친일매국노 끄나풀들과 연관된 세력들이고
현재의 민주당, 김대중 세력이란....독립투사들과 연계된 세력들로서
그 양자가 끊임없이 세력다툼을 해오고 있는 것이 바로
일제패망후 한국역사의 본질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독립투사 세력의 후예인 임창영의 후손들은
한국에 민주화 데모, 한미 FTA 를 반대하기 위해서 오고
친일매국노 세력의 하수인이었던 김재권의 아들은 주한미대사로
한국에 온다는 야그입니다.
참,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이것도 친일매국노들 및 그 후예세력들의 기득권 대물림 형태들 중에 하나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