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제사를 회상함

장백산-1 2013. 2. 13. 12:00

 

중앙일보

입력 2013.02.12 00:25 / 수정 2013.02.12 06:47

[송호근 칼럼] 제사를 회상함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설을 잘 쇠셨는지, 오랜만에 친인척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기억을 갖고 돌아오셨을 터, 이참에 五百年 傳統에 抗拒한 무용담 한 토막을 들려드리고 싶다. 필자가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조상도 모르는 놈!’이 된 事緣을 말이다. 父親은 이 말을 달고 사셨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인 安東과 자웅을 겨루느라 祭禮를 過度하게 發展시킨 영주(榮州) 出身이라 더욱 그랬다. 父親은 호를 아예 효응(孝應)이라 지으셨다. 孝로 祖上 恩德에 應하면서 사시는 신조는 탓할 바 아니나 그 實行 義務가 베이비부머인 長男에게 온통 실린다는 게 問題였다. 儒敎 文化의 막내 世代, 그것도 忠孝思想에 洗腦된 베이비부머에게 父母의 信念과 祖上崇拜는 宗敎였다. 그러니 宗敎革命을 일으키지 않고는 ‘平和롭고 오롯한 명절’은 存在하지 않았다.


 祭祀는 그냥 넘어가면 良俗이고, 따지면 不和다. 오십 줄까지 孝應 선생의 신조에 착실히 응하던 중 불경스러운 懷疑가 들었다. 이 많은 飮食, 투여한 勞動, 친인척의 출석, 그리고 총총히 흩어진 뒤의 虛妄함은 도대체 뭐지? 祭祀 後 느긋하게 음복하시던 孝應 선생의 表情과는 달리 長男의 知識倉庫에는 反亂이 싹텄던 거다. 반란은 곧 기획연구로 이어졌는데 祭禮를 創案한 朝鮮 儒敎의 秘密을 기어이 밝혀냈다. 그것은 統治 이데올로기의 實行 方式이었다.

 性理學을 開國理念으로 택한 朝鮮의 建國 勢力은 佛敎 탄압과 함께 民間의 呪術信仰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禁止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祖上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제례(祭禮)와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慶福宮 左側에 宗廟를 지어 祖上崇拜의 基礎를 마련하고, 右側에 社稷壇을 지어 곡식神과 토지神에 吉運과 豊年을 빌었다. 朝鮮法典인 『經國大典』에 祭祀 規則을 定해 반포했다. ‘6品 以上은 3代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家門과 門閥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朝鮮 後期  奉祭祀는 門中 大事, 家族의 最大 行使로 變質됐다. 1年 20회 정도 제사를 行하지 않으면 兩班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身分 向上을 熱望했던 서민들도 祭禮 競爭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몇 년 前, 설 제사를 정중하게 지낸 後 필자는 硏究結果를 조심스럽게 發表했다. 儒敎가 宗敎 機能을 벌써 傷失했고, 한말(韓末)을 基準으로 親家, 外家, 妻家에 벼슬한 사람이 없는 한족(寒族) 서민이 分明하므로

이제 祭祀는 無用하다는 主張을 폈다. 朝鮮이 歷史에 묻힌 마당에 統治手段인 祭禮의 意味는 消滅됐음을 附加했다. 朱子學 先祖 安珦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에서 반경 百里 안에서 사셨던 孝應 선생의 表情은 곧 險惡해졌고, 베이비부머의 반란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前에는 안 된다!’ 그 최후통첩에 結局 무릎을 꿇는 게 오륜(五倫)의 道理였지만 어리석게도 그만 베이비부머의 合理性을 發動하고야 말았다. ‘저의 앎과 지식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世代 間 戰線에는 火焰이 인다. “祖上도 모르는 놈들!” 철저한 事前 모의에도 불구하고 이 호통 하나로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성곽으로 투항했고, 長男에게도 얼른 降伏하라는 默言의 信號를 보냈다. 필자는 제사 간소화론으로 타협에 나섰지만 孝應 선생은 憤怒에 치를 떨며 老軀를 끌고 歸家했다. 協商은 깨졌다.

 필자는 硏究結果를 칼럼에 썼다. 며칠이 지나 硏究室로 電話가 걸려 왔다. 安東 태생의 70代, 명문대 출신 公務員이었다고 밝힌 老神士의 質問은 이랬다. “事實 나도 祭祀를 고민 중인데, 송 교수가 주장한 論理의 歷史的 根據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아주 소상하게 기획연구의 經路를 말했고, ‘禮法에 사로잡힌

제례’의 廢止를 주장했다. 온갖 祭物을 廢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잔이면 足하다고 말했다. “음-.”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요량으로 나는 부가 설명에 들어갔다. 東學 創始者인 최제우는 簡素化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禁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했다는 점을 말이다. 조금 뜸을 들인 뒤 그가 投降했다. “나도 그렇게 할랍니다!”

 ‘平和롭고 오롯한 명절’은 결렬된 협상의 작은 전리품이다. 休戰協定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不安한

平和다. 그러니 ‘조상도 모르는 놈!’을 되뇌고 계실 孝應 선생이 걸린다. 설은 잘 쇠셨는지, 일가 친지들과 재회의 기쁨을 갖고 돌아오셨는지, 귀성객들이 보낸 고향의 설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