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禪의 本質과 意味

장백산-1 2011. 11. 12. 14:19

 의 本質과 意味 / 고우스님

禪의 본질과 의미 - 고우스님 (각화사)

 

 

“참선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이렇게 물으면 “양반이 왜 쌍놈이 되려고 노력합니까?”라고 되묻습

니다. 선은 우리가 논의해서 말로 하거나 들을 때 우리 눈동자에 모래를 뿌리는 일과 같습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머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깨달은 분이 선의 본질을 드러내 대중에게

설법함에,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옥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낸 것과

같습니다. 즉, 법을 일러준 선사도 괜히 백옥같은 맨살을 긁어서 상처를 만든 것과 같고 물어서 깨

닫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게 선입니다. 이 일구(一句)의 세계는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어 진리

라 하고 삶이자 사실이고 본래 모습인데, 여기에는 닦는다느니 증득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군더더

기이며 사족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선은 대부분 화두 들고 참구하는 것으로만 아는데,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인가, 꼭 해야 하는가? 여러분 선은 왜 닦습니까? 과연 선

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 신도님들이 제 말씀을 듣고 있는 것, 바로 그게 선입니다. 선이 따로 있

는 게 아닙니다. 바로 제 말 듣고 보는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간화선이 위기다, 침체한다.’ 이런

소리는 누워서 침뱉는 격입니다. 이는 특정인이 아닌 우리 전부의 책임이자 허물입니다.


내 자신이 禪이기 때문에, 부처요 佛性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부처님께선 깨치고 보니 유정(有情)

과 무정(無情),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存在가 緣起로 存在하고 緣起를 보는 사람은 法을 보

고, 法을 보는 사람은 如來를 본다 했습니다. 存在가 緣起이자 法이며 如來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禪이고 부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되기 위해 참선한다는 생각을 내면 틀린 소리일 뿐더러

시간만 낭비됩니다. 이 존재 자체가 선이요 부처란 사실을 오늘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열반경>

과 <아함경> 등 많은 경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이를 믿지 않으면 허송세월하기 쉽상입니다.

 
불성이 내 몸의 일부에, 잡초 속의 금덩어리처럼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는 잘못입

니다. 듣고 보는 마음과 몸뚱이도 부처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여서 똑같은 작용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과 같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 내가 있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입

니다.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면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우리는 다 부처님입니다. 뒤에 계시는 불단

위의 부처님도, 이 마이크도 컵도, 이 법당도 다 부처님입니다. 물론 이해 없이 믿는 것은 맹신의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왜 부처인지 알면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法은 곧 緣起이자 空이기에

無我인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입

니다. 이를 철저히 깨는 것이 선종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中道緣起를 가장 정확

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선은 다만 체험을 강조할 뿐, ‘本來 成佛’임을 철저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다른 종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지만, 선종은 진리와 사실 그자체인 달만 인정하기에

최상승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간화선선 수행자들이 많이 참석하셨지만, 그 화두를 정신통일이나 의심하기 위해 드는

것이라고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화두는 의심하기 위한 것도, 정신집중 하기 위한 것도 아

닙니다. 간화선은 서기 1000년 전후 대혜 스님이 주창했습니다. 그 이전 250여년전 마조 스님 시

대에만 하더라도 ‘의심하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조 스님 당시엔 어떻게 의심했을까

요?

 
어느 날 늑담법회(?潭法會) 스님이 마조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스님께서는 나지막히 속삭였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찾아오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법회 스님은 다음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은 돌아가고 내가 상당(上堂)할 때를 기다렸다가 나오게.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 스님은 여기서 바로 깨닫고 말했습니다.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가버렸습니다.

 
마조 스님은 법회 스님에게 여럿이 있을 때도, 단 둘이 있을 때도 ‘무엇이 선인가(祖師西來意)’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연 반대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分別心을 떠난 存在의 原理를 표현

한 것입니다. 아마 법회 스님은 밤새도록 큰 의심을 낸 후 다음 날 질문했을 겁니다. 요즘 선사라

면 “모르면 의심해라. 그리고 해답을 가져오너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조 스님은 자연스럽게 의

심을 돈발시킨 것입니다. 결국 의심하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고, 답을 몰

라서 저절로 의심이 드는 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서장>의 저자인 대혜 스님도 무턱대고 의심하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의심하라 했지,

의심하기 위해 화두 들라 한 게 아닙니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 분별을 초월한 것이 화두입니다.

분별하는 한 화두를 타파할 수 없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꽝 부서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회 스

님이 마조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초음파, 즉 ‘뭐’ 하는 순간에 깨달아야 합니다. 주객으로 나뉜 내 의식을 한방에

깨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이게 공부이고 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지식의 그 말을 통해서 바로 깨달으면 됩니다. 그런데 깨치라고 제시하는데 못

깨치니까, 하는 수 없이 의심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도 둔근기들에게는 깨치게 하는 방법

이니까 그냥 놔두는 거죠. 의심하라고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될까봐 <선요(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낭(奴郞)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고 했어요. 콩하고 보리도 못가르는 놈, 신랑하고 종을 못 가리는 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은 쑥맥도 모르고 노낭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

 

그러니 선종은 철저히 상대 개념

을 벗어나서 절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겁니다. 쑥맥도 모르는 공부를 하

면서 내가 최상승 공부를 하고 있고 최고 근기다 하면 그 분상 의식구조에서는 목과 어깨에 기브

스하게 되죠. 그런 스님과 신도가 많이 있잖아요. 폼으로 공부하기 위한 공부, 의심하기 위한 의심

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어떤 고정관념도 무장해제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나니 내안에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내 안에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안거지요. 그래서 선어록에도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게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깨칠 것이 있고 얻을 게 있다는 공부는 그래서 잘못된 선 공부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라는 ‘본래 성불’임을 알고 공부 하는 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공부

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고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어서도 안됩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불교

를 허무적인 종교로 표현했지만, 절대 그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그 자리로 돌아가면 하늘

에 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아서 햇빛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智慧光明입니다. 그래서

이 공(空)을 깨달으면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서 평등하고 편안하게 끄달림도 없이 매일매

일 좋은 날이 됩니다. 좋은 것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고 나쁜 것을 보아도 싫어하지 않는, 양변을

초월한 자유자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 성불’을 전제로 공부하는 것과 있다 없다를 구별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성불을 믿고 이해하면 금생에 확철대오는 못해도 정(正)과 사(邪)는 구별

할 수 있습니다. 재수, 삼수를 하더라도 알고 공부하면 내생에는 그 힘으로 재수하지 않고 합격하

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성불의 수행전통을 잘 이어오고 있는 것이 선종이고, 이런 조사선의 전통은 한국 불교

만이 바르게 잇고 있습니다. 중국은 선종의 유적지만 남아있으며 참선하는 분들이 매우 적습니다.

일본의 선은 화두를 하나하나 타파해 가는 소위 ‘사다리 참선’으로 변형이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

가 ‘손가락 불교’가 아닌 ‘달 불교’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세계적으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선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합

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던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중국의 운문문언(?

~949) 스님은 어떻게 하면 날마다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운문문언 스님이 어느날 대중에게 말하기를 “15일 이전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지만,

15일 이후에 대해서는 한 구절 말해보라” 하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매일매일 좋은 날이다(日日是

好日)”고 했습니다. 범부의 세계에서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가 양변으로 나눠집니다. 나다 너

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않고 초월한 사람, 즉 空을 깨달은 사람은 날마다 좋은 날인 것입니

다. 無我, 緣起, 中道를 체득하고 사는 삶은 매일 좋은 날인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부처인 줄 알면

生老病死마저 眞理로 바라보는 눈이 생깁니다.

 
‘본래부처’ 자리를 알면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이혼율도 낮아지고, 전쟁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 전쟁비용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돕는다면 예산이 남아 돌겁니다. 구치

소와 교도소에서는 범죄인들이 사라지고 남북통일도 하루아침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끝없는 갈등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을 나는 ‘부시형(型)’이라 합니

다. 부시형, 그게 일반 세계의 대응논리고 삶이죠. 그게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데올

로기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이런 것이 모두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에서 나오

는 거죠. 인류가 모두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가 부처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라와 사회

간의 갈등과 대립은 이 중도(中道)가 아니고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해 틱낫한 스님의 서울 방문과 달라이 라마의 저서들은 한국의 수행 붐 조성에 일조하였습니

다. 그걸 보고 느낀 것이 우리나라에도 한국불교의 특색을 가진 국제적인 선 센터를 만들어 한 5년

동안 프로그램을 짜서 국내인부터 교육시키면 외국인도 저절로 배우러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은 화를 삭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애초부터 화라

는 게 없고 오직 연민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동네에서는 환대와 선물을 받고,

다른 동네에서는 모욕을 선물로 받았지만 좋은 선물, 나쁜 선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분별심을 여

의었으니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욕했던 동네 사람과 욕을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하는 아난에게 모두

연민을 느낀 겁니다. 공을 깨달으면 분노와 미움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으로 반응

합니다. 자(慈)는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비(悲)는 상대방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자비심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반대로 증오와 미움은 엄청난 자기 학대입니다. 천

주교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인 적이 있지만, <육조단경>에는 “남의 허물 보지 말고 자기 허물

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

하는 게 가능합니다. 결국 남을 돕는 것은 나를 위하는 일인 겁니다. 본래 부처의 효능이 이와 같

은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닌 달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즐겁고 슬프고, 나다 너다, 천하고 귀하다

하는 양변의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버릴 때 스스로가 짓는 괴로움에서 벗

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똥 푸는 사람에게도 가치와 의미를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직업에는 천하고 귀한 것

이 없습니다. 3D업종에 사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일하고 남을 돕고 사는 살면 귀하고, 국왕이라도

국민을 괴롭히면 천한 사람입니다. 비교 안하는 마음, 실체가 없다는 그 자리, 공이라는 그 자리를

이해하게 되면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권력과 부를 부정적으로만 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달다 장자가 있

었습니다. 장자는 재산이 굉장히 많은 부자였는데 부처님께서 무상(無相) 무아(無我) 무소유(無所

有)를 강조하시니까 고민이 되어 부처님께 “재산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 여쭈니까 부처님께선

“너는 더 가져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수달다는 한역하면 급고독(給孤獨)입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에게 보시를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큰 것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절대 행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속

되는 행복입니다. 생로병사까지 진리로 보고 해탈할 수 있는 행복 말입니다.

 

이런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한 참선은 판결을 잘못해 친구를 사형시킨 충격으로 출가해서 일심으로

공부한 효봉 스님과 같은 큰 발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사연으론 효봉 스님과 같은 발

심의 지속은 불가능합니다. 고봉 스님은 제자의 멱살을 잡고 몽둥이 질을 하며 “송장 끌고 다니는

그놈을 알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고봉 스님의 방만 쳐다봐도 머리가 아팠겠지만, 그 분심으로 공

부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그렇게 발심을 내도록 때려가며 인도하는 스승이 적습니다. 그래서 여

러분은 스스로 발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행복하게 사는 길을 일러줍니다. 존재의 원리를 깨달아 바른 사고와 행위로 살도록

합니다.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멋진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한번 제대로 발심하여 참선공부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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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은 1937년 성주 생으로 20살 때 청암사 수도암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 관응 스님으로

부터 <기신론>을, 고봉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운 후 제방

선원에서 정진. 1968~9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지는 등 봉암사

축서사 금영사 용주사 각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 법랍 4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