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추석 소묘(秋夕 素描)

장백산-1 2013. 9. 17. 20:17

 

 

추석 소묘(素描)

 

황주홍(민주당, 전남 장흥강진영암)

 

나는 김환기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푸른색과 밤과 孤獨을 좋아한다.

바닷가에 사슴 한 마리 있고, 그 뒤로 하얀 달이 떠있는 그 푸른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

 

내가 만약 畵家였다면 나는 아마 계속 밤하늘만을 그렸을 것이다. 초저녁 밤, 깊은 밤, 새벽녘 밤의 하늘들은 같은 푸른색이지만, 그 明度가 다 다르다. 초승달이 있는 밤하늘, 보름달의 밤하늘, 하현의 밤하늘과

칠흑 같은 그믐날의 밤하늘이 다 같지만, 다 다른 푸른색들이다.

 

빈센트 반 고흐도 빈번히 밤하늘의 푸른색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 했다. 밤하늘의 온갖 별들이 地上으로

쏟아지는 것 같은 祝祭의 밤을 표현하고 싶어 그는 자주 밤을 기다렸다. 돈 맥클린이 부른 팝송 빈센트(Vincent)를 들으면 무수한 별들이 일제히 멀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밤하늘의 孤寂함이 마치 波濤처럼 가슴으로 밀려오는 느낌을 받는다. 밤하늘의 푸른색들은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靑色, 暗靑色,

明靑色, 灰靑色, 眞靑色, 赤靑色, 黑靑色, 葛靑色 ……等으로 여럿이고 다 다르다. 그러면서 또 다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달밤을 좋아했다. 달밤은 神秘로웠다. 특히 보름달을 좋아했다. 보름달이 지나가고 나면 가끔, 나의 時間과 나의 季節과 나의 希望이 차츰 이지러져가는 느낌조차 받곤 했다. 음력 초사흘, 나흘께부터는 초저녁부터 떠오르는 달을 보며 期待와 설렘과 힘찬 希望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보름달을 지나 점점 뒤늦은 밤하늘에 나타나는 잔월(殘月)들은 왠지 모르게 쓸쓸함과 허전함과 잃어버림을 象徵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國會議員이 되어 週中에는 주로 서울에서 생활하지만, 週末에는 매주 거의 한 번씩은 故鄕 地域區(영암, 장흥, 강진)를 찾게 된다. 그곳에는,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이미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진청색 하늘과 모래알처럼 수많은 별들과 날마다 조금씩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너무 맑아서 눈을 시리게 하는 달이 지금도 그대로 뜨고 지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내 生日을 쇠지 않았던 해가 쇘던 해보다 훨씬 많았다. 내 생일날 미역국을 챙겨 먹어보지 못했던 아침이 훨씬 더 많았다. 내 생일이라고, 내 생일이 임박했다고 누군가에게 한번도 환기시켜보지 않았다. 아마 내 性格 탓이랄까 趣向 탓일 터인데, 나는 어떤 일이나 어떤 날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이렇게 저렇게 記憶하고 追念하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鬪病 중이신 어머니에 대해서도 生存해 계시는 동안 극진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49재니 祭祀니 하는 것이 무슨 큰 意味가 있는 것이냐는 식으로 나는 慣習과 規範에 약간의 抵抗感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추석이니 설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복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니 한복을 입어본 역사도 없다. 한복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잠옷이란 걸 한 번도 가져본 적도 입어본 적도 없다. 일과 후 집에 들어와서도 면바지로 갈아입거나 반바지로 갈아입고 일하거나 서류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편이다. 잠자리에 들 때 잠옷 입고, 설날 같은 명절에 한복 입고, 국회의원 되어 금배지 달고, 이런 일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내가 왜 그런 의미에 붙들려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거 같고, 그런 의식(儀式)에 대한 일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내가 추석에 대한 특별 소회를 글로 옮긴다는 게 좀 그렇다. 소재도 상대적으로 궁할 수 밖에 없겠다. 물론 내게도 다른 이들처럼 歸省도 하고, 송편도 빚고, 형제 친척들과 더불어 선산에 성묘도 가고 했던, 그런 共有의 經驗들이 있긴 하다.

 

, 그렇다면 내게 추석은?

그렇다. 추석은 내게 하나의 명절, 달력에 붉은색으로 표시되는 국경일의 하나가 아니다. 추석은 그 이상이다. 훨씬 그 이상이다. 추석은 잿빛 都灰의 가 共同體的 우리, 그것도 不滅의 우리, 되는 神話的 契機인 거다.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

 

故鄕과 故鄕의 들바람과 산바람과 바닷바람과 밤하늘과 어머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묘소와 노랗게 물든 故鄕 땅의 논에서 풍겨오는 벼이삭 냄새와 무언가 많은 것을 속삭이듯 귀띔해주는 저 아름다운 보름날 밤의 만월(滿月)이 있기 때문에 추석은 추석일 수 있다.

 

매년 음력 8월 보름 한가위 前夜에 이르면 메마르고 삭막한 首道 서울에서 먼지에 오염에 찌들고, 끝없는 競爭에서 傷處받고 敗北하고, 非情한 도회의 삶에 대한 不滿으로 지칠대로 지친 自身을 간신히 부여안고 우리는 고속버스나 KTX에 몸을 싣고 故鄕으로 歸省한다. 아아, 故鄕이 가까워지면, 그것이 새벽녘이건 저녁 무렵이건 또는 한낮이건 상관없이, 肺腑를 찌르는 바람의 깊이와 눈동자에 드리운 달빛의 길이가 벌써 다르다. 흙빛과 흙냄새가 틀리다. 풀벌레 소리조차 다르구나. 논밭의 穀物들이 내뿜고 있는 五穀의 香氣가 우리를, 핏발선 우리를, 서서히 소리없이 무장해제시킨다. 故鄕에 닿는 瞬間, 주름 투성이 어머니의 야위어진 손을 마주잡고 새처럼 작아진 어머니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순간, 서울에서의 모든 관등 성명이 내려지고, 우리는 수십 년 전의 초등학교 2, 3학년짜리 까까머리 소년 소녀가 된다.

 

고단한 우리 人生이 그래도 無價値하지 않은 건 두 개의 祝福 때문일지 모른다. 어머니와 故鄕은 우리 人生의 거룩한 祝福이다. 우리들 모두는 어머니를 갖고 있고, 또 우리 모두는 故鄕을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와 고향은 서로 다르면서 서로 같은 하나이다. 어머니와 고향은 우리로 하여금 純情의 童心을 想起하게 하고, 우리를 마냥 받아들여주고, 우리의 틀림과 잘못까지도 보듬어준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永遠한 피안(彼岸)處이며 回歸船일 것이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의 主人公들은 쪽빛 바다 물결 출렁이는 남쪽나라 故鄕을 떠나 돈과 權力과 일자리가 있던 한강 주변으로 불나방처럼 몰려와 싸우고 속이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올라가고 무너지고, 죽으며 살아갔었다. 주인공 유일민 유일표 두 형제도 시련과 고난의 타관살이를 하지만, 그들을 붙들어주었던 건 남쪽 故鄕 땅의 흙과 어머니였었다. 開發年代 서울의 非情함과 非人間性에 무릎 꿇지 않고 근근했지만

그들이 풀잎처럼 일어나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故鄕과 어머니의 힘이었다.

 

우리 모두는 타관에서 짐승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故鄕에 내려와 논밭 이랑과 푸른 밤하늘과 보름달 아래서 비로소 사람이 된다. 도회의 동물로 살던 모두는 故鄕과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하나의 人間이 된다.

나에게 있어서 한가위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스카보로 페어(Scarborough Fair)의 스카보로다. 명절을 맞은 스카보로에 가게 되면, 故鄕의 밭작물과 논작물 말고도 그 옛날 사랑을 나누었던 소녀와 그 소녀가 함께 걷고 싶어 했고 함께 있고 싶어 했던 이곳 저곳들이 지금도 그대로 있을지 모른다는 설레임과 기대감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마음으로 다 각자의 스카보로를 찾아 귀성열차에 몸을 싣는게 아닐까.

 

미당 서정주의 시에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뒷산에서 노루들이 종일 울었네.” 라는 구절이 있다. 어디 노루들만이랴. 추석 전날 달밤에는 산새들도 울고, 벼이삭도 울고, 뒷 냇가 은어도 울고, 옛날 우리 동네 아름다웠던 누나들 선남선녀들도 웃고 울고, 우리 집 외양간의 어미 소도 음메 음메 울었다. 그 울음들이 내 가슴에 냇가를 이루며 도회의 잿빛과 힘겨움과 살벌함과 無情함과 殺氣등등함을 마치 소나기처럼 깨끗이 씻어내 준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故鄕에서 새 사람으로 모두 거듭 태어난다.

 

秋夕은 歸還이다. 낯선 곳으로부터 낯익은 곳으로의 歸還이다. 故鄕 뒷산에서 밤송이가 떨어진다. 가을이다. 가봐야겠다. 어딘가로 나가봐야겠다. 멀어져가는 여름의 뒷모습에 작별을 고하고, 사라져 가버리는 우리들의 젊은 날의 뒷모습에 아쉬워하면서 우리는 故鄕에서 어머니를 들여다보며 나를 저 들녘으로 나들이 시킨다. 그러면서 나를 되돌아본다. 우리가 일년에 한 두 번 어머니와 故鄕의 품에 잠시 안겨본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꺼이 저 무시무시한 無限競爭의 도회로 다시 나아갈 勇氣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故鄕과 어머니 품에서 아늑해진 이들이 다시 歸京해서 바빠진 서울은 귀성 전의 서울과는 質的으로 판이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만약 우리에게 귀성 또는 귀향이라는 이 피정의식(避靜儀式)이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지난 해 초여름 아흔 두 해 서리꽃 피워내신 불사조같던 우리 어머니가 腦出血로 쓰러지셨다. 여태 후유증을 克復하지 못하고 몇 개월째 意識不明 狀態에 있다. 작년 秋夕 때 난 어머니 곁에 있었다. 91세의 어머니는 비교적 건강하셨고, 나를 무던히도 사랑해주셨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행복해하셨다. 이번 추석에 나는 그런 어머니를 더 이상 갖지 못한다. 지금 어머니는 가을이 오고 있는 것도, 논에서 벼가 익어가고 있는 것도, 추석이 내일 모레인 것도, 밤하늘의 달이 滿月을 향해 서럽도록 아름답게 中天 하늘에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病床에 누워계신다. 어머니가 절반쯤 부재인 상태의 추석은 나로선 初有의 經驗이 된다. 아 아, 다 그런 것이다. 人生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무엇이 永遠할 수 있겠는가. 우리 어머니인들 어찌 生老病死에서 自由로우실 수 있겠는가 말이다.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뜨신 집안의 한 堂叔께서는 落葉은 귀근(歸根)”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은 結局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일 텐데, 당숙께서는 모든 이는 죽어 땅에 묻히고, 그렇게 해서 故鄕의 一員이 되는 거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故鄕에서 나서 平生을 故鄕에서 살다 가신 당숙께서도 故鄕 마을 앞산에 누워계시는 큰 형님도 이제 故鄕이 되셨고, 저 남호리 선산에 누워계시는 조부님도 증조부님도 落葉처럼 故鄕이 되었다고 얘기하셨다.

 

29세의 어머니도 어머니이고, 92세의 어머니도 어머니이고, 병상의 어머니도 어머니이고, 설사 돌아가계신 저 산 속의 어머니도 永遠히 어머니이고, 그리고 모두 故鄕의 一部이다. 故鄕에서 모든 生命들은 不滅이다. 내 記憶 속에서 내 가슴 속에서 내 追憶 속에서 어머니는 不滅이다. 어머니는 故鄕 땅 위에서 永遠하고, 故鄕 땅 밑에 누워서 永遠하다. 서울의 삶에서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永遠한 故鄕과 永遠한 어머니의 품에서 永遠히 少年과 少女가 된다. 나이든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운동장에서 볼 하나를 놓고 열 명 스무 명이 떼지어 뛰어다니며 넘어지고 쓰러지고 흙먼지로 뒤범벅되었던 그 시절의 흑백 스틸 사진 속에서 우리들은 하얀 이를 내놓으며 깔깔대며 항상 웃고 있다.

 

秋夕은 瞬間에서 永遠으로의 歸還이다. 곧 窒息해서 죽어갈 것처럼 헐떡헐떡하던 人生들이 어느 푸른 달 밤 故鄕 품으로 歸還해서 不滅의 아늑함을 느끼는 곳, 故鄕 땅 그곳이 바로 秋夕이다. 바로 지금은 그 한가위 짙푸른 밤하늘 속 휘영청 떠오르는 보름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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