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그 후…판사는 대법원장으로, 철거민은 감옥에"
- 시부 화염에 사망, 남편은 감옥
- "갇힌 이들 가족 품으로 돌려주세요"
■ 방송 : FM 98.1 (07:0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용산참사 유가족 정영신 씨
1월 20일. 다음 주 금요일이죠. 용산에서 참사가 일어난 지 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철거민 5명이 숨졌고 경찰 1명이 숨졌습니다. 그리고 7명은 3년째 복역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이번 설에 대규모 특사를 하면서 "거기에다가 좀 넣어 달라. 생계형 범죄로 특사해 달라" 사정을 했지만 끝내 이름은 오르지 않았죠. 얼마 전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낸 것이 화제가 됐습니다. 정영신 씨. 용산참사 당시에 시아버지는 숨졌고 남편은 감옥에 간 철거민입니다. 만나보죠.
◆ 정영신 > 네.
◇ 김현정 >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으십니까?
◆ 정영신 > 저는 아직도 눈 감으면 생각나죠. 멀리 아버님과 남편이 손 흔들어주던 모습, 경찰과 용역이 철거민들을 위협하려고 물대포를 쐈던 모습, 무엇보다 제일 공포스러웠던 것은 특공대가 컨테이너에 올라가는 모습, 끝내는 망루가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 그런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고요. 제일 가슴 아픈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버님과 남편을 떠나보내게 돼서 너무 마음이 아프죠.
◇ 김현정 > 그때 남편이 용산 4구역 상가공사철거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몇 년형을 받았죠?
◆ 정영신 > 참사의 원인이 철거민들에게만 있다고 해서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가 돼서 3년째 복역 중이예요.
◇ 김현정 > 3년째요. 그럼 얼마를 더 감옥에 있어야 되는 겁니까?
◆ 정영신 > 앞으로 2년 더 있어야 돼요.
◇ 김현정 > 면회는 자주 가세요?
◆ 정영신 > 매일은 못 가고 그것도 면회제한이 돼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면회를 다녀오고 있습니다.
◇ 김현정 > 남편은 잘 지내십니까?
◆ 정영신 > 물론 밝게는 지내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마음이 아픈 사람이 그 사람이잖아요. 옆에 있던 아버지와 동지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나 또 자기를 도와주러 왔던 사람들이 지금 3년째 복역하고 있어서 가장 마음 아파하고요. 특히 1월이 되면 아버지 기일인데도 성묘 한번 못 가고, 차가운 감옥에서 아버지 제사를 혼자 지내고, 이런 모습 보면 정말 마음이 아파요. 또 그 분은 아내보다도 밖에 있는 분들을 제일 많이 걱정하시거든요.
◇ 김현정 > 뭐라고 걱정하세요?
◆ 정영신 > 저희 도와줬던 신부님들이 강정마을에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거기에 있는 신부님들이나 희망버스 타고 다녔다가 구속된 송경동 시인이나 추운 날씨에 1인 시위하시는 분들이 감기는 걸리지 않을까, 이런 것들을 많이 걱정해 주시면서 안부를 묻곤 해요.
◇ 김현정 > 사실 이번에 생계형 범죄들에 대해서 설에 대대적인 사면이 있었습니다. 955명. 생계형 범죄에 들어가서 특사가 되지 않겠는가 기대를 했는데 결국은 포함이 안 됐습니다. 생계형 범죄는 아니라는 건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정영신 > 너무 답답한 게 그 분들은 처음부터 범법자나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개발로 인해서 쫓겨날 수가 없어서 자기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분들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생계형 범죄자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리고 또 3년이 지났기 때문에 정말 사정을 해 봤는데 역시나 안 된다고 해서 아직까지 아무런 이야기가 없네요.
◇ 김현정 > 원래 그 상가에서 무슨 장사를 하셨죠?
◆ 정영신 > 시어머니랑 시아버지가 30년 넘게 갈비집을 하시다가 가게가 너무 안 돼서 저희가 작게나마 레아라는 호프집을 도와서 했어요.
◇ 김현정 > 그러면 호프집 하다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은 감옥 가고. 지난 3년은 어떻게 사셨어요?
◆ 정영신 > 햇수로 지났으니까 3년이지, 저희는 진짜 매일이 전쟁터였거든요. 저희의 억울한 것들을 알리기 위해서 진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서울은 물론이고 대전, 부산, 비행기 타고 제주도까지 가서 저희는 '이렇게 억울하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이런 것들을 알렸는데 항상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경찰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막는다고 해서 저희가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오늘까지도 계속 '지금 이렇게 있다. 아직도 억울하다'는 것을 계속 알리고 살고 있죠.
◇ 김현정 > 그럼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세요?
◆ 정영신 > 저는 어떻게 보면 다 잃었잖아요. 집도 잃고 가족도 잃고 다 잃어서 혼자의 몸이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뭐가 어렵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가뜩이나 얼마 전부터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거든요. 거기서 약간의 활동비도 받고 그래서 저는 살고 있지만, 어머니나 다른 세입자분들 같은 경우는 틀리잖아요. 아무래도 생계를 책임지셔야 되고요. 용산참사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소규모로 다 운영을 했던 분들이 지금은 전부 다 남의 집에서 일을 하거나 파출부로 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고 계십니다.
◇ 김현정 > 광화문에서 1인 시위도 지금 하고 계시는데, 이건 어떤 이유입니까?
◆ 정영신 > 저희가 12월 6일부터 19일까지 매일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데요. 이 용산참사가 발생했던 것은 개발문제였거든요. 강제퇴거나 철거현장에서의 폭력, 그 다음에 원주민들이 살 수 있는 재정착의 권리, 이런 것들이 문제였거든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보면 '용산참사재발방지법이라고 불리는 강제퇴거금지법을 제정해 달라'
◇ 김현정 > 강제퇴거금지법. 강제적으로 입주민을 내보내고 재개발을 할 수는 없게 하는, 그러니까 대책을 좀 세워놓고 쫓아라, 이런 법인가보죠?
◆ 정영신 > 네, 그렇죠. '무엇보다 다시 좀 살 수 있게끔 해 달라는 것' 그걸 요구하는 하나하고요. 어떻게 보면 아직도 그들은 참사 생존자잖아요. 가까스로 살아온 생존자들을 지금 3년 동안 감옥에 갖다놓은 거잖아요. 그래서 '구속자들을 석방해 달라. 내 남편을 좀 돌려 달라'는 요구를 가지고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 김현정 > 사실 용산참사 그 당시에 굉장한 논란이 됐었죠. 무리한 진압, 보상대책도 없고 여러 가지가 사회적 이슈가 됐는데요. 지금도 전국에서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고 있습니까?
◆ 정영신 > 아직도 무분별한 개발 사업은 지금 전국 곳곳에서 발생되고 있어요. 또한 아직도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고 주민들의 주거권, 생존권을 위해서 하루하루 싸우시는 분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너무 아쉬운데요. 더군다나 모든 책임, 참사 책임자였던 사람들은 지금 화려한 부활을 했잖아요. 법원에서 모든 참사의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있다는 중형을 판결한 양승태 판사 같은 경우는 대법원장이 됐고, 또 무엇보다 참사 책임자였던 김석기(전 서울경찰청장)는 오사카 영사가 되더니 갑자기 8개월 만에 사퇴하고 총선 출마를 또 한다고 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면 너무도 화가 나죠.
◇ 김현정 > '무리한 진압이었다, 아니다, 무리한 시위였다' 사회적 논란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만, 분명한 건 그들은 수억 원을 떼어먹은 정치인도 아니었고 대기업 총수도 아니었고 서민이었다는 것. 한 서민의 입장에서 만나봤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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