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命이란 因이 연(緣)을 만나 運行하게 되는 現狀]
10조 9만 5천 48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에 관한 연구와 번역을
17년을 두고 지속해 오다가 지난 1974년에 완간(完刊)을 보았다.
이런 나를 두고 혹시 건강에 문제가 없는지 평소에 어떻게 섭생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섭생은 하지 않는다. 내가 健康을 유지하는 길이라곤 딱 한 가지뿐이다.
卽, 生命의 본처(本處) 자리로 恒常 나를 귀경(歸竟)시키고자 하는 努力이 있을 뿐이다.
이때 努力이란 사방에 神經을 안 쓰는 것이다. 즉 神經을 쓰면서도 안 쓰는 도리가 있을 뿐이다.
生命의 本體 本處 자리는 무형(無形), 卽 時空이 끊긴 자리다.
生命의 本體 本處 자리는 無形이지만,
그 無形인 生命의 本體 本處 자리의 本質인 씨(因)이
四大[地大 水大 火大 風大]의 연(緣)을 만나 運行하게 되는 現狀이 生命이다.
그렇다면 生命의 具體的 表象은 곧 이 肉體를 집으로 하여 아(我; 소아)로 나타나는 것일 텐데,
이것 我를 어떻게 올바르게 運行해야 할까?
답은 한 가지, 有我가 무아(無我)가 되는 길뿐이다.
無我가 되지 못하고 유아(有我)일 때 본명(本命)의 本處 자리에서 離脫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苦가 생기고 아픔이 일어난다.
道란 無我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다.
따라서 無我가 될 때만이 緣을 自由自在로 요리할 수가 있다.
어떤 生命이나 일이 되었든 착수했다면 한 번은 끝나게 되어 있다.
조그만 세사(世事)조차도 착수한 일은 끝을 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대사(一大事)인 無我가 되는 일에 착수해 놓고 끝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肉體를 갖고 世上에 온 生命이 無數할 텐데,
과연 이 수많은 生命 가운데 無我를 이루어 生命의 본처(本處)로 歸還한 개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고작 聖人 몇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理由는 어디에 있는가?
모두 有我로 머무르다 끝나기 때문이다.
有我에 執着해서 꿈속에 빠져 지내므로 凡夫로 떠돈다.
그러다 보니 계속 輪廻하고 業(有爲行)을 지어 生命의 本體를 忘覺하고 헤매게 된다.
우리는 ‘衆生’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을 알아야 한다.
有我로서는 因緣을 만나야 조금이라도 運行을 할 수 있지만,
無我가 되면 因緣 그 自體를 마음대로 運行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無智한 衆生인 까닭에 無我의 길에서 恒常 離脫하고 만다.
그렇다면 중생의 일생은 항상 헛되이 그치고 마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마는 않다. 無我이고자 하는 努力은
비록 이번 生에 道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來生을 위한 씨앗(因)이 되기 때문이다.
人生을 臨終 演習이라거나 涅槃 演習이라고 生覺하는 사람들이 있다.
結局 되는 대로 살아 버린 人生, 卽 自我의 擴張이나 出世
혹은 物質의 蓄積에만 매료되어 살고 있는 인생은 虛無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대신 우리는 마음工夫를 해야 한다.
分明히 밝히지만 工夫를 한다는 것은 결코 헛된 演習이 아니다.
當代에 無我가 되자는 發心을 해야 한다.
無我의 境地를 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혹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工夫를 한다는 것은 결코 不必要한 演習이 아니다.
工夫는 분명히 來生의 훨씬 뛰어난 씨앗(原因)을 짓는 인(因)이 될 테니 말이다.
이 道의 자리는 모든 사람이 同一한 모습은 아니다.
道의 자리만큼 階級이 細密한 데도 없다.
無我의 境地를 보았다고 해서 行動이 함께 투철해지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無我를 보았다고 해도 힘에 있어서는 賢人을 당하지 못한다.
때때로 賢人이나 聖人도 시운(時運)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성인이나 현인도 현실적인 時流에 영합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다. 賢人이나 聖人은 어느 때나 늘 無我다.
오늘날 그 풀이가 잘못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無我는 時空의 本處인데 가당치 않은 말이다.
佛敎의 來世觀에서는 來世를 否定하면 現實도 없어야 한다고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오늘이 있으니 어제가 있었고 내일이 있고,
금년이 있으니 거년(去年)이 있었고, 내년이 있다.
현재가 있으니 과거가 있었고 미래가 있다는 緣起的인
삼세, 즉 삼세윤회설(三世輪回說)을 철두철미하게 말한 것이 불교다.
그래서 언제나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因果法則(原因과 結果의 法則)은 추호도 어김이 없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인과법칙을 現實의 한 면만 갖고 본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다.”
이 말은 현실만 가지고 교법을 세우기 때문에 현재에 받는 果가 조상이 쌓은 因에서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반면 불교의 인과법칙은 누가 주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自己가 짓고 自己가 받는 것이다.
즉, 果報는 있되 作者은 없는 것이다.
불교 경전 중 《인과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받는 것이 전생 일이고,
내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짓는 것이 내생 일이라.
이 구절에서처럼 내생의 문제는 금생에 지은 선이나 악을 생각해 보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전생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는 조상들 중에 누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생에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좀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하겠다.
탄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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