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반야심경 / 청화큰스님 강의

장백산-1 2014. 2. 4. 02:35

 

 

 

 

반야심경의 독해(청화큰스님 강의)

 

반야심경을 모르는 불자가 재가나 출가나 없을것입니다. 더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스님네들이야 더 말할 것 없이 숙달하신 내용이기 때문에 새삼스럽세 해설할 필요도 없겠으니, 금타스님의 심경번역은 누구나가 꼭 살펴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이나 중국, 일본을 통해서 반야심경의 번역이나 주석이 100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훌륭한 강백이 해설했다는 것도 상당한 오류가 있습니다. 곧 般若思想의 當體卽空의 道理를 제대로 說把를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꼭 參禪만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법문은 大道無門이기 때문에 을 볼 때나 또는 祈禱나 呪文이나 念佛이나 우리 마음자세가 本體인 本來面目 자리를 안여읜다면 모두가 다 참다운 공부가 되고 바로 참선과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을 보아도 정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본다면 간경자 혜안통투라, 혜안이 통해서 공부가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참선수행자라 하더라도 경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결제하면 볼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해제한 뒤에는 조사어록이라든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요한 경전을 보는 것은 크게 조도가 됩니다. 게으름 부리다가도 法門 말씀 한마디에 뜨끔하니 심기일전해서 마음에 사무친 경책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心經은 본사 석가모니불께서 사리불에게 하신 수도법문입니다. 경문만 한번 읽고 다음에는 보다 세밀히 읽기 위해서 토를 붙여서 음독하고 다음에는 새기면서 읽고 다음에는 조금 더 풀이해서 뜻을 헤아리고 제 5에는 현토의 음독과 제 4의 약해의 해독도 아울러서 읽어가다가 제 6에는 훈독과 제 4의 해독을 같이 아울러서 읽어가게 되면 점차로 뜻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제 7에는 읽지도않고 뜻만 살피고서, 우리가 경을 볼때도 소리를 안내고 가만히 참선하는 자세로 비추어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8은 모두를 다 뜻만으로 해석하고 9에는 관해로 비추어보고 제 10에는 묵조해서 비추어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읽다보면 결국은 독서백번 意自通이라. 스스로 통한다고 하듯이 처음에는 건성이라 하더라도 자꾸만 읽어가다보면 성인의 말씀이기 때문에 또는 우리 마음이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점차로 자기마음이 밝아져 불성과 걸맞은 여법한 믿음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실한 신의 신만 곧, 여실한 믿음이 원만해진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별로 깊지않은 옅은 맏음이겠습니다만, 諸法이 空한 道理를 直說로 說把한 法門은 착실하게 보면볼수록 더욱더 에 사무치게 되어 신앙심을 깊게해줍니다.

 

법에 주하여 여법한 해석이 원만해짐으로써 여실한 수행이 되고 여실한 수행이 원만함으로써 실증하는 것이니 우리몸으로 증하고 마음으로 깨닫는 신증심오는 원래 둘이 아닙니다. 마땅히 참다운 깨달음은 마음도 깨닫고 몸도 아울러 증명이 되어서 우리 몸도 俗化된, 物質化된 所造四大가 純粹한 四大인 能造四大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換骨脫胎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生理와 心理가 바꿔진다는 말입니다. 증만 곧 원만한 증득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般若心經의 略解를 보겠습니다.

 

관자재의 보살이

삼신 사지에 만덕을 구비한 일대인의 대자재경을 관찰하는 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심밀의 정지로써 피안에 도하는 법을 수행할 시에

조견오온개공하야

먼저 망정으로 임의분별하든 색법인 색온과 심법인 수상행식의 사온은 일즉히 假相假名으로서

名相이 本空일새 五蘊의 皆空함을 照見하야

도일체고액이니

생로병사의 사고를 주로한 일체고액의 고해를 도하나니

 

어떤 경전이나 서분이 있고 정종분이 있고 유통분이 있습니다.

서분은 서론이요 본론이 정종분이고 결론은 유통분인 것입니다. 서분이라.

관자재의 보살이.

三身四肢에 모든 攻德을 구비한 일대인의 大自在境을 觀察하는 菩薩이.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과 같은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을 풀이하면 法身報身化身의 三身과 本來眞如佛性에 갖추어있는 智慧인 成所作智 妙觀察智 大圓鏡智 平等聖智의 無量한 智慧와 萬德을 갖추어있는 境界를 다 觀察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宇宙全切의 性稟과 現象을 조금도 빠짐없이 갖추어 볼 수 있는 보살이 이른바 觀世音菩薩이라는 말입니다. 보살이란 진리를 여법히 통찰하고 행하는 이를 말합니다.

 

다음에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심밀의, 깊고 비밀스러운 바른 지혜로써 피안에, 해탈의 언덕에 이르는 법을 수행할 때에.

조견오온개공하야. 먼저 妄情으로 이미 分別하던 色法인 色蘊과 心法인 受想行識의 四蘊은 일찍이 假相假名으로서 참다운 相도 아니고 참다운 이름도 아닌 명과상이 原來 空할새 五蘊이 다 空함을 비추어봐서 도일체고액이니. 생로병사를 주로 하는 일체고액의 고해를 제도하나니

 

정종분.

사리자야 색불이공이오 공불이색일새 색즉시공이오 공즉시색이라 수상행식도 역부여시니.

사리자야 色이란 空性의 如如相으로서 色體가 別有함이 아니오, 空體의 幻化일새

色이 空과 不二하고 空이 色과 不二하야 空 그대로 色이오 色 그대로 空이라 四蘊도 또한 그러하니

 

사리자야 시제법공의 상이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일새.

사리자야 이러한 오온의 諸法이 本空한 實相은 原來 生하였음이 아니니 滅하지 못하고

染垢하지 않았으니 洗淨하지 못하고 흠축없이 圓滿하니 增減하지 못할지라.

 

시고로 공중에 무색이라 무수상행식이니 무안이비설신의요 무색성향미촉법이오.

그러므로 諸法空의 實相엔 色이란 假相도 無하고 受想行識이란 假名도 無하니

眼耳鼻舌身意 六根도 無하고 六根枝末 無明이 無하니 色聲香味觸法 六塵도 無하며

 

무안계요 내지무의식계일새 무무명이라 역무노사진이며 무고집멸도니 무지라 역무득하야 이무소득일새 고로. 이미 육근 육진의 根塵이 無하니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 前五識의 所智境界도 無하고, 能智의 意識界도 無하야 無明이란 도시 本無할새 無明의 盡할 것도 無하며 따서서 行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生도 無할새 내지 老死의 盡할 것도 無하며 이와같이 三世의 苦果와 그 集因을 밝히신 十二枝의 因緣法이란 곧 五蘊法에 起한 者로서 實相에 本無할새 수도증멸할 것도 無하니 기상 오온법의 凡夫智와 십이인연법의 연각智와 사제법의 성문智 등 一切有爲法의 有漏智란 夢幻泡影을 계집함과 여하야 皆是虛妄일새 일체유루의 智가 無하고 따라서 有漏의 得도 無하며 生死有漏를 得할바가 無하므로

 

보리살타는 의반야바라밀다니 고로 심괘애요 무괘애고로 무유공포라 원리전도몽상하고 구경열반하나니 삼세제불도 의반야바라밀다고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시니라. 諸相의 無明運을 開하고 非相의 佛性일을 見하는 皆事는 無爲法의 無漏智로서 涅槃안에 度하는 法에 의하므로, 心에 유루의 괘애가 無하고 괘애가 無하므로 無明心의 極端인 死厄의 恐怖가 無해짐에 따라 일체의 전도몽상을 원리하고

열반에 구경하나니 삼세제불도 여차수행하여 무상보리를 증득하시나니라.

 

본론인 정종분에 사리자야 색불이공이오 공불이색일새 색즉시공이오 공즉시색이라.

사리자야 색이란 공성의 여여상으로서 색이 원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공성 그대로 因緣따라 그림자같은 相을 내었다는 말입니다. 즉 어떤 相이라도 眞理에 맞는 如法한 相입니다. 色이란

그 性稟이 空이라는 것이지 없던 것이 나오고 眞理에 안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色이든지, 무슨 物質이나 모두가 다 本體에서 본다면 眞如의 如法한 現象이라는 말입니다. 色體가 따로있음이 아니요, 空體에서 피어나오는 허깨비꽃, 허망한 그림자일새. 色과 空이 다르지 않고 空이 色과 다르지않아서 空 그대로 色이요 色 그대로 空이라, 分析한 뒤의 空이 아니라 바로 色卽空입니다. 色 그대로 空이요 또는 空 그대로 色입니다. 眞如佛性이 어떻게 바꾸어진다하더라도 變質이 되거나 變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같은 虛幻象이 象만 나툴뿐이기에 바로 卽空입니다/ 물리학자처럼 분자를 원자로 분석하듯이 분석한 뒤의 공은 석공이고 반야심경의 공은 卽空인 것입니다.

 

수상행식도 역부여시니. 4온도 또한 그러하니 수상행식도 역시 그와같이 卽空이라는 말입니다.

사리자야 시제법공의 상이. 사리자야 이러한 색수상행식 오온의 제법이 본래 공한 실상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일새. 原來 生하였음이 아니니 滅하지 못하고 (보통은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요 라고 번역합니다만 이런 풀이가 금타스님의 독특한 풀이입니다), 實相에서 洞察할 때는 原來 생겨나지 않았으니 멸할 것도 없고, 染垢되지 않았으니 원래 오염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염되게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보는 것입니다. 세정하지 못하고, 다시 씻을 필요가 없고.

흠축없이 원만하니 증감하지 못할지라. 아무 흠절이 없이 圓滿無缺하니 새삼 더하고 덜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고로 공중에 무색이라 무수상행식이니.

그러므로 제법공의 실상은 색이란 가상도 무하고 또는 수상행식이란 가명도 무하여 無明이란

假相假名의 總代名司로서 根本無明이 無하니, 그 無明이란 것은 結局 假相을 實相으로 보고

假名을 實際로 生覺하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까. 無明의 始初도 諸法의 相을 如實하게 보지못해서

無明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안이비설신의요 무색성향미촉법이요. 안이비설신의 6根도 無하고 지말무명인 6根이 無하니 또 6塵인

색성향미촉법도 無하며. 무안계요 내지 무의식계일새. 이미 6근과 6진이 무하니 前五識의 所智境界, 

卽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도 無하고 能智의, 能히 分別하는 意識界도 無하며.

 

무무명이라 역무무명진이며. 무명이란 도시 본래 없을새 무명을 다할 것도 없으며. 무무명 역무무명진의 풀이를 잘 새기십시오. 무명이란 본래 없으니 무명을 없앨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무명이 있어야 무명을 여읠 것이 있지않겠습니까.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이며. 따라서 行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生도 無할새. 반야심경에서 무명이나 내지 무노사는 十二因緣法을 引用한 것입니다. 原來 無明이 없으니 無明에서 派生되는 行이나

識이나 다 應當 없고 따라서 늙어서 죽는 것도 結局은 없다는 말입니다. 노사를 다할 것도 없다.

즉 노사가 없다고 하면 끊을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原來 無明이 없기 때문에 無明에서 派生된

十二因緣法의 十一枝가 있을 必要가 없습니다.

 

무고집멸도니. 無苦集滅道는 상당히 細密히 풀이가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삼세의 苦가 곧 삼악도나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六途는 苦의 果報입니다. 과거세에 지은 무명과 삼독심에서 업을 지은 고의 과라는 뜻입니다. 그 集因을 밝히신 十二枝의 因緣法이란 곧, 五蘊法에 根據한 것으로서 原來 實相에는 없기에 수도증멸할 것도 없다. 우리가 空을 미처 모를 때 이렇게 저렇게 分別하는 것이지 諸法空의 境界 곧 色도 空이요 또는 우리 마음 우리 觀念도 空이요 모두가 空이라는 道理를 안다면

四諦法門이 무슨 必要가 있겠습니까. 苦나 集이나 또는 滅이나 道나 모두가 色이 있고 心도 있는

데서 나온것이지 色과 心이 空하다면 이런 것이 어디에 붙어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지라 역무득하야 이무소득일새 고로. 이상 오온법의 범부지와 십이인연법의 연각지와 사제법의

성문지 등 일체유위법의 유루지란. 물론 부처님께서 아함경에서 오온법이나 십이인연법을

말씀하신 법문이 유루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문자로서는 색과 심을 설하고

本來 自性자리를 분명히 말씀한 것이 아니기에 아직 方便說이 되겠지요. 夢幻泡影 곧 꿈이나 허깨비나 또는 거품이나 그림자같이 虛妄한 것들을 執着함과 같이 모두가 한결같이 虛妄하니, 一切有漏의 智가 無하고 따라서 有漏의 得도 無하며 生死有漏를 得할 바 없으므로, 以無所得故 卽 아무런

所得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 되었다, 잘났다 또 무엇이든 많이 안다. 이런것도 結局은 때묻은 煩惱의 得이므로 얻을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生死輪廻할 까닭이 없다는 뜻입니다.

 

보리살타는 의반야바라밀다니 고로. 모든 象의 無明雲을 걷고서 象이 아닌 佛性 일을 見하는 皆事는, 개사는 살타보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을 여실히 아는 정도가 되면 벌써 보살지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空을 알면 대승초입이라. 대승에 입문하는 것이므로 般若를 모르면 대승이 못되는 것입니다. 無爲法의 無漏智로써 涅槃안에 이르는 法에 依하므로. 심무괘애요 무괘애고로 무유공포라 원리전도몽상하고 구경열반하나니. 마음에 유루의 괘애가, 유루의 그림자나 거리낌이 없고 괘애가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의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凡夫心은 潛在意識이나 現在意識이나 간에 모두가 다 죽음의 공포를 면하지 못합니다. 自己가 實際로 存在한다고 生覺할 때는 응당 죽음의 공포는 따르겠지요.

마음에 아직 번뇌가 남아있는 거리낌이 없어지고 또는 그런 거리낌이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거꾸로 보는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을 구경한다는 말입니다.

 

삼세제불도 의반야바라밀다고로 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시니라.

삼세제불도 이와같이 수행하여 무상보리를 증득하시나니라.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셨습니다. 따라서 五蘊이 皆空한 般若의 智慧를 떠나서 成佛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통분.

고지하라 반야바라밀다가 시대신주이며 시무상주며 시무등등주니 능제일체고요 진실불허라.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가 구경각까지 성취하는 妙不可思議의 大總詳法門이며 根/塵/識의 諸惑을 斷하고 寂滅을 證하니 道無極의 三明과 六通이 生하는 大方便이며 팔만장경을 독파하고 천칠백공안을 입증함보다 수승한 法이며 최상무비의 總旨니 이상 그대로의 해의수행이 견고하면 다라니신통장에 주할새 제마가 불침이오 일체의 허망상을 이한 실상의 지혜라.

 

고로 설반야바라밀다주일새 즉설주왈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라 하시느니라.

고로 이의 실상지인 반야로써 도피안하는 약법을 증설할새 곧 반야바라밀다의 화두요 공안이라

이를 더욱 단축하야 총지하면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라하시니 반야바라밀다주 그대로 반야바라밀다의 인이되고 과가 됨을 요지할지라.

 

유통분이라. 고지하라 반야바라밀다가 시대신주며 시대명주며 시무상주며 시무등등주니.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가 구경각까지 성취하는 묘불가사의의 대총상 법문이며 6根 6塵 6識의 諸惑을 斷하고 적멸을, 해탈을 증하니. 도무극 곧 다시 더 높은 곳이 없는 가장 수승한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의 삼명과 신족통 타심통 천이통을 더 더한 六通이 生하는 대방편이며 팔만대장경을 독파하고 1700공안을 입증함보다 수승한 법이며 최상무비의 총지니, 능제일체고요 진실불허라. 이상 그대로의 뜻을 알고서 수행이 견고하면 다라니신통장 곧 일체재앙을 없애고 모든 공덕을 갖추는 법인 다라니신통장에 머물게 되니 모든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고 일체허망상을 떠난 실상의 지혜입니다.

 

고로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할새 곧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라 한다.

이 주문은 실상지인 반야로써 도피안하는 압축된 간략한 법문으로서 곧 반야바라밀다의 화두요

공안이 되니 반야바라밀다주 그대로 因이 되고 果가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은 금타스님이 주를 붙인것입니다.

대저 마음밝힘이 견성이요, 견성이 바로 오도일새 먼저 닦고 뒤에 깨닫는 先修後悟란 迷惑된

修行法이요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선오후수란 참다운 수행법인 오수이니, 수법에 있어서 경을

보는 것이나 또는 송주나 참선이나 관법이나 그 방법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천수경으로 깨달으나 염불하고 깨달으나 화두로 깨달으나, 깨달은 경계는 둘이 아니요, 증이란 몸으로 증하는 것이요,

오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니 신증심오를 증오라고 합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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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보 원|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