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행애상응 (行解相應)

장백산-1 2013. 1. 20. 18:10

 

 

 

행해상응(行解相應) 

 

청화큰스님

 

 

  우리는 佛法에 모두 歸依했지마는, 아시는 바와 같이 같은 불법(佛法)에도

  우리나라에는 지금 18宗派나 있습니다. 또한 그런 宗派내에서도 역시 똑같은 것이 아니라  

  自己의 個性에 따라서, 自己가 어떻게 眞理를 硏究했는가에 따라서 各己 다릅니다.

  佛敎가 傳來된 以後 오랜 歲月을 거쳐오는 동안 지나온 過程을 悔考해 보면 참 複雜했습니다.

   

어떻게, 뭘 스승으로 할 것인가?

행법(行法)에 있어서 큰스님들을 만나 뵈면 만나 뵌 분마다 같은 말씀을 안합니다.

물론 똑같은 말씀도 있겠지마는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이 大部分 입니다.

또는 相大方을 대체로는 비방하는 말씀도 합니다.

 

옛날 큰스님들에게서나 現代도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데서,

참다운 法, 참다운 聖者가 말한 정통법(正統法)을 選擇한다 하는 것은 至極히 어려운 問題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에 팔정도(八正道), 칠각지(七覺支)라는 법문이 있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는 앞으로 부처님의 基本 敎理는 외우셔야 합니다.

가사, 삼보(三寶)라든가, 사제법문(四諦法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八正道) 또는 칠각지(七覺支), 이런 基本的인 법문은 별로 많지도 않으므로

꼭 외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人生의 重要한 指針이 되는 법문이므로 이런 정도는 외워야 합니다.

이런 법문은 우리 人間性을 探究하는데 참으로 重要한 指針입니다.

   

그런데, 七覺支 법문에서 맨 처음에 택법(擇法)이라, 自己에게 알맞는 행법(行法)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리불(舍利弗 Sariputra) 존자가 목건련(目<牛+建>連 Maudgalyayana) 존자한테 한번 놀러 갔습니다.

목건련 역시 부처님의 위대한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서 신통제일(神通第一) 아닙니까,

그때 마침 목건련의 제자 두 분이 목건련 앞에 와서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도저히 工夫가 안됩니다. 벌써 出家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도저히 工夫가 익어지지 않습니다

하고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出家하기 前에 성냥간(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일을 했었고,

또 한 사람은 洗濯業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건련이 그들의 근기(根機)를 잘 몰라서 즉,

그 사람의 個性을 잘 몰라서, 풀무질했던 사람에게 不淨觀을 시키고

洗濯業을 했던 사람에게는 數息觀을 시켰던 것입니다.

   

부정관(不淨觀)이란 ‘내 몸도 부정(不淨)하고 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더럽고 不淨스럽다’ 하는

부정관법(不淨觀法)으로 우리 慾心을 除去하는 方法입니다.

뭐라해도 우리가 欲望을 除去한다는 問題가 가장 어렵지 않습니까?

 

修行法도 여러 가지로 많이 있지만, 맨 처음에 어려운 修行法을 시킨다면 業障이 많은 사람은

잘 안 나아갑니다. 따라서 業障을 녹이기 위해서, 貪心이 많은 사람에 對해서는

‘내 몸은 피나 고름이나 오줌이나 똥이나 그런 不淨한 것으로 充滿해 있고 또 죽어지면 썩어져서 냄새가

고약하고 문드러터져 不淨한 것이다’ 하는 부정관법(不淨觀法)으로 貪慾心을 除去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란심(散亂心)이 많은 사람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이라,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을 헤아리는

呼吸을 세는 數息觀法으로 散亂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건련은 도()는 약간 좀 通해서 어렴풋이는 안다 하더라도 별로 智慧가 없어놔서 잘 分揀을

못했겠지요. 그러나 사리불은 목건련의 도반(道伴)이지마는 智慧가 수승해서 그냥 척 알았단 말입니다.

‘아, 잘못 됐구나! 풀무질은 어느 정도 間隔을 두고서 마치 呼吸하는 모양으로 하는 것이니까,

풀무질을 했던 사람에게는 마땅히 數息觀을 시켜야하는 것이고, 또 빨래 洗濯을 하는 職業을 가졌던

사람은 더러운 것을 자꾸만 빠는 것이니까 그 사람에게는 不淨觀을 시켜야할텐데 ……’

 

그래서, 사리불이 목건련에게 말했습니다.

‘아, 그대가 잘못되었네. 마땅히 풀무질하다 온 사람에게는 數息觀을 시켜야 하는 것이고,

또 빨래를 하는 直業을 가졌던 사람에게는 不淨觀을 시켜야 될 것인데 잘못 되었네’

그래서 목건련이 그와 같이 그들의 適性에 맞춰서 행법(行法)을 提示 하니까

이윽고 얼마 안 가서 그냥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더라도 自己 適性에 맞는 行法, 또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에 맞는 行法이라는 것이 지극히 重要합니다.

 

참선(參禪)한다는 것은 實은, 별로 많은 말씀을 필요로 않는 것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參禪은 原來 불립문자(不立文字)라, 文字를 거기에 안 넣고,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오직 사람 마음을 딱 집어서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原來 말도 많이 않고,

말 代身에 그냥 버럭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또는 방()으로 후려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式은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現代같이 이렇게 複雜한 때는 역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택법(擇法)이라, 여러 가지 複雜한 가운데서 법()을 골라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별로 많은 말씀을 하고 싶지도 않고 또 잘 모릅니다만,

여러 가지 複雜한 가운데서 부처님 正法을 가려내기 위해서 부득이 제가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사부대중이 참고로 해야 할 것은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實踐하는 행()과  풀이하는 해()가 같이 상응(相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행()과 해()가 같이 아울러서 행()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교리도 많이 아는 분들이 계시지만 더러는 치우친 분도 있습니다.

가사, 冊도 많이 보고 硏究를 많이 했지만 별로 닦음은 없는 그런 분들은 體驗이 不足해서

역시 바르게 못 느낍니다. 또 불교라는 것이 마음 닦아 가는 工夫라서, 마음 닦지 않으면

敎理를 많이 알아도 分揀을 못합니다.

 

불교 말로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이라, 마음이 탁 틔여서 마음이 개운하면 바로 볼 수가 있지마는,

通達菩提心에 이르지 못하면, 경()을 보아도 이것 보면 이것이 옳고, 저것 보면 저것도 옳고,

分揀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佛敎工夫는 敎理 풀이와 行이 같이 아울러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행()만 들이 많이 하고 닦기는 많이 했지마는, 敎理는 별로 모르는 경우에, 물론 우리가 닦아서

그냥 부처님 地位에 뛰어 올라가면 모르지만 부처님 地位에 올라가려면은 쉽지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간 닦았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심수오묘(深邃奧妙)한 敎理를 어느 程度 硏究 안하면 바른 길을 모르고

바른 닦음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敎理를 바로 알고 바로 닦기 위해서는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닦아서 가는 행()과 敎理를 풀이하는 해()가 나란히 相對해 가야만이

우리가 바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偉大한 분의 하나입니다만 지금 나이가 구십도 넘었고 옛날에 佛敎大學도 나온

그런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한테 몇번 가서 말씀을 듣고 가만히 보니까, 그분은 自己 스스로는

念珠를 돌리며 觀音 主力을 하면서, 參禪 말만 나오면 그때는 話頭를 들어야 한다고 逆說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순적인 말씀을 하시는 분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볼 수가 있고 또 가사,

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念佛은 어떻게 해야 한다’ 하고 불교를 믿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참 구구합니다.

   

또 우리 韓國은 염불종(念佛宗)이라 하는 한 宗派만 있는데, 日本에는 같은 念佛을 하는 데도 염불종(念佛宗)이 세 파나 있고 또 그 세 파 모두가 다 각각, 한 宗派가 우리 한국불교 全切보다도 더 많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의 진종(眞宗)은 절 수가 만 개나 넘고 불교대학도 몇 개가 되는 종파로 그 진종(眞宗) 사람들은 念佛을 하는 데도 그냥 부처님 이름만 계속 부릅니다. 부처님 相號를 生覺하는 것을 排擊합니다. 日本 사람들은 民族性이 굉장히 排他的인 面이 强하여서인지 같은 念佛을 하는 데도 꼭 이름만 불러야 하며 이름 부르는 以外는 그냥 排擊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시종(時宗)이라, 念佛을 하더라도 때를 골라서 하여야 한다는 종파이고 또 한 가지는 융통염불종(融通念佛宗)이라, 念佛을 하더라도 계행(戒行) 또는 參禪, 모두를 圓融無碍하게 하라는 종파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念佛宗에도 세 파나 있습니다.

   

또 아시는 바와 같이 일련종(日連宗)과 같은 宗派는 일련(日蓮 1222∼1282) 大師를 부처님 다음 가는 분

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 宗派도 굉장히 數가 많습니다. 창가학회(創價學會)나 그런 宗派는 한 宗派에서

共明黨이라는 政黨도 내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세력이 강하고 오백만 신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종파에서도 자기들이 하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즉 日本 말로 ‘나무묘우호우렌게교

우’하는 법화경(法華經) 이름을 외는 것 이외는 다 나쁘다고 비방합니다. 自己들 하는 것만이 成佛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같은 불교도 이렇게 하는데 서로 다른 종교야 오죽이나 다른 종교를 비판하고 비방하겠습니까,

따라서 좀 어렵더라도 불교를 믿는 분들은 敎理를 어느 程度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길을 分揀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도 역시 淸華라는 한 個人의 個性에 制限됩니다. 絶對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도 저는 公平하려고 애씁니다만 또 역시 저라는 하나의 個人에 制限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는 參考로 하시고 여러분께서 스스로 고르셔야 합니다.

 

저는 다만, 부처님이나 부처님 뒤의 正統 조사(祖師) 스님들의 말씀을 所介할 뿐입니다. 같은 법문도

역시 正評이 있는 道人이 아니라 그렁저렁한 도인, 도인인가 아닌가 모르는 사람들의 말은 별로 참고할

必要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부처님 뒤의 正統 祖師 스님의 말씀을 우리가 參考로 해야만이 混同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뒤에 나오신 달마(達磨) 대사라든가 또는 용수(龍樹 Nagarjuna B. C. 2∼3 世紀) 보살,

마명(馬鳴 Asvaghosa B.C. 2∼3 世紀) 보살 또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스님,

 

韓國으로 말하면

원효(元曉 617∼686)대사, 의상(義湘 625∼702)대사, 보조(普照)국사,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국사, 무학(無學 自超 1327∼1405)대사, 진묵(震默 1562∼1633)스님,

서산(西山休靜 1520 ∼1604)대사, 사명당(四溟堂 惟政 1544∼1610), 이런 분들 말씀은

다 옳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 말씀만 主로 해서 이제 所介를 드리는 것입니다.

-무진장-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