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란 천상·-인간-·수라·-축생-·아귀-·지옥의 世界를 탄생과 죽음을 返復하면서
끊임없이 旅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윤회의 세계에 있어서 천상계, 수라계,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는 人間界에서 지은 業報를 받기만 하는 세계이다.
즉 輪廻를 하게 하는 그 根本의 에너지는 人間界에서 지은 業인 것이다.
業이란 行爲를 말한다. 그렇기에 착한 행위는 선업이 되고, 나쁜행위는 악업이
된다. 윤회의 세계에 있어 天上은 인간계에서 한 착한 행위 즉 선업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어떠한 즐거운 일이 생긴다해도 그것을 다 받을 수
없을 때 죽어서 가는 세계이다. 수라의 세계는 火를 낸 업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기에 죽어서 가는 세계이며,
畜生의 세계는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어서 죽어서 가는 세계이며, 餓鬼의 세계는 慾心을 부린 業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어 죽어서 가는 세계이다.
地獄은 나쁜 行爲 즉 惡業을 지은 것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어서 죽어서 가는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人間界를 除外한 六途輪廻의 世界는 業藏을 消滅하기 위한 世界일
뿐인 것이다. 그러기에 人間界에 있어서의 죽음은 자신이 지은 업이
인간계에서는 다 받을 수 없어서 맞이하는 것이거나 또는 거지가 왕이 되어
받을 수 있는 선업을 지었기에 거지로서는 그 선업을 다 받을 수 없는 경우에
왕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는 것처럼 지금 자신이 지은 업이 인간계에서 받을
수 있는 업이기는 하나 현 상황에서는 다 받을 수 없는 경우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인간계에서 받는 업의 수치는 100을 넘을 수 없다는 假定下에 例를 들어보자.
갑이라는 사람이 인간계에 올 때 업의 수치가 선업이 90이었고, 화를 낸 업이
80이었고,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70이었고, 욕심낸 업이 60이었고, 악업이
0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갑은 악업이 0이기에 지옥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갑은 선업이 90이니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집에서는
태어나나 화를 낸 업이 80이니 항상 무엇인가에 의하여 쫓기는 불안한
집안이거나 전쟁 중인 국가에 태어날 것이다.
또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70이니 아집이 강한 이기주의자가 많은 집이나
국가에 태어날 것이며. 욕심을 낸 업이 60이니 가지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지지 못하는 집안에 태어나서 삶을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갑이 선업을
10을 더 지으면 선업이 100이 되어서 천상에 가기 위하여 죽음을 맞이하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악업을 70정도 지었다고 하여 보자.
그러면 인간계에서 이 사람이 가지고 온 업에 의하여 형성된 환경에서는
도저히 거기에 해당하는 고통을 받을 수 없기에 죽음을 맞이하여 다시 그 업에
맞는 환경을 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또 을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인간계에 올 때 업의 수치가 선업이 0이고, 화를 낸 업이 10이며,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20이며. 욕심을 낸 업이 30이며. 악업을 지은 것이 40이라고
하여 보자.
그러면 을은 선업이 0이니 천상에서 살다 왔을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낸 업이
10이니 조금은 불안이 있으나 상당히 평화로운 가정이나 국가에 탄생할 것이다.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20이니 다소 이기주의는 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남을
이해해 주고 남을 돕고 사는 국가나 가정에 태어날 것이며,
욕심을 낸 것이 30이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는 못한다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만족할 것이며, 또 악업이 40이니 적당히 가난한 집에 태어나
삶을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을이 만약 선업을 70정도 짓는다면 인간계에서는
받을 수 있으나 자신이 타고 태어난 환경 속에서는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또, 다른 업을 100의 수치가 되게 짓는다면 그 업에
맞게 태어나기 위하여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또 병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은 선업을 100을 지어서 죽어 천상에 갔으나
악업을 90정도 지냈다고 하여 보자. 그러면 이 사람은 천상에 가서 태어나 그
복을 받고 다시 인간으로 올 때는 아주 가난한 집에 태어날 것이다.
또 정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악업을 100을 지었으나 선업을 90을 지었다면
이 사람은 지옥에 태어나 악업을 다 소멸시키고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아주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처럼 병이 을보다 더 선업을 많이 지었건만
이 다음 생에 태어날 때 태어나는 환경은 더 열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병이
천상에서 왔기에 그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줄 수 있고 또 정은 지옥에서 왔기에
그 부잣집을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축적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심성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법칙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輪廻를 하게 하는 그 原動力은 業이다. 이 業에 의하여
중생들은 끊임없이 輪廻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등에 짊어진
業藏이 자신이 사막을 건너기 위한 糧食임도 모른 채 그냥 짊어지고 가는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이 輪廻를 끝낸다는 것, 그것은 곧 業藏이 모두
消滅되었음을 意味하는 것이고 이 輪廻 속에 살면서도 業藏消滅의 길을
알았다는 것,
그것은 다시 輪廻에 떨어지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자리에 있는 것임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면 業藏을 消滅시키는 길을 알고 輪廻 속에서 不退轉의
자리를 확보한다는 것, 卽 등에 짊어진 糧食을 먹으면서 사막을 건넌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意味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業에 對한 理解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業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業과 因緣란 무엇을 말하는가?
業이라 하였을 때에 우리들은 罪를 지은 것을 흔히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業을
잘못 理解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업(業)이란 行爲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도 農事짓는 行爲는 農業이라
하고. 장사하는 行委는 商業이라 하고, 生計를 꾸리기 위해 하는 行爲는
職業이라 부르지 않는가? 즉 우리들이 日常生活을 通하여 보고 느끼고 말하고
行動하고 하는 行爲를 다 業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은 生覺을 通하여 좋거나
싫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感情을 느끼게 하고 이러한 感情은
아집(我執 = 自己 自身에 對해 執着하는 마음)으로 因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이려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하려 하며,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行爲들은 마치 카메라가 렌즈를 通하여 事物을 받아들여서
필름에 記錄하듯이 우리들의 無意識 속에 全部 記錄이 된다.
불교에서는 카메라의 렌즈에 해당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안(眼=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혀), 신(身=몸)의 마음을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라 하며 그것을 가지고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感情을 느끼게 하는
의(意=生覺)의 마음을 의식(意識)이라 한다.
그리고 意識이 分別한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것에 對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러한 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서 생기는 것이기에 我執이라 하는데, 이것을
전문불교용어로 마나야識(말라識)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全部 받아들여서
記錄하고 貯藏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役轄을 하는 無意識을
알라야識(아뢰야識)이라 한다.
業이란 우리들이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느끼고 또 그것을
가지고 싫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執着하고 거부하는 行爲인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마나야識의 作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行爲가
필름에 찍히어 남게 되듯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알라야識에 全部 貯藏되게
된다. 그것을 업장(業藏 = 業의 倉庫)이라 하는 것이다.
卽 業이란 行爲를 말하며 그것이 貯藏되어져 있는 狀態를
業藏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착한 行爲를 선업(善業)이라 하고
나쁜 行爲는 악업(惡業)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善業과 惡業을 짓는 것은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써
짓는다고 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다 업을 짓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착한 행위 즉 선업은 즐거움의 果報 즉, 낙과(樂果)를 가져다 주고,
악한 행위 즉 악업은 괴로움의 果報 즉, 고과(苦果)를 가져다준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그런데 선업이 즐거움의 結果를 악업이 괴로움의 結果를 가져다주는 것이,
선업을 짓거나 악업을 지은 卽時 그러한 結果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착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卽時 즐거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악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卽時 고통의 결과가 오는 것도 아니다.
마치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싹이 트여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토양이니 햇빛이니
수분이니 하는 條件들이 맞아야 싹이 트는 것처럼, 우리가 한 착한 行爲나
나쁜 行爲도 그것이 즐거움과 고통으로 찾아올 수 있는 條件을 만나야
즐거움이나 고통의 結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로 나타나고 악업이 고통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그 條件은 무엇인가? 선업에 있어서는 선업과 만나는 것이 그 條件이며,
악업에 있어서는 악업과 만나는 것이 그 條件이다. 이와 같이 같은
동업(同業)끼리 만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악업은 반드시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반드시 선업끼리 만나는 것은 變할래야
變할 수 없는 철칙이다. 이러한 法則을 불교에서는 동업중생(同業衆生)의 法則
또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法則이라고 한다. 즉 즐거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선업이었기에 토(土), 즉 만나는 環境도 선업으로 만날 수 있었고,
또 고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악업이었기에 토(土)인 環境도
악업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因緣의 基本法則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은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선업끼리 만나는 것을 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끼리 만나면 즐거움의
結果가 따르고 악업끼리 만나면 고통의 果報가 따른다.
그런데 선업이나 악업관계는 만나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서
얻은 結果가 즐거움이면 선업의 관계이고, 괴로움이면 악업의 關係이다.
卽 相對方을 도우려고 한 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선업關係이겠지만 相對方을 도우려고 한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악업관계이다. 또 상대방을 해하려고
한 일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악업관계이지만 거꾸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한다면 그것은
선업관계인 것이다.
어느 곳에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굉장한 구두쇠라
뼈를 여러번 재탕하여 설렁탕을 만들었기에 이 집에서 만든 설렁탕은
맹물과 같았다. 그러니 그 집에 손님이 모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장사가
안되자 주인은 주방장이 음식솜씨가 없다며 주방장만 탓하고 월급도 제때에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주방장은 일부러 그 집을 망하게 하려고 국물을
진하게 끓이고 또 밥과 김치 등도 손님들에게 많이 퍼 주었다. 그런데 그 집이
망하기는커녕 맛있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주인은 거꾸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주방장은 앙심을 품고 일부러 주인에게 해를 주려고 하였지만 주방장이 한
행위는 거꾸로 주인을 도와주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주방장과
주인과의 관계가 선업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번잡한 러시아워 시간에 지하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그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갔는데 할아버지는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경찰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지었고
그 누명을 이 사람이 쓰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살인 누명을 쓰고 1년간을 복역한
후에 무죄로 판명이 나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은 이미 파탄이 났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서 승소하였지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가정을
파탄시킨 댓가치고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시는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돕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한 이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나쁜 결과가 찾아와야 하는 것이었을까?그것은 그 할아버지와 이 사람의
관계가 악업관계였기에 그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인지 선업인지는 그것의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 행위자체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악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세에 따라 선업으로 받을 수도 있고 선업이라 하더라도 악업으로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친구와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구가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였더니 경찰에서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다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재판장에 들어서면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세상이 다 싫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형무소에서 행하는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스님에게서 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재판날 그는 "이곳에서
어느 스님을 뵙게되어 法文을 듣고 제 處地를 理解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친구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죽인 것은 제가
아닐지라도 저의 업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친구로 두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하여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재판장이 숙연해졌다. 그 후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그의 삶은 이전보다 더 충실한 삶으로
바뀔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친구와의 만남은 형무소에 복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악업의 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계기로 부처님을 만나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친구의 關係는 結果的으로는
선업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업관계와 악업관계는 그 結果를 가지고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結果가 생기기 前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業이 알라야識에
貯藏되어져 있을 때의 狀態는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닌 무기(無記=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행위)로써 貯藏되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緣이란 惡業의 因緣이 아니면 善業의 因緣이다.
선업의 인연이었다면 은인일 것이고 악업의 인연이었다면 원수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만남에 있어서도 선업이 아니면 악업이라는 관계가 분명하게
結定되어져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업과 악업관계가 적당히 섞여져서 만나는
것이다. 즉 어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하였을 때 그 관계가 반드시
선업이나 악업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로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업과 악업이 적당히 섞여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緣이라고
한다. 그 緣이 깊으면 짚을수록 가장 가까운 因緣인 부모나 형제 또는 부부가
되어 만날 것이다. 그러기에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因緣"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옷깃만 스치는 關係라 하더라도 그 사람과는 善業과 惡業이 섞여져
있는 關係이기에 만났다는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서진스님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회하는 우리는 지구의 순례자 (0) | 2012.07.29 |
---|---|
사랑 (0) | 2012.07.29 |
생각--말---행동 (0) | 2012.07.27 |
공감대 (共感帶) (0) | 2012.07.26 |
무의식의 세계---내면의 깊은 영혼 속 (0) | 2012.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