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if]--> 네. 반갑습니다. 지난 번 幸福 강의를 이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04년도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책이 연금술사라는 책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이런 관련된 책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을 하는 모습을 봤어요.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에 어떤 核心은 이런 內容입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願할 때 온 宇宙는 우리의 所望이 實現되도록 도와준다. 뭔가를 간절히 願할 때 온 宇宙는 우리의 所願을 많이 實現 되도록 도와준다는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은 누군가에 依해서 주어지거나 누가 이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自己 스스로 自身의 삶을 完全하게 만들어내고 設計하고 自身의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이 宇宙法界는 그 마음을 마음이 願하는 것을 이렇게 이루어내도록 도와주는 어떤 그런 役割을 하고 있다는 그런 意味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다만 이제 여기에는 아주 微妙한, 미묘한 差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願하면 이루어진다는 얘기거든요. 간절히 願하면 이루어진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練金術師에 어떤 하나의 함정 같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간절히 願할 때 이루어지긴 합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이기도 하고 또 바가바드기타의 핵심가르침이기도 한데 마음에서 일으키면 온 宇宙가 그것이 實現이 되도록 도와주는 作用을 하긴 합니다. 그런데 微妙한 함정이 뭐냐 하면 願할 때 執着하면서 원하느냐? 아니면 純粹하게 간절히 願하느냐? 이 差異입니다. 이게 어찌 보면 잘 모르겠단 말이에요. 어떤 게 도대체 執着하면서 願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純粹하게 願하는 것이냐? 이게 理解가 안 되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것에 對해서 잘 理解해야만 이 宇宙의 法則을 우리가 잘 理解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내가 願하는 대로 아름답게 멋있게 만들어낼 수 있는 智慧가 비로소 갖추어지게 되는 겁니다. 執着하면서 願하면 오히려 거꾸로 이루어진다. 그랬어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내가 간절히 원하는데 과도하게 執着을 한다면 말이죠. 그러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도하게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生覺해서 돈에 執着을 하는 사람은 富者가 되어야 된다는 生覺에 너무 執着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執着하고 있는 마음은 제가 前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裏面에 돈을 벌어야 된다. 벌어야 된다. 하는 데 과도하게 執着해 있으면 마음이 지금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과도하게 돈을 벌어야 된다는 生覺헤 執着함은 은 '나는 지금 돈이 없다'는 얘기잖아요. 나는 지금 돈이 궁핍하다는 마음을 强化시킬 뿐이라는 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執着하면서 願했을 때 오히려 가난과 궁핍이었을 때여서 돈이 벌어지지가 않는다는 거죠.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願할 때,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 말씀을 드렸죠. 불교의 어떤 核心 가르침은 願하지만, 願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금강경 가르침처럼 應無所住以生其心하라. 그 마음을 일으켜라. 그러나 머물러 執着하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 하는 얘기죠. 이것이 우리가 生覺했을 땐 不可能하다고 많은 사람이 느끼지만 事實 이것이 可能합니다. 이것이 可能하기 위해서는 自己가 願하는 게 있어야 되죠. 自己 發願이 있어야 됩니다. 자신은 나의 이런 삶을 나의 삶에서 이런 것을 통해서 내 어떤 삶이 願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고 强力하게 마음을 내고 해야 되는 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어떻게 하면 되느냐하면 설사 안 되도 괜찮다. 이 마음이 밑바탕 되어 있어야 되요. 간절히 그것을 願하지만, 설사 안 된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完全한 眞理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삶은 언제나 完全합니다. 내가 完全하다고 解釋하지 못하니까 完全하지 못하는 것이라 그랬죠. 그래서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姿勢면 되요. 삶이라는 이 世上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은 겁니다. 여러분 자식들한테 얘기할 때도 반드시 성적 잘 받아야 돼. 이 얘기 하지마시고 잘 받아도 괜찮고 때때로 못 받아도 괜찮다. 願하는 데로 잘 되도 괜찮고 안 되도 괜찮아. 전혀 상관없어. 그러나 될 수 없으면 열심히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런 어떤 마음이 돼야 되는 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무엇을 원하더라도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더라도 그것을 간절히 원해서 그것을 향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설사 안 되더라도 괜찮아. 하는 마음이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요, 우리 삶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습니다. 本質은.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 마음속에 나는 이렇게 하면 괜찮지만 저렇게 하면 절대 안 되라고 生覺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게 바로 執着의 實體입니다. 나는 노후에 시골에 가서 이렇게 전원생활하고 싶은데 남편이 혹은 아내가 絶對 나는 그건 못하겠다. 이렇게 生覺한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絶對라는 말이 붙게 되면 그건 執着이구나 하고 生覺해야 된다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 삶은 이래도 괜찮고 사실은 저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自身의 經驗과 前生의 業과 이런 다양한 것들이 나는 이것은 絶對로 못한다는 現實을 만들어 내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것은 뭘 의미하냐하면 도전을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슴이 닫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부분에 가슴이 열리지만 이러이러한 부분은 가슴을 닫아 버리는 겁니다. 가슴이 닫기 게 되면 無限한 可能性을 縮小시켜 버리는 거죠. 自身은 無限하게 어떤 狀況 어떤 條件 속에서도 無限히 삶을 뻗혀 나갈 수 있는 그런 無限 可能性의 存在인데 나는 요건 되고 요건 안 된다고 生覺함으로서 또 다른 可能性을 死藏시켜 버리는 結果를 초래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직장 다니던 사람이 직장에 잘 안되어 가지고 이제 그만두게 됐다. 그것은요, 진급을 못해서 失敗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어떤 길에서 또 다른 하나를 選擇한거에 불과한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됐을 때는 뭐가 어떤 可能性이 오냐 하면요, 나는 그 前에는 이 職場 以外에는 絶對 안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그 職場에서 진급을 못했을 때 사실은 또 다른 無限한 可能性을 向해서 가슴을 열게 되는, 어쩌면 事實은 더 廣闊함을 느끼게 될 수도 있어요. 더 어떤 自由로움을 느끼게 되고, 또 그 속에서 가슴을 확 열었을 때 내가 전혀 想像하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可能性이 내 앞에 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可能性들을 우리는 執着 때문에 닫아버리게 되죠. 執着 때문에 닫아버리게 되면 우리 삶은 정말 비좁은 意識의 認識의 어떤 監獄에 갇혀서 意識의 감옥에 갇혀서 이거 아니면 絶對 안 되는 것처럼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懇絶히 願하지만 안 되도 괜찮다. 그러나 난 이것을 願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執着 없이 純粹하게 願할 수 있는 가장 어떤 아름다운 方法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불교에서 業報라는 가르침이 지금까지 제가 말했던 끌어당김의 법칙이니 이런 것들과 相通하는 건데요, 불교에선 業報라고 하고 因果應報라고 하는데 業이라는 것은 行爲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業, 이러면 罪를 의미한다고 錯覺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業은 罪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行爲를 의미합니다. 즉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業이라고 하죠. 그래서 나라는 存在가 六根을 가진 나라는 存在가 業을 지으면 이 世上은 내 바깥에 있는 이 世上은 그에 따른 應報를 가져오는 거예요. 報. 結果를 가져오는 겁니다. 나라는 存在에게 ---.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여기서 報는 다르게 익어간다는 뜻이라고 그랬어요. 즉 똑같은 業을 지었는데 똑같은 行爲를 했는데 어떤 사람은 좋은 結果를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은 좀 적게 받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쁜 結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業은 다르게 익어가기 때문에. 同一한 일을 했더라도 그 마음에서 흡족해서 한 사람이 있고 마음에서는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있겠죠. 同一하게 보시를 했을지라도 어떤 사람은 흡족한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은 복을 지어야 되니까 그래야 복 받으니까 하고, 어떤 사람은 하기 싫어 죽겠는데 남들한테 욕 얻어먹으면 안 되니까 했다. 그러면 前者는 큰 복을 받을 것이고 後者는 작은 복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그와 같이 同一한 行爲를 했더라도 보는 다르게 받게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業이란 行爲를 意味하고요, 우리가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것이 業報의 法則입니다. 業을 내보내면 報가 끌어당겨진다는 그런 가르침이죠. 業은 行爲이고고 業의 種類는 몸의 行爲 말의 行爲 生覺의 行爲, 그러니까 세 가지가 있다는 거죠. 身口意 三業이라고 합니다. 業의 結果를 業報라고 하는데 이건 行爲에 따른 結果를 얘기하고요. 어떤 業을 짓느냐에 따라서 그 結果가 끌어당겨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거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一切唯心造의 가르침과 같은데요, 화엄경에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는다. 법구경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화엄경에 나와요.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現實이라는 도화지위에 마음먹은 대로 삶을 그려낼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깨끗한 하얀색 도와지 위에 마음먹은 대로 말과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 삶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黃金律의 法則이라고 해서 待接받고 싶은 데로 相對를 待接해줘라. 라고 했다고 하죠. 예수님의 어떤 황금률의 법칙도 이와 같은 어떤 끌어당김의 法則, 因果의 法則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처럼 수도 없이 많은 어떤 宗敎 思想 哲學에서 因果應報의 가르침은 公平하게 說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따라서 내보내는 것이 바로 끌어당겨지는 것을 결정하는 거죠. 상대방을 向해서 욕을 많이 하게 되면, 내가 언젠가 욕을 얻어 먹 게 되겠고, 돈을 많이 베풀게 되면 언젠가 돈이 생겨나겠죠. 예를 들어 밑에 사람을 괴롭혔다. 그럼 나도 언젠가 윗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는 狀況이 造成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조금 전에 우리 어린이법회 아이들 몇 명 와서 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아이들이 제가 처음에 아이들을 만났을 때는요, 예전에 어린이 법회 처음에 할 때 만났을 때, 아이들이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자유롭다보니까 이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靈魂들이라 그 자리에 앉아있는데 이게 10명만 앉아있어도 제가 정신이 없습니다. 10명이 동시에 질문을 해요. 동시에 하니까, 야, 하나 얘기를 해주면 집중이 안 되고 딴 얘기를 막 해서. 야, 이 아이들과 어떻게 법회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때 한동안은요, 어린이 법회 때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 힘들었었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이 아이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면 이 아이들이 당연히 이해를 못할 거라고 저는 착각을 하고 살았어요. 한 동안. 그런데 아까도 마찬가지에요. 아까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가 이야기하는데,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아니?
<!--[if !supportEmptyParas]--> <!--[endif]--> 因果應報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고 輪回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데요, 아이들이 너무 놀랍게도 集中力이 너무나도 뛰어나게 집중을 하면서 내가 그러면 저의 아빠나 엄마가, 또 내가 어떻게 돼서 이렇게 나왔는지. 그리고 내가 앞에 있는 이 형하고 도대체 전생에 어떤 관계로 만났는지 내가 앞으로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놀랍게 집중력을 너무나도 집중을 하면서 새롭게 새롭게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질문들이 하나하나 인과응보에 대해서 얘기해주고 났더니 그 질문을 하는 것이요, 한명도 빼놓지 않고 전부다 하나같이 질문을 하는데 학교에서 나는 누구랑 뭐했고, 또 누구랑 언젠 어땠고, 작년엔 누구랑 싸웠고, 이건 나 어떻게 될까요? 그럼 옛날에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데 앞으로 난 어떻게 될까요? 참회하면 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부처님께 가서 3배 올리고 부처님께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 자기 자기 자신을 용서해주고 할 수 있겠니? 그랬더니 할 수 있다. 절을 가르쳐주고 나서, 절을 하면서 그렇게 다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거 한 15분 얘기를 해주려고 그랬는데, 20분 이상 계속 질문이 와서. 이게 뭐 정말 그 어떤 토론, 사실 신도님들과 토론을 하면 이렇게 활발한 토론이 잘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신도님들은 질문을 할 때 아상이 있어서 내가 이 질문하면 남들이 좀 우습게보지 않을까? 이게 너무 수준 낮은 질문 아닐까? 온갖 상에 빠지잖아요. 아이들은 그런 게 없어요. 그냥 막 물어보는 겁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누구에게나 놀라울 수밖에 없는 이런 가르침들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리고 우리 삶을 直接的으로 變化시키게 만드는 가르침이죠. 그래서 누군가를 幸福하게 해주면 나도 행복해 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과 생각과 행동이죠. 그래서 남들에게 받고 싶은 말이 있다면 먼저 말해라. 하는 거죠. 칭찬받고 싶으면 먼저 칭찬해주는 演習을 자꾸 해야 되는 거예요. 자꾸 딴지거는 演習을 하지 않고, 보면은 항상 무엇을 봐도 거기에 판단하고,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하고, 옳고 그른지 판단해서, 늘 判斷이 習慣이 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내 어떤 意識이 그냥 저절로 判斷부터 하는 겁니다. 이게 옳으냐? 틀리느냐? 그런데 그런 어떤 마음을 가지고선 부처님 가르침에 완전히 들어가기가 어렵겠죠. 또 격려 받고 싶으면 먼저 격려해주고 지지받고 싶으면 먼저 지지해주고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을 해주는 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또 남에게 받고 싶은 行動이 있다면 먼저 하라는 거죠. 내가 도움 받고 싶으면 먼저 도와줘야 되고, 남편이 집에 갔는데 집안이 좀 지저분하다. 그럼 내가 먼저 청소하고. 부대 갔는데 부대 내무반이 지저분하다. 아이들한테 뭐하라고 할 것 없이 내가 먼저 청소하고, 그러면 저절로 깨끗해지겠죠. 또 베풀면 내가 베풂을 받겠고 대접을 해두면 대접받게 되겠죠. 진급하고 싶다. 그러면 사실은 남들을 진급할 수 있게 도와줘야 됩니다. 내가 성적이 좋아지고 싶다. 그러면 남들 성적 좋아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됩니다. 그러니까 단기간에 보면 내가 우리 신도들이 얘기를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내가 성적을 잘 받아야 되는데, 남들이 너의 엑기스 적어놓은 거 있으면 줘. 이랬을 때 의리로서는 주고 싶은데 이걸 주면 얘가 나보다 성적 더 좋아지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겠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잠깐은 잠깐 어쩌면 중간고사도 게보다 못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더 크게 봤을 때 이 우주법계가 나를 후하게 점수를 매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그래서 내가 받고 싶은 게 있다면 남들이 그것이 되도록 먼저 도와주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그것을 도와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응보를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높으신 계급이라든가 높으신 지위에 있으신 분들은 밑에 사람들을 부하처럼 막 시키는 걸 演習을 하잖아요. 밑에 사람 대하듯이 막 시키는 演習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마음속에 뭐가 演習 되냐 하면 자꾸 시키고 남들을 부하처럼 부리는 演習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높은 자리에 못 올라가게 되고, 부림을 받는 자리에 가게 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니까 더 높은 자리에 못 올라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 밑에 사람을 오히려 더 떠받들어주고 더 사랑해주고 더 높여 주면 어떻겠어요? 세상 사람들을 높여주게 되니까 세상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저절로 올라갈 수가 있겠죠. 그래서 내가 밑에 사람처럼 사람들을 대하면 내가 낮아지게 되요. 남들을 더 높여주고 사랑해주고 하게 되면 내가 더불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南便들이 아내를 公主처럼 女王처럼 대하면 本人도 王이 된다. 이런 좋은 말이 있듯이 거사님들은 그냥 표정에 변화가 없으신데, 보살님들은 다들 활짝 웃으시네요. 그런데 더 重要한 것은 말과 行動보다 그것보다 먼저 生覺을 바꿔야 됩니다. 生覺이 가장 重要한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生覺을 가장 쉽게 生覺하거든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生覺은 生覺을 바꾼다고 뭐가 되겠어? 行動을 바꿔야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生覺을 먼저 바꿀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먼저 慈悲를 베풀면 자비를 받게 되겠고,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고, 먼저 마음속으로 감사하는 演習을 하면 감사할 만한 일들이 계속해서 생길 수밖에 없어요. 내가 건강하고 싶은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불평불만 할 게 아니라. 그나마 다른 부분이 건강한 것에 대해서 크게 感謝면 더 감사할만한 일이 생겨서 건강이 점점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인관계가 좀 부족하다. 그러면 그나마 내가 대인관계 잘하는 부분에 대해서 감사해 해야 대인관계가 더 좋아지겠죠? 내가 不足한 部分을 오히려 더 感謝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걸 불평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不評不滿 하는 것은 불평불만이 더 지속되지만 내가 感謝하는 부분은 感謝하는 게 더 생겨납니다. 그래서 지금의 위치, 지금의 지위에 감사하면 더 높은 지위도 갈 수 있고, 지금의 재정 경제력에 감사하면 더 많은 돈을 벌게 되겠죠. 그래서 나중에 말씀 또 드리겠지만,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감사와 사랑의 호흡명상을 꾸준히 하시게 되면, 감사와 사랑으로 아주 근원적인 에너지로 삶이 넘쳐나게 됩니다. 어떤 보살님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병원을 계속해서 다니는데 아무리 약을 먹고 먹어도 본질적으로 낫지가 않더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아파지더래요. 구체적인 어떤 수행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가 어느 부분이 목이라든가 등뼈라든가 어깨라든가 이런 데가 계속 아픈데 너무 심각하게 아프다는 거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병원 가서 약을 먹어도 아무래도 안 낫는다는 거죠. 그래서 그분께 이 말씀 드렸거든요. 수용과 용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그 아픈 부분을 지켜보면서 온 마음을 다해서 “아, 이것을 거부하지 않고 受容합니다.” 하고 이것이 있었던 것은 분명히 原因이 있는데 원인이 뭔지 모르지만, “그 原因에 대해서 容恕해 줍니다.” 하고 오히려 이 정도밖에 아닌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렇게 목이 그나마 붙어 있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고, 그리고 이것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병에 대해서 수용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해서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아픈 부분에 계속해서 4가지 진언을 계속 말을 해주고 진심으로 그 말의 단어를 느껴보도록 하십시오. 하고 말씀드렸더니.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 일주일동안 그걸 열심히 하시고 나서 와서 하시는 말씀이 병원 약을 딱 뗐는데도 불구하고 훨씬 직접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좋아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처음에 이거 할 때는 어떤 단어에서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하는데, 그 중에 어떤 특정 단어에서 온몸이 찌릿찌릿 떨리면서 부들부들 떨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부분이 이렇게 감동이 느껴지고 그러더라는 거죠. 이거는 자기가 몸에 어떤 안 좋은 부분이 있을 때 수용합니다. 容恕합니다. 感謝합니다. 사랑합니다. 해서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 또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하게 됐을 때 그 부분이 놀랍게 좋아집니다. 남들과 對人關係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처받은 그 마음에다 대고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반복했을 때 놀랍게 그 부분의 응어리가 풀려나가게 됩니다. 우린 내면에 있는 응어리만 풀리면 바깥에 있는 외부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내면에 투영이 바깥세상이기 때문에 남편의 성격이 나빠서 아내가 성격이 나빠서 남들이 성격 나빠서 이 문제가 생기는 게 결코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응어리가 있으니까 그것과 비슷한 外部世界를 만났을 때 과격하게 내가 反應을 하게 되는 것뿐이거든요. 그래서 內面을 淨化시키게 되면 內面이 맑고 淸淨해 지면 外部世界가 저절로 아름다워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짓을 하는데 옛날에는 재수 없게 느껴졌는데, 자기 마음공부가 되면 그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해요. 그게 수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거조차 아름다워지기 시작을 하는 것이죠. 요거 영상하나 보겠습니다. 말의 힘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데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예.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그냥 단지 그 단어를 보고 종합하고 했을 뿐이기만 한데도 불구하고 행동의 변화가 나도 모르게 나타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평소에 많이 접하는지. 또 하다못해 TV프로를 선택할 때도 영화한편을 볼 때도 어떤 영화를 주로 좋아하는지. 예를 들어 폭력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도 모르게 닮아가게 됩니다. 저절로.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거죠. 어떤 말의 습관 또 행동의 습관 어떤 취미취향의 습관. 이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 적으로 그냥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영향을 우리 삶에 미치고 있었던 거죠. 영화 한편을 우연하고 보고, TV한편을 우연하고 듣고, 말 한마디 하는 어떤 습관들이 나의 삶을 사실은 엄청나게 規定짓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전혀 意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래서 말 한마디 할 때 아까 말했던 것처럼 말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만 얘기했지만, 말과 생각과 행동의 힘, 모두가 너무나도 우리가 想像하는 것보다 훨씬 더 强力하게 無意識的으로 우리를 支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恒常 이렇게 말의 選擇을 하거나 이럴 때 될 수 있으면 하여간 肯定的이고 밝고 에너지 넘치는. 여러분이 법당에 와서 설법을 한 번 듣는다. 이게 그냥 어찌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한번 왔다가 가는 그 자체가 엄청난 삶의 變化를 저절로 가져오거든요. 그러나 스스로는 느끼지 못할지라도 사실 內面에서는 큰 變化가 있게 됩니다. 이런 어떤 이야기들을 듣고 反復해서 듣고 했을 때 놀라운 어떤 變化들이 분명하게 생길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여기까지 **을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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