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무현금(無絃琴)

장백산-1 2012. 9. 29. 15:43

 

 

 

 

 

무현금無絃琴 / 송광섭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작품으로 전해지는「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가 있다. 아슬한 바위 벼랑에 걸터앉은 선비가 그윽한 달빛 아래 먼 山을 바라보며

無常한 듯 超越한 듯 거문고를 타고 있는 그림이다.

그의 훤히 벗겨진 이마와 뒤통수에 걸린 숱이 없는 머리로 짠 쥐꼬리 만 한 상투로

보아 연륜의 무게가 묻어난다.

화면에 풍기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虛事가 된 젊은 날의 꿈,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 아니면 바라고 살고자 했던 世上에 대한 虛妄한 悔恨을 거문고에 얹어

타고 있음직하다.

 

누가 그림을 ‘소리 없는 시(無聲之詩)’요  詩를 ‘소리 있는 그림(有聲之畵)’이라 했다던가.

그러나 마음을 열고 이 그림에 빠져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월하탄금도」에는

分明히 소리가 있다.

숲 속에 달빛 번지는 소리, 거문고 소리, 거문고 타는 선비의 소매 깃 스치는 소리,

그리고 뒤에 쭈그리고 앉은 사동이 찻물 끓이는 소리...

幻聽이 아니라 마음의 귀가 열려 들리는 청아한 소리들이다.

그런데, 自細히 보면 그가 타는 거문고에는 줄이 없다. 무현금無絃琴인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이 가지고 놀았다고도 하고, 이규보李奎報도 어루만지며 즐겼다는 줄이

없이도 스스로 소리 냈다는 악기...

그래서 이 그림 속 거문고는 樂器가 아니라 살아있는 生命體인지도 모른다.

 

 

若言琴上有琴聲 (약언금상유금성)

放在匣中何不鳴 (방재갑중하불명)

若言聲在指頭上 (약언성재지두상)

何不于君指上聽 (하불우군지상청)

 

만약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

갑 속에 두었을 젠 어이해 안 우는가.

그 소리가 손가락에 있다고 한다면

그대의 손끝에선 어째서 안 들리나.

 

그의「금시琴詩」에서 소동파蘇東坡도 거문고 소리가 정말로 어디서 나는 것인지를

찾고 있다. 結局 거문고 自體도  탄자彈者의 손끝도 아닌 거문고와 손가락의 어울림으로

듣는 이의 마음에서 소리가 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人이 解讀有字書로데 不解讀無字書하며 知彈有絃琴이로데

不知彈無絃琴하나니 以跡用하고 不以神用이면 何以得琴書之趣리요.

 

세상 사람들은 고작 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無子書를 읽을 줄 모르며,

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無絃琴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무자서無字書와 무현금無絃琴의 ‘껍데기만 쫓아다니’다가 빈 行間의 ‘참맛’을 놓치는

虛行을 꼬집는『채근담菜根譚』(「자연의 섭리」편 제8장)의 지적이다.

이 책에 나오는 無絃琴과 무강적無腔笛에 대한 다음 구절들도 같은 맥락으로

마음에 새겨 음미할 일이다.

 

笛以無腔爲適 (적이무강위적)

琴以無絃爲高 (금이무현위고)

젓대는 구멍 없음이 좋다 하고

거문고는 줄 없음을 높다 한다. (제53장)

 

素琴無絃而常調 (소금무현이상조)

短笛無腔而自適 (단적무강이자적)

꾸밈없는 거문고는 줄이 없어도 항상 고르고

짧은 젓대는 구멍이 없어도 항상 즐기노라. (제68장)

 

송대宋代의 이학자理學者 소옹邵雍은「관물론觀物論」에 이르기를,

 

<무릇 觀物이라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지 않고 理致로써 보는 것이다.

天下 事物은 理致를 담지 않은 것이 없고, 성性이나 명命이 없는 것이 없다.>

 

라고 하였거니와 觀物이 美學의 境界로 넘어와 관화觀畵에 물아物我의 區分이

사라져 만화명합萬化冥合의 境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림 속 無絃琴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하지 않을까 한다.

 

 

* 남한강 상류 탄금대彈琴臺 못 미쳐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강나루의 옛 이름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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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禪님의 블러그에서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