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성의 시대에는 인간관계의 목적과 과정이 완전히 다시 창조될 것이다.
인간관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관계의 목적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고,
관계의 목적은 기쁨과 행복과 완성과 충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관계가 더 이상 필요의 충족 수단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필요는 환상이고, 너희가 무엇을 찾고 있다면,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필요하다고 상상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관계의 목적을 무엇인가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희는 끊임없이 그 무엇을 찾게 될 것이고,
그 무엇이 네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네 속에 있다면 찾지 않을 것이기에.
그래서 너희는 너희 바깥에서 찾으려 하고,
특히 너희가 사랑하는 이에게서 찾으려 한다.
반대로 관계의 목적이 무엇인가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희가 체험하고자 하는 것을 관계 속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너희는 창조하고자 선택한 것의 근원으로 너희 자신을 볼 것이고,
그 이유는 어떤 것의 창조자가 바로 근원이기 때문이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모든 관계가 신성하게 보일 것이다.
너희는 상호 의존적이면서 독립적이다.
어느 특정인에게 의존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자기자신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남을 앎으로써이다.
상대계에서는 남이 없으면 자기자신도 없다.
절대계에서는 남이란 없기에 남과의 관계에서 있는 것이란 게 없다.
신이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신은 자신을 수십억개 이상의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었고,
그 부분들은 신이라는 전체와 다른 것이라고 보였다.
이 부분들은 사실 전체를 알 수 있고, 전체는 이 부분들을 알 수 있어서 ,
신은 자기자신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창조된 상대계이고 상대적 체험이다.
신의 각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자신을 체험할 수 있고,
신의 개체성과 전체성, 전체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의 장엄함과 경이와 영광을 알 수 있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부여한 의미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 상황을 두고 너희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걸로 내 평화를 잃을 필요는 없어.
이게 나를 해치지는 못 해."라고 할 수도 있고,
"나는 너무 상처 받았어. 난 죽을 지경이야. 미치겠어. 못 참아."할 수도 있는데
각각이 너희 체험이 된다.
상처받는 느낌이란 단순한 망각행위일 뿐이다.
너희 자신을 잊고, 상대방을 잊고, 너희 모두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잊어서 그렇다.
미궁에 빠져 환상을 본 것이다.
자신의 각본에 도취된 작가가 자신의 각본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관계의 목적과 삶의 과정과 자신의 역할을 이해할 것이다.
그 과정을 축복하며 성스럽다 할 것이고,
그 과정에 참여하며 모험이라 할 것이고,
그 과정을 체험하며 기쁘다고 할 것이고,
그 과정을 끝내며 열반이라 할 것이고,
그 과정을 다시 시작하며 행복해 할 것이다.
그 과정은 끝이 없는 지복의 순환이며 창조 자체이다.
이것은 의식이 펼쳐지는 이야기이고,
인간이 진화하는 이야기이며,
네 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관계는 이 이야기의 일부이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인간의 영혼과 함께 또 그 속에서 모든 관계가 시작하고 끝나며 창조될 것이다.
일단 네 속에서 나와 관계를 가지면 네 바깥에서 네가 가지는 모든 관계들에서
기쁨과 행복과 완성을 체험할 것이다. 왜냐 하면 네가 가져다 놓은 것이기에.
네 속에 가지지 않은 것을 네 바깥에서 체험할 수는 없다.
관계의 목적은 완성을 찾기 보다 너의 완성을 나누는 것이고,
기쁨을 찾기 보다 너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며,
행복을 찾기 보다 너의 행복을 나누는 것이다.
관계는 너희 자신을 넣어 둔 맥락의 장이고, 일종의 창고와 같다.
너희가 표현하고 체험하고자 하는 너희의 어떤 측면도 꺼내 쓸 수 있지만
너희가 넣어 두지 않은 것을 꺼내 쓸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채워 줄 것을 기다리다간 실망하게 될 것이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사랑과 자유가 같은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자유는 신이 준 어떤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진수이다.
사랑과 신이 같고, 신과 자유가 같기에 사랑과 자유가 같은 것이다.
자유는 임신과 같은 면이 있는데, 조금 임신할 수 없듯이 조금 자유일 수 없다.
자유이거나 아니거나 일 뿐이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인류는 관계에 있어서 항상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유는 본질이기에 어느 누구도 박탈할 수 없고,
자유를 박탈했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단순한 망각행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편과는 같이 살지 않겠다는 아내가 있을 때,
남편은 집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살거나, 집을 떠나는 선택권을 가진다.
관계에 있어서 부부는 그들의 선호를 드러낼 자유가 있고, 모든 선택은 결과를 낳는다.
상대방의 자유선택권에 의하여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이고,
망각행위이다.
불행하다는 불평은 관계의 당사자들이 자기자신들을 망각하고, 희생자의 역할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선택한 것을 말하고, 행하고 또 된다.
한 사람의 선택이 상대방의 행복을 방해하면, 상대방은 그렇다는 말을 할 수 있고,
그래도 그런 행위가 반복되면, 상대방은 그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하는 과정이 연속되어,
자유선택 뒤의 자유선택, 또 자유선택이 사랑과 삶의 이름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희생자나 악한이 있을 수 없다.
새영성의 시대에는 관계가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상호 창조 체험이 될 것이다.
관계는 스스로 되고자 선택하는 자기자신을 선언하고, 나타내고, 충족하고 되고, 체험하는 더 없는 기회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망각행위이다.
진화는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이며, 관계는 진화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너희는 살면서 예닐곱 번 정도 심각한 선택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을 반겨라. 움츠리지 마라.
너희 진화과정에서 도약을 위한 엄청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축복이다.
---내일의 신 제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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