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照顧脚下(조고각하) - -지금 자기의 존재를 살펴보라

장백산-1 2013. 6. 5. 02:49

 

 

 

순간순간 자신을 돌아보세요 / 조고각하(照顧脚下)

조고각하 / 무영산..낭송진희


 

 

 

瞬間瞬間 自身을 돌아보세요 / 조고각하(照顧脚下)

 

 

산사에 가면 신발 벗어놓는 댓돌 위에

조고각하(照顧脚下) 라고 쓰인 주련 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발밑을 살피라’는 뜻이지요.

신발을 잘 벗어 놓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보다 根本的으로는

지금, 自己의 存在를 살펴보라는 意味입니다.

自己가 現在 處해있는 狀況을 스스로 살펴보라는 法門입니다.

瞬間瞬間 내가 어떻게 處身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唐나라 때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 이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일찌감치 온갖 經典에 通達한 분이라고 해요.

하지만 많이 아는 것이 말재주나 늘릴 뿐

마음을 깨치는 데는 防害가 된다는 事實을 깨닫고는 스승을 찾아다닙니다.

여기저기 다니다 마조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大 善知識을 만나니 평소 늘 疑問인 것을 묻습니다. “

입만 벌리면 부처가 어떻고 보살이 어떻고 하는데 도대체 부처가 뭡니까?”

하고. 아주 간절한 물음이에요.

 

마조스님은 “네 마음이 곧 부처다.” 라고 답해요.

‘부처를 묻는 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거예요.

즉심즉불(卽心卽佛), 심즉불(心卽佛)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대답에 大梅法常스님은 그동안의 疑問이 다 풀리고 크게 깨닫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지녀야 되겠습니까?

“그대 스스로 잘 保護해 가져라.”

법상스님은 그 길로 곡식과 채소종자를 구해 깊은 山中에 들어가서는

다시 世上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승의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法門의 偉力이 바로 그것입니다. 金剛經 法華經 등등 많은 經典이 있고,

다 좋은 말이지만 모두 다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니지요.

수많은 經典 말씀 중에서 한 두 마디라도 마음에 닿아서 나에게 깨우침을 준다면

그것은 平生 나의 精神的인 養食이 될 수 있어요.

 

경전을 독송할 때 우리가 꼭 유념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겁니다.

‘여기서 平生 내가 먹고 쓰고 活用할 수 있고,

남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을 얻게 하여지이다‘念願으로

 經典을 독송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른 讀經法입니다.

 

大梅山으로 들어간 法常스님은 조그만 초막을 짓고 살면서 坐禪을 熱心히 합니다.

깨달은 사람이 더 닦을 것이 있는가 하겠지만 바로 알았기에 참으로 닦을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유의하십시오.

닦을 수(修) 행할 행(行), 수행(修行). 닦는 行은 一時的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깨닫는 것은 어느 한 瞬間의 일이지만 마음 닦음은 持續해야 할 課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複雜微妙한 關係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存在이고,

닦지 않으면 더렵혀지기 때문입니다.

거울이 本來 밝은 바탕을 지니고 있지만 가만히 놔두면 더러워지듯이

우리 마음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법상스님은 잣나무 열매를 먹고, 연잎으로 옷을 해입고, 8치(24cm) 높이의 쇠로 만든 소탑을 머리위에 올려놓고 參禪에 精進합니다. 졸지 않고 늘 깨어있기 위해, 오로지 修行에만 몰두하기 위해서지요. 그렇게 40여年이 지났습니다.

 

한 자리에서 40年을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저력입니다.

요즘 修行者들 중에는 한두 철 하다가 소식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이렇게 한 집에서 몇 代가 계속해서 살았어요.

요새는 이런 저력이 없어요. 조금만 不便하면 떠나요.

한 터에서 오래 살아야 그 터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 덕(德), 氣象을 받을 수가 있어요.

내가 받아들이는 거지요. 自然이라는 것은 그러한 氣象과 德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도량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바로 그 修行者가 그 곳 自然처럼 살게 됩니다.

 

조주, 백장, 임제... 위대한 선지식들은, 그들이 살던 지명(地名)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땅이 지니고 있는 德, 氣運을 다 받아들인 것이니

그 地域 이름이 곧 그 곳에서 修行한 스님의 이름이 된 겁니다.

 

40여年이 지난 어느 날,

한 젊은 스님이 山길을 못 찾고 헤매다 法常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머리는 산발이고 풀옷을 입은 스님을 보고 그 젊은 스님은

“대체 이 산에 들어와 산지 얼마나 됐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산빛이 푸르러졌다가 누래졌다가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네”라는 對答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禪房 다닐 때만 해도 선방에 달력이 없었습니다.

달력이 귀하기도 했지만 원래 선방에는 달력을 두지 않아요.

修行者는 過去나 未來에 살지 않고 오로지 現在를 最大限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지난 歲月에 關心을 두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山을 내려간 젊은 스님은 자기 스승에게 겪었던 일을 얘기합니다.

그 스승이 바로 40여年 前, 마조 會床에서 法常스님과 같이 工夫한 염관스님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바로 40여년 前 ‘卽心卽佛’ 法門을 듣고 종적을 감춘 法常스님이 틀림없어요.

하여 다시 제자를 山으로 올려 보냈지만 法常스님은 더욱 깊은 山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조스님도 제자를 보내 法常스님을 찾아 質問을 던집니다.

“이전에 마조스님을 만나 무슨 道理를 얻었기에 이 山中에 숨어서 사십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 했기 때문이네.”  제자가 “(마조)선사는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라고 가르칩니다.

” 그러나 法常스님은 단호히 말합니다. “

그놈의 늙은이, 사람을 홀리고 있다.

非心非佛이라고 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다.“

 

이 말을 傳해들은 마조스님은 감탄을 합니다. “梅實이 다 익었구나!”

마음이 부처라는 確信, 이 확신이 늘 그의 삶을 새롭게 이끌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런 확신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남의 말에 속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가도, 누가 “참선보다 염불이 낫다더라”, “염불보다 참선이 빠르다더라”

이러면 마음이 흔들리고, 自身이 하고있던 修行方法을 바꿔버려요.

 

觀世音菩薩  기도하고 있다가도 지장보살이 더 영험 있다고 하면 얼른 바꿔버리고...

自己 確信이 없기 때문에 이렇습니다. 자기 확신이 없으면 이리 저리 쏠리게 마련입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예요. 그 화두 치워, 이걸 해야 돼 하면 기존에 들던 화두를 버리고 새 것을 합니다.새 화두를 든다고 오래 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맨날 그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예요. 마음이 문젭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 우리가 처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 입문한 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부처를 다른 데에서 찾고 있어요.

마음 밖에서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自己 確信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마음은 內的인 體驗을 通해서 이루어집니다.

內的인 體驗이 없으면 觀念밖에 안됩니다.

확고한 믿음이 내적인 체험을 통할 때 功德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단지 믿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예요.

안으로 自己 體驗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팎으로 하나가 되지요.

 

법상스님은 88살로 입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였습니다.

사람을 피해 40년이나 숨어살던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열매는 제대로 익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지 익기 前에는 열매의 구실을 할 수 없어요.

수행자는 때로는 높은 봉우리에 우뚝 설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닷물에 잠기기도 해야 됩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사람을 피해 살던 법상스님이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가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는 거예요.

 

善知識을 찾아 밖으로 나설 必要가 없습니다.

各者 自身의 마음과 몸을 通해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미 굳어져 生命力을 잃은 觀念的인 話頭를 붙들고 虛送歲月해서는 안됩니다.

활구(活句)가 아닌, 죽은 화두로는 眞情한 參禪을 할 수 없습니다.

觀念化된 것은 이미 生命力을 잃은 것입니다.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까이서 늘 마주치는 이웃, 하루에 몇 번씩 부닥치는 상황,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話頭가 될 수 있습니다.

 

선방에서 ‘이 뭣고’하는 것만이 화두가 아닙니다.

말 화(話) 머리, 두(頭). 말의 행위가 끝난 言語道斷의 境地,

理論的으로나 論理的으로 說明할 수 없는 窮極的인 疑問을 話頭라 합니다.

 

世上을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다 話頭가 있게 마련입니다.

自己에게 주어진 狀況, 만나는 이웃, 이런 것들을 話頭로 삼을 때

비로소 산(生) 화두가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慈悲心이야말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산 話頭입니다. 慈悲心이 곧 부처고 보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보리심과 자비심을 일깨워주는 存在가 바로 나의 스승입니다.

스승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됐건 물건이 됐건, 나무가 됐건 꽃이 됐건,

우리에게 慈悲心을 일깨워주는 存在가 스승이고 선지식입니다,

한눈 팔지 않고 깨어 있으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선지식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먼 데서 찾지 마십시오. 밖에서도 찾지 말고, 自己 안에서 찾으세요.

그래서 自身이 서있는 곳을 살피라는 겁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기 발밑을 살펴보란 겁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現實 狀況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거기에 삶의 妙味가 있습니.

 

 

 

묘서님이 올린 법문

 

*무진장-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