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은(1854년) 미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이 땅(오늘의 시애틀 지역)을 팔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자 그에 대한 답글인데 이 문건은 美國獨立 200주년을 기념한 '古文書秘密解除'로 120年 만에 世上에 햇볕을 보게 되었다.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 감복한 나머지 이 지역을 '시애틀'이라고 명명했으니 캐나다 接境都市 太平洋 연안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시애틀 市>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 -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1854년)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部族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연어 떼를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올해의 첫 연어 떼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主된 食糧이기 때문에 연어 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 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일은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 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戰鬪를 벌이려고 온 것으로 生覺하지 말아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大地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大地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建物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幸福한가? 연어 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幸福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幸福한 것인가?
워싱턴의 대추장(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그의 部族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部族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白人 대추장은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提意를 하며
우리에게는 아무런 不便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考慮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白人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溫氣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生覺이다. 空氣의 新鮮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所有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部分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記憶과 經驗 속에서는 神性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水液은 우리들 黃色人(혹은 붉은 얼굴)의 記憶을 실어 나른다.
白人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忘覺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黃色人들에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部分이고 땅은 우리의 한 部分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형제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잎의 수액, 조랑말과 人間의 體溫 모두가 한 家族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考慮해 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江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祖上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記憶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湖水의 맑은 물 속에 비췬 神靈스러운 모습들 하나 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記憶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소리이다. 江은 우리의 兄弟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子息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江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兄弟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들에게 하듯 江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山 안개가 달아나듯이 黃色人은 白人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祖上들의 幽骨은 神性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神性한 것이다. 白人은 우리의 方式을 理解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白人에게는 땅의 한 部分이 다른 部分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必要한 것을 빼앗아 가는 異邦人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들에게 兄弟가 아니라 敵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白人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權理는 잊혀지고 만다. 白人은 어머니인 大地와 兄弟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對한다. 白人의 食慾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方式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 都市의 모습은 黃色人의 눈에 苦痛을 준다. 白人의 都市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날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나는 黃色人이라서 理解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萬物이 숨결을 나누고 있음으로 空氣는 黃色人에게 所重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人間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白人은 자기가 숨쉬는 空氣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은 惡臭에 無感覺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空氣가 所重하고,
또한 空氣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生命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事實을 그대들은 記憶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生命의 氣運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白人들도 들꽃들로 香氣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神性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考慮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條件이 있다. 卽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生覺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氣車에서 白人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들이었다. 煙氣를 뿜어대는 鐵馬가 우리가 오직 生存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重要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未開人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世上에서 人間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人間은 靈魂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人間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萬物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이 온 以後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大地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豊饒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삭막한 곳일 따름이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祖上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尊敬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種族의 삶들로 充滿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땅을 우리 어머니라고 가르쳐 주라.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自身들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人間에게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萬物은 마치 한 家族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人間은 生命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自身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種族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 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平和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餘生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重要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敗排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戰士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肉身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重要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날도 남아있지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偉大한 部族의 子息들 中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部族의 滅亡을 슬퍼해야 하는가? 部族이란 人間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以上은 아니다. 人間들은 바다의 波濤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다. 自己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白人들조차도 이 共通된 運命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白人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所有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所有하고 있다고 生覺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不可能한 일이다.
하느님은 人間의 하느님이며 그의 慈悲로움은 黃色人에게나 白人에게나 꼭 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所重한 것이므로 땅을 害치는 것은 創造主에 대한 모욕이다. 白人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種族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滅亡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特別한 目的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黃色人을 支配할 權限을 許諾해 준 하느님에 依해 그대들은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不可思議한 神秘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殺肉되고 野生馬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人間들의 냄새로 가득 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 (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숲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作別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始作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考慮해 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同意한다면 그대들이 約束한 保護區域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은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黃色人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記憶될 때라도, 산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白性의 靈魂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2011년도 半은 지나간 지금.... 이 인디안추장의 연설문은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바가 아주 크다.. 사대강 개발이 불러온 재앙....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들... 그냥 .. 그대로 두지.. 무엇이 발전이고 ..무엇이 건설이란 말인가? 開發利益으로 관계된 富者들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서민들은 엥겔지수가 높아져 質 떨어진 生活에 허덕인다.. 입에 풀칠이 우선이니 말이다.....
위력있는 태풍과 도처에...지진과 화산 폭발.. 속빈 강정의 시대가 도래할것 같다...
아니..... 벌써 눈앞에 도달했다. 여지껏 목숨부지하고 살아온 나날이 대견하다...
그래도 ....
내일 地球의 終末이 온다해도 나는 한구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心情으로 살아야한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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