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집 부
인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인생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는 인생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특별히 배우려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들은 인생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말 그대로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을 통해 겪게 되는 하나의 과정을 인생이라고 한다.
인생이라 하면 사람인(人), 날생(生)으로서 사람이 나서 갖게 되는 생애를 말한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니까 "다 아는 말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줄 모르겠으나 막상 대학의 교수나 저명한 지식인들, 그렇지 않으면 내로라 하는 종교인들을 만나서 인생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면, 그들 역시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나서 경험하게 되는 한 생애를 우리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딱 부러지게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서 한 생애를 겪게 되는 이 과정을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삶이다.
사람이 인생을 모른다는 것은 삶을 모른다라고 잘라서 말할 수 있다. 삶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삶이 어떤 일을 하는가? 삶 속에 있는 일들이 어떠한 일을 있게 하는가? 인생은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삶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삶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삶은 온갖 일을 자기 속에서 일어나게 한다.
삶 속에 있는 일은 바로 끝없는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끝없는 자신을 만드는 길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인간으로 날 수도 있고, 우리가 바라지 않는 불행한 자신을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생존에서 인생을 아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런데 이 인생을 알기가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쉬운 입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수없이 이런 말을 해왔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자기 속에는 자기를 움직이려고 하는 하나의 성질이 있고, 그 성질에 따라서 어떤 사물을 보게 되고 그 사물에 대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척도가 각각 다른 것이다"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운명의 근원인 것이다. 사람들은 개개인이 각기 다른 운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보았을 때 그것을 똑같이 받아들이거나 또는 똑같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운명의 근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은 몸은 음식을 통해서, 음식의 기운을 섭취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성장하지만, 의식은 자기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자기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각각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이 자기 속에 들어가서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영적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들어가면 잘못된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지고, 좋은 것이 들어가면 좋은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진다.
이 해답은 우리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설명할 때 하나의 법, 법칙, 진리, 약속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소중한 일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거짓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음은 바로 거짓이 진리를 가려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에 대해서 모르고 사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말은 성경에도 나와 있다.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결국 자신 속에 있던 일들이 자신을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예수의 설명이었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속에 있는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이 일은 인연을 통해서 오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스스로 자기가 지은 업보(業報)와 공덕(功德)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간단한 보기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떤 사람이 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알아가지고 좋은 열매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하자. 이것은 있는 일을 바로 앎으로써 가능케 된 일이다.
다시 하나의 보기로 설명을 해보자. 텔레비전에서 농사 정보를 방영하는데 산지(山地)를 이용해서 산삼을 키우고 더덕을 키우고 백약이란 약초를 키워서 상당한 소득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바로 있는 일을 통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까 그 산에는 원래 백약이나 산삼이나 더덕이 나지 않았지만, 농사꾼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을 이용해서 그 산에다 그러한 작물을 재배하게 된 것이다. 그 산에서 산삼이 나게 된 것은 어떤 사람과의 인연에 의해서 산삼이 나게 되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어떻게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원리를 알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생애에 가장 소중한 일이 된다고 본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하나의 흐르는 물처럼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이다가 결국 멈추게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도 가꾸어 주지 않는 나무에서 더 좋은 열매가 열릴 수 있다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아무도 가꾸지 않는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린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무도 가꾸지 아니한 버려진 곳에 있는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매우 어렵다고 하겠다. 그래서 인생을 모른다는 것은 자기를 어떻게 살게 해야 할 것인가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버리고 산다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자기가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또 인생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불완전한 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모르므로 함부로 날뛰고 함부로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기가 한 일이 자기에게 존재하게 되고 그 일로 인해서 끝없는 세월을 두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쉽게 함부로 아무 일이나 해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누구든지 이런 일을 모른다면 아무 일이나 함부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일을 모르면 사람을 잘못되게 하고 세상을 잘못되게 하는 원인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은 이렇게 해서 끝나지 않는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항상 자기 속에 있어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서는 "항상 자기 속에 있는 일은 항상 자신 속에서 자신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는 것이 정답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알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 삶이 스스로에 의해서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깨달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있는 일을 바로 알아야 다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세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 속에 있던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어떤 영향을 자기에게 미치게 되는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살게 되면 사람들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실수 투성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이런 일을 제대로 모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하나의 애착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원인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을 아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다. 인생을 바로 알면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가 있다.
옛날, 중국의 한 유명한 학자는,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세상의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변화하는지에 대한 인과의 법을 말한다. "있는 일을 바로 알게 되면 있게 되는 일도 바로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매우 큰 깨달음을 주는 말이다.
있는 일을 바로 알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며,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원리를 깨닫게 된다면, 즉 그런 일에 눈만 뜰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서 이는 삶의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매우 현명한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가 세상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세상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아는 것은 나를 얻는 길이다. 인생을 아는 것은 내 자신을 평화와 행복과 영생과 부활과 그리고 극락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인생에 대한 가르침은 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셈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을 소홀히 생각하고 인생을 아무렇게나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모든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미래를 포기하고 어떻게 복받기를 원하며, 어떻게 잘살기를 원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자가 무지한 생각에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재물을 모았다고 한다면 그 재물은 오히려 그 사람을 더욱 괴롭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재물이 원인이 되어서 온갖 시비와 불행이 끝없이 일어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있는 일을 보지 못하고 짧은 안목에서 잠시의 배고픔이 두려워서 옳지 않은 생각을 가졌을 때, 그 사람은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도는 과연 무엇일까?
인생의 도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모든 원인을 말한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을 아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길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을 할 수가 있다. 인생을 모른다면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인간의 세계가 이 소중한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일은 이 시대가 깨달아야 하는 가장 불행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 온갖 위선과 거짓, 시비와 잡음이 끊일 날이 없는 것은 목적이 없는 삶,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삶으로 인하여 생기게 되는 현상들이다.
우리가 왜 삶이 어렵더라도 참고 견디고 이기고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나의 앞길이 인생의 과정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앞길이 인생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인생은 누구에게나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삶이 힘들더라도 살아야 하는가? 중도에 죽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는 데까지 살면서 어떻게 하더라도 좋은 인연을 짓고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삶 속에 인생이 걸려 있고, 이 인생 속에 나의 미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순간 살기가 어렵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는다면, 그 사람은 그로 인해서 좋은 인연들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사람은 또 다음에 인간으로 태어나면 더 허약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버리는 일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무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라고 밖에 설명을 할 수 없다.
삶의 도는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되며, 인생은 이 삶으로부터 그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아무렇게나 생각한다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같다.
삶 속에 있는 일을 하나라도 바로 이해하는 일은 자기의 인생에 매우 좋은 영향을 주는 원인이 될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돈을 기부하고 열심히 기도를 한다 해도 그 일이 그 사람의 앞길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알아야 할 일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자기를 위하는 일은 자기 속에 있게 될 일들을 좋은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있게 하는 일이고, 또 그런 일을 바로 알아서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섬기는 일이며 자기를 복되게 하는 일이 된다.
이 글을 통해서 인생이 어떠하다고 하는 설명이 사람마다 마음에 쉽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부정하건 부정하지 않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진리란 있는 일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는 현상 그 자체를 말한다.
각자가 부정하건 부정하지 않건, 하나의 뜻이 분명히 어떤 일이 되도록 되어 있으면 그 일은 되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으로 인생을 알고 싶다고 알 수 있게 되는 일도 아니고 인생이 좋아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인생을 좋게 만들 수 있는 가르침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 속에서 시간만 낭비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모델을 만들어 놓고 살펴보아야 하겠다. 하나의 작물은 땅과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활발히 활동을 하고, 그 결과로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인간의 의식도 똑같다.
주변에서 얻은 자기가 가진 지식과 깨달음 및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인간의 의식은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고 좋은 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자기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으니까 자연적으로 좋아질 수가 있다.
우리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작물이 있는 곳에 석유기름을 부어 버렸다면, 그 땅은 타버리게 되고, 그 작물은 그로 인해서 메마르게 된다.
우리가 어떤 과정에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과 인연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로 인해서 이 작물과 같이 우리의 의식도 시들고 망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인생은 바로 삶이요, 인생의 도(道)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살게 하느냐 하는 숙제이다. 이 숙제는 남이 가르쳐 주지 않는, 스스로 풀어야 하는 숙제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이런 숙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이 숙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풀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대상에 의해서 자기가 좋아진다거나, 자기에게 좋은 열매를 얻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사람들이 귀신을 섬겨서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이익을 얻었다면 그들은 그 일로 인해서 더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매일 기도나 하고, 있는 일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그 결과 하나의 무지를 얻게 되는 것이고 그 무지가 자기를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라는 어떤 대상에 의해서 자기들의 일이 잘되고 잘못된다 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사실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신이 인간을 부활하게 하고, 인간을 천국에 가게 하고, 인간을 깨닫게 한 일은 극히 드물었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를 아직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은 바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결실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항상 있는 일을 관찰하고 있는 일에 비추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실을 가져오는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인생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길을 알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항상 열심히 일하고, 자기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일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잘살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런 일에 대해서 상세하게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런 일을 밝히는 것이 옳은 일인지, 밝히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하나의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인연은 본인이 모르는 속에서도 지어질 수 있는 것이고, 본인이 아는 상태에서도 지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인생을 버리고 사는 일이 정도(正道)처럼 되어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인생을 아는 것이 축복이 되기도 하지만,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많은 고뇌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저 사람은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라는 식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애착이 자녀를 잘못되게 하고, 형제를 잘못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식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이 있고 좋은 뜻이 있으면 먼저 자신이 알아야 하고, 자신이 알게 되면 그것을 자식에게 가르치면 된다.
"아버지는 이런 일을 알게 되었으니, 너도 이런 일을 확인을 해보고 배우게 되면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좋은 결실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치면 된다.
가르치지는 않고 바라기만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바라는 일이 있을 경우 자신이 알고 가르치면 자기가 바라는 일을 자식이 스스로 할 것인데, 가르치지도 않고 바라기만 하니까 이는 안될 일을 요구하는 것과 똑같다.
"모르는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그런 일을 바란다면 당신이 먼저 배우고 가르쳐라. 그래서 사람들이 있는 일을 알면 있는 일을 쉽게 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모르니까 못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항상 사람들에게 "애착이 우리의 삶에 걸림돌이 될 때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두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모와 자식간에 의를 갈라 놓으려고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부모와 자녀와 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하되 절대 애착은 갖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면 애착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인가?' '애착이란 무조건 자기의 마음을 어떤 것에 얽매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애착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봐도 거짓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축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잘되게 하는 것은 축복이고 잘못되게 하는 것은 애착이다. 사람들은 애착과 축복을 구분하지 못하고, 애착이 축복인 줄 알고, 사랑이 애착인 줄 안다. 이렇게 거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장 큰 사랑은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왜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가? 자기가 가르칠 수 없는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워 오게 하기 위해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학교에 보내는 것은 사랑이다. 가르치는 것은 사랑이다.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그 자식이 배움을 통해서 축복을 얻게 하려 하는 의도에서다.
우리가 인생을 배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과 애착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이를 이해하는 길이다.
우리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공부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공부 자체가 사랑이다. 그래서 인생은 깨달아야 하고 그 깨달음을 위해서 인생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을 아무렇게나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희망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희망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희망은 우리가 가꾸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지 않고 우리가 가꾸지 않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깨달음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 배움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인생이요, 인생을 모른다면 누구도 사랑을 배울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학력이 없더라도 이 인생을 배우면 그 사람은 훌륭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아무리 많은 학력을 소지한다 해도 인생을 모르는데 어떻게 잘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중요한 일은 사람들은 항상 자기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고, 끝없는 내세를 위하여 빛나는 밝은 삶을 자기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신념을 갖는 일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라도 인생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속에 있게 되며, 모든 원인이 결과를 만들게 된다'고 한다면, 누구도 자기의 행동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해답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이 애착이며, 무엇이 사랑인가를 구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내 자식이 일등을 해야 한다면 일등을 하도록 가르쳐라. 그것이 사랑이 아니겠는가? 가르치지도 않고 일등을 하라고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의 무지라 하겠다.
그래서 인생을 이해하는데는 사랑과 애착에 대해서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을 하고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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