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心

장백산-1 2013. 6. 5. 03:34

 

 

 

[스크랩] 마음 心|좋은글 나누기
난 행복하다 | | 조회 11 |추천 0 | 2013.06.04. 21:12 http://cafe.daum.net/truenature/KIMF/4330

 

    마음 心 [신심명(信心銘)]의 대의를 쉽게 풀이하기 위하여 [육조단경]의 자심즉삼신(自心卽三身)이란 법문의 뜻을 풀어 보자. 자심(自心) 이라는 말은 우리의 根本 마음, 性稟, 眞志한 뜻이다. 우리의 自心이 지금 말을 하고 싶으면 말을 하고 듣고 싶으면 듣고 또 그런 生覺으로 行動하는 이런 것을 性稟이라고 한다. 中國에서는 性稟이란 말을 잘 쓰지만 우리 말로는 마음이다. 또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다" 이런 말을 많이 쓴다. 이렇게 '마음이다, 성품이다' 하는 말로 진아(眞我) 를 標示하는데 어떤 때는 '마음 심(心)' 字가 더 깊은 뜻으로 쓰여 지기도 하고 때로는 '성품 성(性)' 字가 더 깊은 뜻으로 쓰이기도 해서 대중하기 어려울 적이 많다. 그러나 우리 말로는 마음이 모든 生覺의 主體라는 것을 단적으로 認識할 수가 있다. 이 마음 자리가 本來 부처님의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 삼신(三身)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자심즉삼신(自心卽三身) 이라 하는 것이다. 법신(法身)은 부처님의 眞理를 몸에 비유해서 한 말이다.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영겁이 다 하도록變할 수 없는 眞理의 부처님을 말하는데 이것을 이불(理佛)이라고 한다.
    형상이 아닌 純粹 理致로만 있는 부처님 法만의 부처님이란 뜻이다. 보신(報身)은 부처님이 보살행을 닦으실 적에 限量없는 願行을 닦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나타난 부처님의 몸을 말한다. 이 報身은 永久性을 가진 몸 이면서 빛깔이나 形像이 있는 부처님의 몸이다. 즉 아미타불과 같은 佛身을 말한다. 끝으로 화신(化身)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方便의 힘으로 나투신 몸을 말한다. 보살도 되고 중생으로도 되고 귀신으로 되어 중생을 제도하기에 알맞는 몸을 그때 그때 나투시는 것을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나 인도에 탄생하신 석가모니 부처님 같으신 불 보살은 다 化身이다. 그런데 이 三身은 성불을 다 갖추고 있지만 사실은 이 삼신이 우리 마음 가운데 근원적으로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自心 卽 三身이 라고 한 것이다. 중생 자신이 본래부터 이 三身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을 나타내는 또 다른 法門으로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 즉 이 마음을 밝히기만 하면 곧 네 가지 智慧를 成就한다 란 말이 있다. 사지(四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이렇게 네 가지 지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사지보리(四智菩리)라고도 한다. 이 네가지를 밝혀버리면 여섯 가지 神通 즉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되는 것이다.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모든 법을 남김없이 관찰하고 설법하여 중생의 번뇌를 끊어 주는 지혜를 말한다. 성소작지(成所作智)는 보살과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보여주는 지혜를 말한다. 평등성지(平等性智)는 平等一如한 眞理를 觀하여 너니 나니 하는 差別心을 여의므로 대자 대비심을 일으켜 보살과 중생을 여러가지로 이롭고 즐겁게 하는 지혜를 말한다. 대원경지(大圓鏡智)는 티끌이 거울에 남김없이 다 비치는 것처럼 이 지혜도 원만하고 분명하므로 대원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本來부터 이 네가지 지혜가 마음 속에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 '마음'을 밝혀내야 한다. 육조대사께서 출가하기 전 아직 노(盧)도령으로 계실 때의 일이다. 노 도령은 그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매일 나무를 해다 시장에 파는 효자 나무꾼이었다. 나무를 팔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날 길가에서 [금강경]을 설명하는 어떤 법사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그 [금강경] 법사는 한낱 문자법사(文子法師)에 불과 했지만 육조대사는 이 법사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 하라는 法門을 듣고 깨쳤다. 그 뜻은 어디에도 마음을 執着하지 말고 오직 일어나는 그 마음 그대로 쓰라 하는 가르침이다. 세속의 오욕은 물론, 선이든 악이든 一切의 愛着을 버리라는 뜻이다. 그 [금강경]법사는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한 문자 법사였지만
    길가에서 오가는 사람을 모아 놓고 가두 설법을 하다가
    위대한 육조 대사를 만들 수 있었다. 육조 대사가 마음을 깨치고 나서 보니 우리 마음 속에 사지(四智) 보리가 다 갖추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꿈을 꿀 때 보면 뭄뚱이는 사바 세계에 그대로 있지만 꿈에 가서는 천당, 지옥을 만들고 온 宇宙를 創造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은 비록 깨닫지 못해서 미(迷)한 번뇌 속에 싸여 있다
    하더라도 마음의 根本 實在만은 成佛한 것이나 똑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꿈에서는 우주와 인생을 다 만들어 내고 중생과 부처까지 창조해 내고 있지 않은가? 일체 보살이 다 그렇다. 꿈꾸는 그 사람 마음이 이렇게 부처니 중생이니 보살이니 유정이니 무정이니 5천년 역사를
    창조해 낸 것을 보면 부처 되기 前에도 우리 마음 속에 모든 것을 창조해 내는 能力을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이런 원리를 선종의 제 3조인 승찬 대사가 가장 간결하게 밝혀 놓은 것이 [신심명(信心銘)] 이다. 내가 마음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내가 말하는 이 마음은 心性. 佛性이란 뜻으로 하는 마음이나 이 마음자리는 억만 겁 以前부터 있었고 억만 겁 뒤에 가서도 옛 것은 아니다. 가령 갖난 아이가 엄마 젖을 먹다가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젖꼭지를 더 빨지 않는 그 마음이나 노망이 들어 똥을 엿인줄 알고 찍어 먹는 그때나 그 마음 자리는 하나도 變함이 없다. 마음은 어린애도 아니고 늙은이도 아니다. 그러므로 生覺을 낼 줄 아는 마음자리는 백년 前 이 세상에 태어나던 첫날이나 백년 뒤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그 날까지 늘고 줄어드는 일 없이 恒常 그대로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마음자리는 아득한 옛날 그 어느 시간에 비로소 생겨나온 것도 아니고 자동차나 기계처럼 사용하면 할수록 낡아서 못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物質도 虛空도 아니기 때문이다. 참선이란 바로 이런 마음을 찾는 공부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마음을 직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 공부다. 그래서 옛날 조사님들이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 자리는 宇宙의 主宰者이면서 宇宙의 核心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 말로 하면 "神이다, 造物主다, 神靈님이다"하고 말하지만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부처님이다. 그러면 어떻게 修行할 것인가. "불리아 문연(不離兒 聞緣)하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 란 말은 눈으로 온갖 것을 다 보고귀로 온갖 소리를 다 들으며 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약한 욕을 다 들어 가면서 남과 싸움도 하고 선악의 경계를 다 보면서 부처님 경지에 올라선다는 그런 뜻이다. 참선하는 법이 모든 것을 다 떠나 가지고 마음을 發見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하는 가운데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종의 특수한 점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청담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