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의례도 수행방편이다
우리가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는 그 사람들의 아픔도 달래주고 세상을 살면서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고, 그것 때문에 공포심이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인이라면 그러한 것을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病든 이에게 어진 醫員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면허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든 사람은 전부 외로움에 떨고 있고, 괴로워하며 공포심에 떨고 있습니다.
이럴 때 根本的으로 病의 意味를 일러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病이 나는 原因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前生에 지은 業에 의해서 나타나는 병[業病]이 있고,
내 마음의 狀態로 인해 발생하는 病이 있습니다.
業病이란 前生에 남에게 害로운 業을 지은 것이
그대로 나에게 反映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病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바로 환자입니다. 누워있으면
부모고 친지이고 다 쫓아와서 '어떻게 된 거냐?'며 걱정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마음이 고장 나서 病을 불러오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짜증을 많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짜증을 내는 사람에게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病을 앓고 있는 상태가 좋은 機會라는 것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이 세상이 모두 恩惠로운 사람들로 꽉 차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꼭 일러줍니다.
그런데 만약 병이 악화되어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면 환자한테
속여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죽는 직전까지라도 살 것으로 믿고 있다가
별안간에 죽게 되어서 공포 속에서 죽어갑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지만, 사실은 죽을 적에 행복한 마음으로 죽어야 죽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죽는 당시의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阿彌陀經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법문을 듣고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나흘·닷새·엿새 또는 이레 동안 一心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워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이 臨終할 때 아미타불이 여러 성인들과 더불어 그 사람 앞에 나타난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항상 나무아미타불 부르고 있으면 죽을 때에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죽을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때의 마음은 幸福하고, 幸福한 마음으로 죽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에 아미타불이 오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죽는 演習을 해야 합니다.
종교공부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아무 때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 공부입니다.
종교생활을 잘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든지 부자가 된다든지 하는 유치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永遠絶對 生命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종교란 죽는 준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잠이 들기 직전에 念佛하라고 수없이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다 그냥 자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연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무아미타불 부르면서 잠이 들면, 꿈을 꾸어도 부처님 꿈을 꾸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한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서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잠들기 전에 나무아미타불 했는지 안했는지는 일어날 때 보면 압니다.
이렇게 항상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은 이 世上을 떠날 적에도
나무아미타불 부르면서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잠들 때조차도 나무아미타불을 잊어버린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감기 몸살로 열이 40도를 오르내릴 적에 나무아미타불
찾을 수 있을까요? 다 잊어버리겠지요.
이렇게 감기 몸살을 앓아도 나무아미타불을 잊어버린다고 한다면,
나중에 몸뚱이 내버릴 적에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을지는
아마도 뻔한 답일 것입니다. 이런 이치로 관무량수경에서
아무리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다만 죽을 적에 또렷하게
나무아미타불 부르면 극락에 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숨이 끊어지면서
나무아미타불할 정도면 보통 때 연습하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법우님들은 지금부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밤에 자는 것도 사실은 죽는 연습하라고 자는 겁니다.
그렇듯이 이 세상에서 숨이 끊어질 때가 가장 중요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떤 노파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자손들한테 버림을 받고,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이
약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살아가다 숨이 끊어져가는 그런 노파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속에는 남을 원망하고 탓하는 마음만이 가득합니다.
자식도 원망하고 이웃사람도 원망하고 자기 운명도 원망하면서 죽어 가는데,
그러면 이 사람이 죽어서 갈 곳은 정해지는 것입니다. 죽을 때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합니다. 이 노파가 막 地獄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가섭존자가 神通力으로 알았습니다.
노파의 오두막으로 쫓아간 가섭존가가 거적대기 문을 열고, ?
공양을 올려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노파가 벌컥 화를 냅니다.
"지금 내가 먹을 물도 한방울 없는 판에 무슨 공양을 올리라는 거냐?"
"당신 옆에 보니 언제 떠다놓은 물인지 잘 모르지만 물이 조금 있으니 그 물을 달라."
"이 물에는 구더기가 끓고 있는데 어떻게 먹겠다는 거냐?"
"그것은 상관하지 말고 정성으로 공양을 올려주면 내 그 공양을 받아주마."
노파는 옆에 있는 오래된 물을 가섭존자에게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가섭존자가 그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잘 잡수십니다.
다 잡숫고는 祝願까지 해주십니다.
"그대의 정성스러운 공양을 잘 받았노라.
이 공양의 공덕으로 그대는 이 세상을 떠나서 반드시 좋은 세상에 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노파의 마음이 확 바뀌어버렸습니다. "
세상에 나같이 버림받은 사람,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이런 나를 찾아와서
그것도 제대로 된 음식도 아닌 다 썩어버린 물 한 그릇을 잘 잡수셨다고 하고,
그 공덕으로 좋은 세상에 태어나실 거라는 축원까지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정말 난 축복받은 사람이다"는 生覺으로 바뀌면서 '고맙습니다'를 계속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恩惠를 認定하는 마음입니다. 은혜가 이미 충만되었음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으면
은혜가 충만한 세계에 가서 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노파가 하늘세계에
태어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現代醫學으로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病이 났다면 미리 일러주어야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실망하겠지만, 살 것이라고 믿고 있다가 갑자기 죽게 되면,
그 마음은 짜증과 瞋心과 怨望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과 성내는 마음으로 죽으면 地獄으로 갑니다.
地獄이란 지옥이라고 간판 붙은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짜증내고 원망하고 탓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뜨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세계가 지옥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좋은 因緣을 만나고 感謝하는 마음으로 바뀌기 前까지는
極樂이 實現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에게 나을 수 없는 병이 걸렸을 때는 미리 상태를 알려주어서 스스로가 죽음을 맞을 마음의 準備를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적인 분위기로는 그것이 안되기 때문에 우리 법우들이 그러한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本來 참생명은 몸뚱이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몸뚱이가 없어진다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나의 본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버린다는 것이 참으로 고맙고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비하라 운동'이라고 하는데 비하는 '정사', 곧 절을 말합니다. 절에서 죽는 마음으로 便安하고 幸福하게 죽도록 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病든 이에게 어진 醫員이 되는 법입니다.
청주의 어느 사찰에서 아미타신앙을 하면서 불교 호스피스 센타를 만들어서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나무아미타불 법문을 해주고 호스피스 서비스도 해준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차츰차츰 그런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문사수도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적에 조금도 싫어하는 마음이나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폐암으로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한 상태로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법문을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을 잘 이야기해 주고,
아파도 '나의 참생명 부처님생명'을 계속 외우도록 하고 극락왕생(極樂往生)에
대한 법문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통증이 사라지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도 安心하도록 부처님의 법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을 놓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흘 만에 죽었다고 하는데
臨終할 때 빙그레 웃으면서 갔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문사수법회에서 매일 외는 ?염불인의 생활훈?의 제일 첫 구절이
'몸에 病 없기를 바라지 말라'입니다. 몸에 병이 발생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몸에 병이 있어야 나의 참생명에 대한 反省을 하는 機會가 됩니다.
그리고 몸에 병이 생긴다고 하지만, 사실 몸뚱이는 物質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질이 물질 마음대로 병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몸뚱이는 정육점의 냉동실에 걸린 갈비짝이나 고깃덩어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질로 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냉동실의 갈비짝은 추운데 있어도 기침도 안하고 몸살도 앓지 않습니다. 죽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 몸에 病이 드는 것도 몸뚱이에 病이 드는 게 아니라,
生命에 病이 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生命은 무슨 生命입니까?
부처님생명인데 부처님생명에 무슨 병이 납니까?
부처님생명에는 병이 나지도 않고, 몸뚱이에도 병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병이 났다고 합니다. 그럼 병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錯覺을 일으킨 것입니다.
自己 生命力이 고장을 일으킨 것입니다. '나는 有限한 生命을 살고 있다,
난 은혜를 못 입고 있다'는 등의 마음에서 病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을 미워하고 怨望하는 마음으로 因해서 온갖 病이 다 생깁니다.
이렇게 마음에 고장이 났다는 것은 生命에 대한 錯覺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살고 있는 方式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밉다고 악을 쓰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병이 없는지 몰라도 병이 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미워하고 헐뜯고 신경질을 내고, 돈을 계속 더 모으려고 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이 고장난 것입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이 부모자식 사이와 부부 사이인데, 제일 가깝기 때문에 제일 밉습니다.
정말 인생이 참 묘합니다. 겉으로는 ?사랑해요?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미워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그 이상 더 가까울 수 없이 가까이 지내면서도 미워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 같지만 結局은 그 미움이 自己 自神에게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미움이 내 안에서 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긴 病들을 '마음이 原因이 된 結果'라고 해서 이렇게 大部分의 病은 남을 미워하는 데서 온 結果입니다.
또한 精神分析을 하는 心理學者들 얘기를 들어보면 交通事故가 나는 것도,
넘어져서 외상을 입는 것도, 얼른 보면 물리적으로 外部에서 일어난 사고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답니다. 待接받고 싶은 欲求가 病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난 세상 사람 전부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어. 우리 부모도 나를 모른 체 해.
내 자식도 날 모른 체 해. 어디 나를 모른 체 하는지 아는 체 하는지 한번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病을 부르고 주변의 關心을 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어리석은 生覺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법문을 해주어서 전부 바른 길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병든 이에게 어진 의원이 된다'는 것에서 우리 불자(佛子)들이 반성해야 할 것과 또 내가 해야 할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이렇게 간단한 한 줄이지만 많은 뜻을 담고 있으며, 내용으로 보면
'길 잃은 이에게 바른 길을 가리킨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됩니다.
요즘 社會는 왜 사는지는 關心이 없이 그저 부지런히 살라고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뛰니까 왜 뛰는지도 관심 없이 그저 精神없이 덩달아 쫓아 뜁니다.
어느 길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바른 길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세상사람 모두 한생명인 세계를 우리 앞에 실현시켜야 한다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얘기해 주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人生의 바른 價値를 일러주어 生命의 原理를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고는 참생명의 원리를 일러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 누구든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菩薩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같이 실현시키는 사람입니다.
자기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것이 자리이타(自利利他)입니다.
자리(自利)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自由로워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거짓된 것을 추구하거나 바깥의 것에 끄달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길을 잃고 헤매면서 거짓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
돈만 모으면 그만이다, 출세하면 그만이다'라는 生覺이 온 나라에 꽉 차있습니다.
국회의원 출마하는 사람 가운데 갑이라는 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면
을이라는 당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 이념에 상관없이 국회의원만 되면
그만이라는 生覺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자꾸 만원버스만 오는데 뒤에 빈차가 오니까 노선이 맞든 틀리든 관계없이,
자리에 앉아가니까 참 좋다'고 하면서 타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方向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목표상실의 사회라고 하면서 그래서 위기라고 합니다. 그럼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보살은 나에게 이로운 일과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이로운 것, 이것이 自由입니다.
그리고 또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평등(平等)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실현시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現代社會의 問題를 우리 불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주었다고 한다면 내 호주머니는 비었으니 나에게는 손해이고,
또 내 호주머니 채우려고 한다면 남의 호주머니가 비게 됩니다.
내가 이롭자고 남이 손해를 본 경우가 됩니다.그런데 보살의 입장에선 어떻게 됩니까?
남한테 주는 것은 저쪽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남한테 布施行을 하여
내 마음의 慈悲心를 키우는 것이기 때문에 나한테도 이로운 일이 됩니다.
이렇게 나한테 이로운 일을 하면서 남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면서
나에게도 이롭게 하는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 보살업(菩薩業)입니다.
따라서 길 잃은 사람에게 바른 길을 가리킨다는 말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한테 부지런히 傳法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