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일상 생활 가운데 흔히 우리가 말하는 기도가,
마음 속에 원하는 것을 외부의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빌면서
성취시켜 달라고 청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과 별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원래
인과(因果)의 理致를 가르치기 때문에
直接的인 修行을 通한 깨달음의 成就를 가르친다.
불교는 무신론을 표방한다.
그래서 神에 대한 우상숭배를 단정코 거부한다.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섬겨지는 神이란,
인간위에 군림하면서 길, 흉, 화, 복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직위를 부여받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한 神을 직접 본 일은 없을 것이다.
理由는 觀念 속에 存在하는 것은,
곧 그 固定틀을 뛰어 넘으면 사라지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모든 삶이 누군가의 관장하에 놓여 있다면,
自由意志에 依한 우리들의 努力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관장자가 임의 처방한 삶만을 살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마치 노예와 같은 모습으로 그를 떠받들어야 할 것이다.
불교가 무신론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이러한 神과 같은 槪念을 하나의 觀念, 하나의 우상으로 여기며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自由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타마 부처님 역시
스스로 神格化되는 것을 경계하셨는데,
다음 경전의 내용에서 그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바카리 스님은 인도 마가다 왕사성 어느 옹기장이 집에서 병을 앓고 있었다.
이 때 그는 마지막 所願으로 다시 한 번 더 부처님을 뵙고
정례(頂禮*상대의 발등에 자신의 머리를 닿도록 하는
인도식 절로써 최고의 존경를 뜻함.) 하고자 했다.
그 당시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죽림정사에 계셨는데
그 말을 들으시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부처님을 다시 뵌 바카리 스님은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환희의 마음으로 일어나 맞이하려고 하였지만,
부처님께서는 만류하며 다시 편안히 눕게 하고는 그 머리맡에 앉으셨다.
"어떠하냐, 좀 차도가 있느냐
대덕(고타마 부처님)이시여,
病은 갈수록 더하여 회복의 기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으로 여래(고타마 부처님)를 뵙고
두 발에 정례를 드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病든 제자를 위한
동체대비(同體大悲 * 크나 큰 자비심)의 마음이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자리를 함께한 이들에게 감명을 주는 말씀을 남기셨다.
"나의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眞理(法)를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眞理(法)을 본다."
이와 같이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죽움에 임박한 제자에게 크나 큰 자비심으로
眞理를 보라고 말씀하셨으며,
스스로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까지도 경계하셨다.
個個人의 幸福과 不幸은 애매모호한 槪念의 神이라는
空虛한 觀念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自身한테 있는 것으로서 自身에 依해 自身만이 救濟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自己創造로써 이 世上에 그 무엇도
나를 代身해서 나를 創造할 수 없는 것이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自己의 依持處는 自己뿐이니
自己밖의 무엇에 의지하리오.
自己가 참으로 잘 다스려질 때
훌륭한 의지처를 얻게 되리라."
覺 卽, 깨달음의 直接的인 成就와
衆生의 安樂과 幸福에 目的을 두기 때문에
崇高하며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祈禱라는 修行도 역시 단순한 우리들의 欲望 充足이나
絶對者에게 매달려 구제를 탄원하는 식의
個人的 次元의 안위나 행복을 위한 欲望 達成이 아니라,
불교의 수행은 이처럼
眞理를 깨닫고 衆生의 利益과 幸福을 위한 것이다.
좋은인연 통권 4호, 범수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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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작님이 올린 법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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