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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능력의 주인공과 자기한정

장백산-1 2014. 5. 10. 14:08

 

 

자기한정과 무한능력의 주인공|고요하기-정정

법상 | 2014.05.09. 18:26    http://cafe.daum.net/truenature/RzhP/8 




본래 우리 마음의 능력은  限界가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이미 해놓고 살아갑니다.

'나의 능력은 이정도야'  '이것뿐이 안돼' 라고

스스로 自己 限定의 觀念의 線을 그어 놓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그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想像할 수 없는 일로 덮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나 나 자신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그렇게 착각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어느 선까지만 規定지어 놓고는

자신의 의식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그 自己限定의 觀念에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내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할 때

그 정도의 능력은 바로 자기 의식 스스로 규정짓고 있는

그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의식/마음 스스로를 얼마만큼 한정 지어 두느냐에 따라

정말 자신의 능력의 범위가 결정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식 능력의 범위란

본래부터 미리 決定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식 스스로가 스스로의 능력을 限定짓고 있기 때문에

의식 스스로 만들어 둔 그 정도의 능력밖에는 발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 우리 의식/마음의 능력이라는 것은 限定지어진 槪念이 아닙니다.

限定한다는 것은 이미 무엇인가가 얼마만큼 있다는 말이지만

本來 우리의 本性은 텅~ 비어 있는 본바탕이기에

얼마 만큼이라는 限定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텅~ 비어 무엇이라도 또 얼마만큼이라도 다 담을 수 있는

모양이 없고 크기도 없는 공(空)의 그릇입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텅~ 비어 오히려 充滿한 그 空의 無限 能力을 바로 보십시오.

無量壽 無量光  法身 비로자나 부처님의

그 限量없는 無限 時空의 나툼을 말입니다.

本來 우리의 本性이 바로 法身 비로자나 부처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 텅~빈 본바탕의 法身 主人公이

잠시 고정된 實體 없는 연(緣)을 따라 實體 없는 衆生心을 일으킨 것입니다.

겉 껍데기의 虛像을 보지 말고

의식 내면에 또 이 텅~빈 우주에 가득하여 충만한 법신 부처님을 보십시오.

 

언제인가 해외토픽에 나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어머님이

집앞에 뛰어놀고 있는 아들을 불렀는데

아이가 어머니를 향해 뛰어오다가 그만 차에 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차 밑으로 들어간 아들을 향해 달려가

차를 힘껏 치켜들고는 아이를 구해내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나중에 그 힘이 어디서 나왔나 하여

다시 들어보도록 했더니 꼼짝도 안 하더란 말입니다.

덩치 큰 장정들이 몇 이 들어야 들릴 그런 무게였습니다.

 

아들이 차에 치인 瞬間

어머님의 머릿속에는 내가 저 차를 들 수 있을까!

얼마나 무거울까! 무거운데 들지도 못할꺼 119에 전화나 할까! 하는 등의

그 어떤 分別하는 마음/의식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차를 향해, 아들을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그 어머님의 마음에 自己限定의 觀念은 도저히 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있겠다 없겠다 하는

그 어떤 분별심도 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자식을 향한 一念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오직 목표를 향한 순수하고 텅~빈 마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다른 예로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란 박사도

평생을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하지만

자신의 두뇌 활용 용량의 단 몇 퍼센트도 쓰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본래 우리 마음/의식이 가진 능력은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의식 스스로 자기한정의 관념에 빠지기 때문에

그 관념의 사슬로 인해 자신 마음의 능력이 그 관념따라 실제화되는 것입니다.

 

자기 한정의 늪에서 벗어나세요.

그리고 자신의 마음의 능력을 무한히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자기 한정이라는 것은

이미 아집(我執)이라는 자기집착에 노예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래 나가 없고 상대가 없다면

나는 안되고 상대는 된다는 분별도 사라집니다.

 

오직 상대가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나 또한 할 수 있게 됩니다.

 

힘겨운 일을 당해서도,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자기 마음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마음은 버려야 할 첫 번째 觀念입니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나약한 마음이 반복되면

그 마음은 점차 실체화 되어질지도 모릅니다.

 

공부가 안 되어도

공부 안 된다는 생각, 시험 잘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일찍부터 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왜 이렇게 사업이 안되지 하는 마음은 禁勿입니다.

혹은 누가 물어 오더라도 '잘 된다' 고 이야기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마음공부, 마음연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도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음/의식은 본래 한정된 것,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 일으킨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텅~빈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이 圓滿하게 具足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될 수 있을까' 하고 마음 스스로 의심하여 굳게 믿지 못하는 데서

일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며,

구하지만 안되는 이유는 오직 '나는 안되'라고 하는

자기 한정의 마음/의식 때문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이야말로 내 마음 닦은 그대로의 나툼입니다.

빌려 준 돈 떼어 먹혔어도 내 마음의 탐심(貪心) 나툼이며,

주윗 사람이 화를 내도 내 마음의 진심(嗔心) 나툼이요,

생각한 만큼 일이 잘 안 되는 것 내 마음의 치심(癡心) 나툼입니다.

 

밝은 마음 계속 연습하면 세상이 밝아지고,

어두운 마음 연습하면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내가 마음을 닦은 만큼  세상은 그만큼만 밝아질 것입니다.

에누리 없는 세상, 그것이 바로 因果의 철칙 아니던가요.

 

자기 마음 스스로 한정짓지 않고 텅~ 비어

무엇이라도 다 담을 수 있도록 밝게 열린 마음을 연습을 하세요.

'된다' '된다' 하는 마음 담아 두면 절로 되어지고,

'안된다' '안된다' 하는 마음 담아 두면

될 일도 그르쳐지는 것이 우리네 마음 도리입니다.

 

限定짓지 않는 無限한 마음 그 텅~비어 충만한 본바탕마음이

法身 毘盧遮那 부처님의 淸安淸樂  밝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