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법정스님
오늘은 보왕삼매론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끝없는 복습입니다.
우리가 절에 가서 법문을 듣다 보면 대개 비슷비슷한 말씀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예습은 없어요.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지요.
영적인 체험은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복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까지 익혔던 정진은 어제로써 끝나는 겁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보왕삼매론 많이 들었죠? 이제 다시 복습 삼아서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모두 잊으세요. 그건 과거사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음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世上을 사바세계라 합니다.
사바세계가 무슨 뜻입니까?
梵語 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인데 사하다트, 사하를 中國 말로 옮기다 보니까 사바가 됐는데
이 말을 우리말로 하자면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하는 세상이란 뜻이에요.
참을 인(忍)자, 흙 토(土)자 인토(忍土).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 혹은 '참는 땅'이라는 겁니다.
또는 감인토(堪忍土), 견딜감(堪), 참을 인(忍)자 卽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 나가는 것이 참고 견디어 나가는 세상이다, 이런 뜻입니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삶의 妙味가 있어요.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세상사는 재미가 없을 거예요.
寶王三昧論은 이런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옛 禪師들이 敎訓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활의 지혜예요. 또 순경계가 아니고 역경계, 삶의 거스름 속에서
터득하는 생활의 지혜, 자기 관리에 대한 일종의 처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읽고 해설하겠습니다.
첫째, 몸에 病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病이 없으면 貪慾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聖人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 몸이라는게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로 이뤄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人間의 存在는 般若心經에 나오듯 오온(五蘊), 즉 色·受·想·行·識,
物質的 料素와 精神的 料素가 合쳐서 만들어진 有機的 存在입니다.
本來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因緣이 닿아 이런 形像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또 因緣이 다 하면 이게 흩어지고 말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자체가 무상(無常)한 거예요. 늘 變하는 겁니다. 固定돼 있지 않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하잖아요.
저를 오랜만에 본 신도나 스님들은 '아이구, 스님두 이제 많이 늙으셨네요' 합니다.
중이라구 안 늙는 재간이 있습니까? 부처님도 생로병사하셨는데. 그게 宇宙의 秩序예요.
그러나 靈魂(意識/마음/精神)에는 生老病死가 없다고 하잖아요.
거죽은 生老病死가 있다지만 알맹이는 생(生)도 없고 노(老)도 없으며, 병(病)도없고 사(死)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日常的인 우리를 갖고 얘기하는 겁니다.
몸에 어떻게 病이 없을 수 없습니까? 그게 有機體인데, 탈이 나는 거지요.
病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 말고 그 病의 意味를 터득하라는 말예요.
平素에 健康했을 때 生覺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앓을 때 生覺해 보라는 겁니다.
이웃에게 고마움도 느껴야 하고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人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人間關係는 어떠했는가, 나는 職場에서 얼마나 誠實하게 살아왔던가 하는 것을
스스로 自己 省察할 수 있는 契機로 삼으라는 겁니다.
病苦 自體가 죽을 病이 아니라면 그 病을 通해서 새로운 눈을 뜨라는 겁니다.
양약(良藥)을 삼으라는 말이지요. 사람의 몸은 虛妄한 有機體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있지만 이 다음 瞬間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豫側할 수 없는 存在입니다. 本來 그런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가지고 늘 健康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卽 健康했을 때, 내게 健康이 주어졌을 때 잘 살라는거예요.
虛送歲月 말라는 겁니다.
人生을 無價値한 곳에 쏟아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肉身의 病은 藥으로 다스릴 수 있어요.
精神的인 病은 藥으로써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虛弱합니까? 옛날보다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여러 가지 便利한 施設 속에 살고 있는데 體力과 意志는 자꾸 떨어져요.
어떤 게 몸에 좋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모두 그 쪽으로 쏠리잖아요? 이렇게 虛弱합니다.
옛날 農事짓고 살던,이런 흙에다 뿌리를 내리고 살던 時節에는 흙으로부터 많은 氣運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흙의 敎訓을 몸소 익혔기 때문에 그렇게 虛弱하지 않았는데 이젠 자꾸 흙으로부터 멀어지니까,
대지(大地)로부터 멀어지니까 그렇게 虛弱해지는 거예요.
生覺 自體가 虛弱해졌어요. 몸이 조금만 어떻다 하면 하루아침에 挫折하잖아요?
衆生의 病은 업(業)에서 나옵니다. 業이란 뭡니까? 하루하루 익히는 生活 樣式이에요.
生覺이라든가 먹는 飮食이라든가 生活習慣 이것이 健康하게도 만들고 病도 만듭니다.
衆生의 病은 業에서 나옵니다.
菩薩의 病은 어디에 있는가?.
자비심(慈悲心). 유마경에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내가 앓는다는 말씀이 있쟎습니까.
어머니들은 子息이 아플 때 같이 아프잖아요. 이게 定常的인 경웁니다.
子息이 밤새 잠 못 자고 앓을 때 같이 앓는 거예요. 그게 어머니예요. 生命의 뿌리니까.
그런데 子息이 앓고 있는데도 한쪽에서 쿨쿨 자고 모른체 한다면 그건 어머니가 아니에요. 가짜예요.
이게 누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닙니다.
源泉的으로 子息이란 것은 母胎에서 나온 가지 아닙니까? 뿌리에서 派生된 가지라고요.
가지가 앓을 때 뿌리가 앓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오지만 보살(어머니들이 보살이지요)의 病은 慈悲心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定常的인 境遇고 世上이 이렇게 막 돼 가다 보니까 子息이 앓는지 마는지
自己만 生覺하고 自己만 헬스클럽 다니고 잘 먹고 지내지 집안 食口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이런 희한한 사람도 더러 있잖아요?
모든 게 선지식(善知識 바른 道理를 일깨워 주고 이끌어 주는 착한 벗)이에요.
우리 앞에는,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善知識입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언짢으면 언짢은 일대로 우리의 삶에 敎訓을 주고 있어요.
좋은 일이라면 본받아야겠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면 본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몸에 病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病이 없으면 貪慾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聖人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順境界가 아닌 逆境界에서 그걸 어떻게 克復할 것인가 하는 處世訓입니다.
둘째, 世上살이에 困難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聖人이 말씀하기를
'근심과 困難으로써 世上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이 世上을 고해(苦海)라 하쟎습니까?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세계란 말은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어려운 세상, 고해,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順調롭게 풀리기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쌓여 있는 것이죠. 困難합니다.
어떤 집안을 놓고 보더라도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어떤 個人의 人生도 그렇고. 세상살이에 곤란 없게 되면 사람들이 넘치게 돼요.
잘난 체 하고 남의 어려운 事情을 모르게 됩니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自身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生覺지 말라는 거예요.
自身의 삶의 過程으로 生覺해야 합니다. 宿題로 生覺해야 해요.
우리 집안의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廻避해선 안 됩니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해요. 어떤 意味가 있는가. 왜 우리 집안에 이런 액난(厄難)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世上에 저마다 自己 짐을 지고 나오잖아요. 그 짐마다 무겁고 달라요.
누구든 이 世上에 나온 사람들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니까요.
그런 根을 지니고 있어요. 그것이 그 人生이에요.
그러니까 집안에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나쁘게만 生覺지 마세요.
그 어려움을 通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創意力을, 意志力을 啓發하라는
宇宙의 消息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世上은 살아갈 만한 世上이 됩니다.
처음부터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바세계라는 것, 참고 견뎌야 할 세계.
그런데 여기에 妙微가 있어요.
만약 이곳이 極樂이나 地獄이라면 아무 재미가 없어요.
극락(極樂)? 아무 苦痛도 없다는 거예요. 무슨 生覺만 해도 몰려온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볼 때 理想的으로 追究해야 할 世界입니다. 그러나 재미없어요.
또 지옥(地獄)? 너무 苦痛스러워서 堪耐할 수가 없어요.
사바세계는 그 中間이에요. 그러니까 참고 견딜 만한 世上이란 것이죠.
셋째, 工夫하는 데에 마음에 障碍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聖人이 말씀하기를 '障碍 속에서 解脫을
얻으라'하셨느니라.
工夫라는 것은 꼭 스님이나 신도들이 精進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닙니다.
공부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에요.
이 工夫는 世上을 살아가는 일이에요. 障碍 없는 世上이 어딨습니까?
다 障碍가 있단 말예요. 좋아서 사랑한다는 데도 三角關係니 뭐니 해서 障碍가 있잖아요.
다 障碍物이 있다니까요. 장애 없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님들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한 平生 世上을 살다 보면 無數한 障碍物 경주예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 자리에 오면서 얼마나 많은 障碍物을 헤치고 왔습니까?
그러니까 人生이란 것은 障碍物 競走라니까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 障碍物이. 解脫이란 뭡니까? 그런 障碍物을 넘어서 안팎으로 自由로워진 마음狀態,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마음상태 이걸 解脫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障碍라는 것은 解脫로 이르는 디딤돌이에요. 발판이에요.
그런 障碍가 없으면 解脫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모든 게 다 必要한 存在라니까요.
이 宇宙에는 다 必要한 것들만 있는거예요. 어떤 微生物이 됐든 다 宇宙에 必要한 거예요.
그래서 생겨났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農藥으로, 强한 殺蟲濟로 죽여 보세요.
그 微生物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連鎖反應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利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지잖아요.
오늘 이 生態界의 變化라든가 環境問題, 또 地球 溫暖化 問題 이게 다 뭡니까?
너무 우리가 全切的인 흐름과 調和를 모르고 어떤 部分的인 것에 갇혀서
그 물질적인 것만 지나치게 消費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地球 自體가 人間들을 堪當 못하는 거예요.
그래 여기저기에서 털어 내느라, 재채기하느라고 地振도 일으켰다가 또 여기저기 불도 일으켰다가 그러잖아요.
地球에 사는 人間들이 마치 물 것처럼 하도 귀찮게 하니까 털어 내느라고 地球가 몸살을 앓고 있는 거예요.
地球가 뭡니까. 우리가 기대려는 生命의 바탕이에요.
우리만 살고 지나갈 生命의 바탕이 아닙니다. 永遠히 存續돼야 할 生命의 바탕입니다.
그런데 20世紀 後半 들어와서 우리가 너무도 地球를 함부로 對했기 때문에
그 報償으로써 지금과 같은 여러 가지 異變이 오는 거지요.
障碍 없길 바라지 마세요. 障碍라는 것은 다 그걸 뚫고 지나갈 수 있는 解脫의 길로 이어진 길목이기 때문에
障碍를 去否하지 말고 그걸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煩惱를 보리로 轉換하고 生死를 涅槃으로 轉換하고 苦惱를 기쁨으로 轉換하라는거예요.
障碍 속에서 解脫을 얻으라는 거예요. 障碍 없인 解脫이 안 됩니다.
넷째, 수행(修行)하는 데에 마(魔)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誓願)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聖人이
말씀하기를 '모든 魔群으로써 修行을 도와주는 벗으로 삼으라'하셨느니라.
마(魔)란 뭡니까? 나쁜 거예요.
잠잠하게 精進하고 싶은데 늘 졸음이 온다거나 또 空然히 妄想이 일어난다거나 다 魔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魔가 낀다고 하잖아요.
또 도고마성(道高魔盛), 道가 높을수록 魔가 盛한대요. 이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意味에서 우리의 그릇을 키우는, 우리의 기량을 키우는 소식으로 받아들여야지요.
우리가 어떤 좋은 일을 하려면 반드시 障碍物이 생겨요. 그걸 廻避해선 안 됩니다.
회피할 수도 없는 거구요. 그걸 딛고 일어섬으로써 새로운 技倆, 새로운 意志力,
내가 지금까지 갖추지 못한 새로운 그릇이 마련되는 거예요.
집에서도 그래요. 무슨 事業하려고 하는데 부도 直前에 어려운 일이 닥친다거나
또 婚事를 받았는데 엉뚱한 障碍가 생긴다거나 누구나 이 사바세계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이라니까요.
그것을 겉으로만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안으로 곰곰이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안에서 새기며 意味附與를 하라는 거예요. 이것은 單純한 觀念遊戱가 아닙니다.
消極的인 삶의 態度가 아니에요. 이건 삶의 智慧예요.
우리가 이 風塵 世上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어떻게 克復해야 할 것인가 할 때
이런 옛 聖人들의 말씀을 依持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修行하는데 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修行하는 데에 魔가 없으면 誓願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서원(誓願). 저마다 서원이 있잖아요. 마음속으로 서원이 있어요. 꼭 修道하는 世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事業하는데도 그렇잖아요.
어떤 기업을 경영하는데도 나름대로 서원이 있잖아요.
이 기업을 키워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여하겠다 하는 서원들이 있다고요.
그런데 어떤 장애가 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된다면 언제 내가 그런 서원을
세웠는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 후퇴하고 만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이렇게 옛 성인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다섯째, 일을 計劃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그래서 聖人이 말씀하기를
'많은 歲月을 두고 일을 成就하라' 하셨느니라.
모든 일이 너무 쉽게 되면 안 좋아요. 쉽게 이뤄지면 쉽게 무너져요.
功이 들어가야 합니다. 不實 工事라는 게 뭡니까?
正當한 過程을 거치지 않고 너무 쉽게 이뤄졌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거예요.
人生도 마찬가지예요. 어려움이 있어야 해요.
어려움이 없이 자란 아이들, 이 다음에 어려운 일 있으면 그걸 克復 못해요.
그냥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구요. 이게 다 고해(苦海)라니까요. 사바세계, 참고 견뎌야 할 세계라니까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때그때 免疫力을 갖춰야 해요.
일이 쉽게 되길 願하지 마세요. 모든 게 次例가 있는 겁니다.
하알의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서도 四季節의 秩序가 따라야 움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잖아요.
너무 일이 쉽게 풀리길 願하지 마세요.뜸을 들이는 過程이 있어야 하잖아요.
뜸을 들여야 한다고. 많은 歲月을 두고 일을 成就하라. 오랜 歲月을 두고 成就하라는 거예요.
많은 세월을 두고 기량이 커지고 그런 도량을 堪當할 만한 資質이 갖춰지는 거예요.
아직은 내 그릇이 그런 도량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됐는데
만약 거기에 무슨 일이 뜻대로 된다면 驕慢해지고 安易해진다구요.
여섯째,친구를 사귀되 내가 利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利롭고자 한다면 義理를 傷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친구란 뭡니까. 또 다른 나예요. 또 다른 내 自身이라고.
친구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마세요. 또 다른 내 分身이라니까요.
그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모든 人間關係가 그렇듯 믿음과 義理, 信義로써 인간관계가 이뤄져야 하는데 특히
친구지간은 그래야 해요.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친구지간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人間關係에는 그런 믿음과 의리, 하나 곁들인다면 禮節도 들어가야 해요.
친할수록 예절이 갖춰져야 해요. 예절은 뭡니까? 사람의 道理죠.
사람의 품위고. 좋은 인간관계에는 반드시 믿음과 신의, 예절로 이뤄져야 해요.
친구? 내 부름에 대한 應答이에요. 그러니까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어울리잖아요.
친구지간에 친구를 手段으로써 自己 出世하는데 발판으로 삼지 말라는 거예요.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인간 관계를 두텁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만큼 살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關係만 남습니다.
내가 잘 산 人生이라면 좋은 關係가 남고 내가 잘못 산 人生이라면 언짢은 關係만 잔뜩 남는 거예요.
關係를 通해서, 이웃을 通해서, 친구를 通해서 거듭거듭 人間形成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친구는 고마운 存在예요. 왜냐하면 나를 그렇게 일깨워 주니까.
나를 豊饒롭게 만들고 나를 깨우쳐 주니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눠 갖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되 내가 利롭기를 바라지 말라.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義理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일곱째, 남이 내 뜻대로 順從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하셨느니라.
묘미가 있는 말이에요.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는 거예요.
이게 뜻맞는 사람들끼리 살아야 하는데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라는 게 상당히 갸웃갸웃해지는데
한 家庭을 두고 生覺해 봅시다.
가정에 아무 탈이 없는, 정말 서로 和合하고 和睦한 가정이 이 세상에 더러 있겠지요.
많지는 않아요. 다 갈등이 있어요. 집안에 모두 孝子만 있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집안 재미없어요.
人生을 모른다구요. 不孝가 있기 때문에 孝가 問題가 되는 거예요.
불효자가 있기 때문에 효의 값을 아는 거예요. 돌담을 쌓는데 똑 같은 돌은 필요가 없습니다.
큰 돌, 작은 돌, 모난 돌, 납작한 돌 다 필요하잖아요.
우리 組織社會, 이 世上도 마찬가지예요. 저마다 各己 獨特한 個性이 틀린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거예요.
이때 全切的인 調和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가 努力하면 돼요.
調和가 깨지면 그건 病든 狀態이기 때문에 안 되고 自己 個性을 마음껏 發輝해서
全切的인 調和를 이룰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父母들이 해야 할 일은 그거예요. 큰놈은 이런데 작은놈은 이렇더라. 比較하지 마세요.
比較하면 氣分 나쁜 겁니다. 다 한 몫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세요.
어디에 내놓든 사람으로서 한 몫을 하면 된다니까요.
모두가 優等生? 말도 아니지. 우등생 아닌 사람이 있으니까 우등생이 있는 거요.
여덟째, 공덕(功德)을 베풀 때에는 과보(果報)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功德이란 공적(功績)과 덕행(德行)이지요. 한마디로 선행(善行)이에요.
善行을 베풀 때는 果報를 바라지 말라. 結果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果報를 바라면 장삿속이예요. 信仰生活은 功利性을 排除해야 합니다.
契約이 아니에요. 祈禱할 때, 요즘 修能試驗 때문에 다급해진 엄마들 많지요?
結果에 執着하지 말아야 합니다. 合格이 됐든 不合格이 됐든 그 나름대로 意味가 있기 때문에
좋은 점수가 나오든 덜 나오든 結果에 執着하지 말고 그냥 最善을 다할 뿐이에요.
내가 안할 수 없으니까 懇切한 마음에서 기도할 뿐이지 따로 무슨 결과, 결과 갖고 따지지 말라니까요.
기도(祈禱)란 뭡니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할 뿐이에요.
結果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懇切한 마음으로 하면 懇切한 메아리가 있게 마련이에요.
그게 宇宙의 秩序입니다.
아홉째, 利益을 分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작은 것으로 滿足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幸福의 秘訣은 결코 크고 많은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經濟 現實이 어떻습니까?
그저 입만 벌리면 다들 經濟 타령하잖아요. 하루에도 企業體들이 몇 개씩 도산되고...
그런데 人間生活이 經濟만이 全部가 아니에요. 우리가 너무 지금 그런 일에만 치우치고 있다고요.
世界의 흐름이 그러니까. 그러니까 분에 넘치게 過消費하고 있잖아요.
우리 生態界를 破壞하고 있고. 오늘날 經濟가 어려운 것은
일찍이 우리 그릇은
만들어 놓지 않고 자꾸 慾心껏 뭘 담기만 하려고 했던 果報예요.
오늘의 不況은 우리들 마음이 그만큼 貧弱하다는 證據예요.
그릇을 키우려면 눈앞의 利害關係에 매달리지 말고 德을 길러야 합니다.
個體를 넘어서 全切를 生覺해야 한다니까요.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으로써 滿足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은 滿足할 줄 알아야 해요. 滿足할 줄 알면 잘 사는 거예요. 滿足할 줄 모르면 늘 갈증상태죠.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갖고도 滿足할 줄 모릅니다. 그렇게 됐어요. 늘 갈증 상태예요.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滿足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넉넉해져요.
열째,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뜻인데 모든 잘잘못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갑니다.
時間이 지나면 검고 흰 것이 저절로 드러나요.眞實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마치 꽃香氣처럼. 그렇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변명하게 되면 거기서 怨望하는 마음,여러 가지 雜音이 생기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지 말라는 거예요.
時間이 지나면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自己 自身을 살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트이는 것이요, 트임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많은 障碍 가운데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셨다.
요즘 世上에 道를 배우는 사람들이 먼저 逆境에서 견디어 내지 못한다면,
어떤 障碍가 부딪칠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마침내는 法王의 큰 寶盃까지도 잃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깊이 새겨 生活의 智慧로 삼아야 할것이다.
結論 삼아서 말씀드리지요.
逆境을 이겨내지 못하면 自身이 지닌 生命의 씨앗을 꽃 피울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어요.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고요.
그런데 逆境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는 그런 忍耐가 必要해요.
그래서 참고 견디라는 겁니다. 거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世上이 사바세계라는 事實을 다시 한번 想起해 주시길 바랍니다.
極樂도 地獄도 아니라는 거예요.
사바세계. 참고 견딜 만한 世上.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가끔 외우시면서 生活의 智慧로 삼기 바랍니다.
- 송화님 메일에서
*무진장-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