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引聲念佛 耳根圓通

장백산-1 2011. 10. 1. 16:16

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趙  龍  憲

*원광대 대학원 불교학 박사과정 수료. 동양종교학과 강사.
「진표율사 미륵사상의 특징」, 「능엄경에 나타난 도교사상」,
「李資玄의 능엄선 연구」

3. 引聲念佛과 耳根圓通의 관계

무상에 대해서 이제까지 알려진 것은 삼구가 무억ㆍ무념ㆍ막망이라는 것과 인성염불이라고
하는 독특한 염불법으로 수행했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삼구가 사상이라면 引聲念佛은 수행법이다.

인성염불이라는 수행방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경지가 삼구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성염불은 방법이고 삼구는 목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어떤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본 논문에서 일차적으로 돈오사상을 다루고 이차적으로는 돈오의 원리적 근거와 ?능엄경?
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던 것은 이러한 상관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능엄경?을 연결고리로 하여 인성염불에 대해서 접근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수순을 설정하는 까닭은 ‘돈오’-‘?능엄경?’-‘인성염불’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돈오라는 목표와 인성염불이라는 방법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면
당연히 그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능엄경?은 인성염불과도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밀접한 관계란 결국 ?능엄경?이 인성염불을 해명할 수 있는 열쇠에 해당함을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능엄경?의 주된 수행법인 ‘이근원통’이 ‘인성염불’에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이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역대법보기?부터 조사해 보자.

김화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 인을 위하여 수계하였다.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여 스스로 단상에 올라가서 설법하며, 먼저 引聲念佛을 하며 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억ㆍ무념ㆍ막망하라.
무억은 계요, 무념은 정이며, 막망은 혜이니라.’ 이러한 삼구는 바로 총지문이다.25)

인성염불이란 것이 과연 어떤 염불법인가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는
‘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하고, 염불 소리가 없어졌을 때’라는 대목이다.

먼저 인성염불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나무아미타불’을 소리내어 외우는 염불법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一聲’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러 글자가 아닌 어느 한 글자
에 집중하는 염불법으로 보여진다.

그 한 글자는 ‘나’가 될 수도 있고, ‘옴’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一聲의 숨을 다 내뱉게 한다’
는 것은 ‘나…’ 하고 소리를 내든지, 또는 ‘오…ㅁ’ 하고 소리를 내면서 몇 분이 됐든지 간에
계속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다.
계속해서 소리를 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숨이 다 내뱉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부처님을 염한다거나 아니면 그 글자가 지니는 뜻에 집중하는
염불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방정토를 염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인성염불이 목표로 하는 최종 도달처가 무념이라는 점에서 인성염불은 稱名念佛이나
觀念念佛, 觀想念佛 또는 기타 다른 염불의 형태하고도 다르다.26)

무념이란 한 생각 일으키는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인데, 어떻게 부처님을 생각한다거나
또는 염을 관한다거나 상을 관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볼 때 무념과 염불은 양립하기가 어렵다.

인성염불은 그 표현에 있어서 인성 다음에 염불字가 붙어 있어서 일단 염불의 범주에 넣고
생각하기 쉽다. 이 때문에 인성염불 하면 관습적으로 염불선의 범주에서 파악하려고 했던 것
같다.27) 인성염불은 기존의 어떤 염불(선)과도 다른 형태로 보아야 맞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인성염불은 염불(선)이 아닐 수도 있다. 염불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는 인성염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염불에 중점을 두어 왔다.
즉 염불은 염불이되 인성하는 염불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해하는 방식은 引聲이라는 글자에 보다 주목하는 것이다.

염불은 별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引聲이란 글자 그대로 소리를 끌어당김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나 ‘미…’ 또는 ‘오…ㅁ’이 됐든지 간에 하나의 소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볼 때 끌어당긴다는 것은 자기가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숨을 다 내뱉게 할 때까지 한다는 표현으로 보아서 한참 동안 발성했던 것 같다.

숨을 내뱉게 하기 위한 발성에 집중할 뿐, 소리가 지닌 의미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성염불은 오직 소리에 집중(관)하는 수행법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인성염불의 정확한 이름을 붙인다면 ‘引聲修行法’이라고 해야 맞다.

인성염불이 소리에 집중하는 인성수행법이라고 할 때, 이 수행의 방식은 ?능엄경?에
나오는 耳根圓通과 일치한다.
인성염불을 이근원통으로 판단하는 첫번째 근거는 소리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성염불이라는 것이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라는 이유이다.

인성염불에는 결코 염불적인 의미나 방법이 들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수식관을 하거나 화두를 잡는 선법도 아니다.
耳根을 통하여 소리에 대한 집중을 중시하는 특이한 수행법이다.
따라서 인성염불과 이근원통은 양쪽 모두 引聲을 통한 수행법이라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두번째 근거는 ?역대법보기?나 티벳의 마하연측에서 돈오를 주장할 때마다 등장했던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이 이근원통章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능엄경? 권6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듣는 놈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되었네.
듣는 놈을 돌이켜 소리에서 벗어나면 해탈한 놈을 무엇이라 이름하랴!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

여섯 개의 근도 이와 같아서 원래는 하나의 정밀하고 밝음에 의지하여
이것이 나뉘어 여섯 개와 화합하나니 한 곳이 회복함을 이루면 여섯 작용이 다 이루어질 수
없어서 티끌과 때가 생각을 따라 없어져서 원만하게 밝고 청정하고 오묘하게 되리라.
남은 티끌은 아직도 배워야 하지만 밝음이 지극하면 곧 여래이니라.

(聞非自然生 因聲有名字 旋聞與聲脫 能脫欲誰名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六根亦如是 元依一精明 分成六和合 一處成休復 六用皆不成 塵垢應念消 成圓明淨妙
餘塵尙諸學 明極卽如來)28)

?능엄경?의 卷數를 나누면 전체가 10卷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6단락 즉 卷6은 ‘이근원통’장이다.
耳根의 작용과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할당된 파트가 바로 권6의 ‘이근원통’장인 것이다.

이 장에서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은 이근의 圓通함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원통이란 표현은 ‘부분이 아닌 전체’ 즉 ‘편벽되지 않고 두루 통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능엄경? 권6의 주장은 耳根을 닦아야만이 두루 통하게(원통) 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一根旣返源의 一根이란 耳根을 지칭하는 것이다.
耳根을 통하면 나머지 根도 다 통하게 된다고 하겠다.

이상을 종합하면 ‘인성염불이 이근원통이다’라는 근거는
첫째, 양쪽 모두 소리〔聲〕에 집중하는 수행법이라는 점,
둘째, ‘一根旣返源’의 돈오 논리가 이근원통을 설명하는 논리라는 점이다.

즉 ?능엄경? 이근원통의 탁월성을 설명하는 논리가 ‘一根旣返源’인 것이다.
‘一根旣返源’의 원래 의도는 돈오의 홍보가 아니라 이근원통의 홍보용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 頓ㆍ漸 논쟁이 발생하자 漸派를 공격하는 頓派의 핵심무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근원통도 자연스럽게 돈오를 성취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채택되었을 것이다.
‘一根旣返源’과 이근원통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근원통의 사상적인 측면이 돈오이고,
수행적인 측면이 이근원통이고 인성염불이었다.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이 ‘一根旣返源’이 가는 곳에 ‘이근원통’도 같이 갔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