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사참회 이참회

장백산-1 2014. 10. 26. 19:52

 

 

 

 

법상스님의 천수경 강의 제13강 - 이참회|영상법문 녹취록

향광심       2014.10.24. 16:15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27 

 

네 반갑습니다. 지난번 이어서 천수경 강의 하던거 좀 더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이제 십악참회에서 意業으로 짓는 세가지 惡業 가운데 貪瞋癡 三業이 있다.

삼업에 대한 어떤 참회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었구요.

 

탐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진심과 치심도 이제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妄念으로 妄想 分別로써 내 안에서 나다라는 生覺이 있다보니까,

나다라는 生覺 自體가 어리석은 마음 痴心이라고 했구요.

 

내가 있다라는 生覺이 있다보니까, 내거를 늘리고 싶은 貪心이 생기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 내 생각대로 하겠다. 내가 옳다. 라고 하는 데 있어서,

내가 옳은데 딴 사람은 이걸 틀리다고 하니까. 나와 자꾸 부딪히고 이럴 때 마다 화가 나는 거죠.

 

그래서 내가 내 방식대로 내가 옳다는 방식대로 인생을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내 방식을 틀리다고 했을 때, 그때 이제 화가 난다 말이예요.

분쟁이 일어나고 그럴 때도 화가 나는 게 마찬가지입니다.

 

그 嚴密히 따진다면 우리 삶에서는요. 分爭이 생길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쟁이라는 것은 논쟁이나 분쟁이나 문제가 생기는 것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을 때 그것을 옳은 쪽으로 바로 잡기 위해서 일으키잖아요.

그런데 事實 이 世上에 전적으로 옳은 말, 틀린 말 이런게 있는가?

 

절대적으로 옳은거나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 있는가? 전적으로, 틀리거나 옳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옳다라고 生覺할 뿐이고, 내가 틀리다고 生覺할 뿐인 어떠한 妄想, 幻想이 있을 뿐이지.

절대적으로 옳거나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말이예요.

 

부처님의 말씀은 맞고 다른 종교 성직자의 말은 틀리다. 이런 거는 없단 말이죠.

부처님 가르침은 그야말로 破格의 破格이죠. 般若心經에도 無所得 以無所得故라 해서 本來 얻을 것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은 그겁니다. 本來 얻을 바가 없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야 그러면 불교에는 眞理도 없구나.불교에는 얻을 진리도 없는 것입니까?

이렇게 묻지만, 얻을 바가 없다라는 그 事實에 대해서 우리가 사무치게 배워야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니까 얻되 얻을 바가 없는 겁니다. 金剛經에도 나오거든요. 說하되 한마디도 說한 바가 없다고

그 말은 뭐냐하면? 한 法도 얻을 바가 없다.

뭐 하나도 우리가 얻어 가지게 되려면 얻을 바가 있을려면 뭔가 事物이나 物質이 있어서

이걸 내가 노력해서 가져야 되잖습니까? 돈도 내가 돈을 벌고 싶다하면. 그러면 돈이라는 實體가 있으니까

내가 그걸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돈을 벌어 가지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法, 眞理라는 것은 特別히 노력해서 얻을수 있는 어떤 物質 事物이 이런 게 아니란 말이죠.

法, 道, 眞理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히고 있고, 가지고 쓰고 있는, 눈으로 보고 있고, 귀로 듣고 있고,

눈으로 보면서 드러나고 있고, 귀로 들으면서 드러나고 있고, 맛 보면서 드러나고 있는

우리가 언제나 가지고 쓰는 그것 自體이니까, 한번도 숨겨진 적이 없고, 한번도 우리가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새롭게 가질게 있겠습니까? 한번도 안 가졌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얻을 게 있겠어요?

그런데 그걸 없다고 生覺하고 또 따로 있다고 生覺하면 그건 妄想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 된다.나는 여기에 있고 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중생이고

저기 어떤 특정한 깨달음의 상태가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이 내가 저 놀라운 깨달음을 얻겠다 얻어 봐야 되겠다.

이래 生覺하면 이것은 머리속에서 움직이는 妄想일 뿐이다. 錯覺하고 있는 것일 뿐이죠.

 

이 癡心이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本來 貪瞋癡 三毒心은 없습니다. 우리안에, 本來 貪瞋痴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러분 삶을 生覺해 보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삶이 즐거울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잖습니까?

하루에도 어떤 때는 좋고 어떤 때는 싫고, 마음도 또 좋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싫기도 하고,

싫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또 좋기도 하고, 누가 욕하면 괴롭고 칭찬하면 기쁘고,

내가 원하는 일이 생기면 기쁘고 안 생기면 괴롭고 마음이 계속 왔다 갔다 한단 말이죠. 우리 마음이.

 

그런데 가만히 냉정하게 우리 삶을 딱 돌아보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좀 울화통이 터지지 않습니까?

내 人生을, 내 人生을 왜 이렇게 휘청거리고 살아야되지? 왜? 이렇게 주변 狀況에 휘둘리며 살아야 될까?

나는 왜 이렇게 돈이나물질 감정 이런거에 휘둘리고 노예가 되어 살아야 되고,

왜 내 마음 하나 제대로 쓰지를 못해서 남들의 말 한마디에 화를 내고, 욕심을 내고, 남들과 비교를 하고,

어떨 때는 축 쳐지고, 다운 됐다가 올라갔다가 이렇게 죽을 듯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이러구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되지? 정말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런 일들이  죽을 때까지 간다는 거죠.

이게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좀 이상한거죠. 좀 어찌보면. 말도 안되잖습니까?

지금 내가 사는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정말 말도 안되지 않습니까? 좋았다. 싫었다. 계속 반복되니까...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딱 이거죠. 어리석은 중생이 노력해서 깨닫는게 아니고 본래 깨달아 있다.

本來 完全하다. 삶은 本來 完全하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이대로 完全하다.

 

저는 완전하지 않은데요. 왜 완전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느냐?

사람들이 저마다의 分別 妄想을 가지고 生覺을 가지고 나는 完全하지 않다라고 解釋하고 分別하기 때문에,

妄想을 피우기 때문에 不完全하다고 錯覺할 뿐이다.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幸福하다 지금 괴롭다. 이런 모든 分別心들은 妄想일 뿐입니다.

우리는 단 한 瞬間도 幸福한 적도 괴로운 적도 없어요.幸福하다는 마음도 妄想입니다. 괴롭다는 마음도 妄想입니다.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幻想인 거예요.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이 어떨 때는 행복했는데, 어떨 때는 괴로워집니다.

 

제가 자주 비유를 들듯이. 아프리카나 인도같은 데 다 죽어가는 아이들에 비한다면,

지금 여기에 와 사는게 남들처럼 비싼 아파트 비싼 차는 없지만 그래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똑같은 상황인데 한 생각 돌이키면 행복하고, 한 생각 돌이키면 불행하다 말이죠. 동일한 상황인데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을 가지고 우리의 意識은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이렇게 自己式대로 分別 妄想을 일으켜서

意識 스스로 일으킨 妄想에 스스로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러 요러한 거는 행복한 일, 요런 요러한 일은 불행한 일이라고  觀念/틀을 만들어 놓은게 나 자신의 意識인데,

그 관념/틀이 다른 사람의 틀/관념 맞지않단 말이죠. 다릅니다. 틀이 서로...

 

자꾸 저마다 자기 틍/개념이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는 틀/관념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저마다 행복하고 불행한 관념이 다  다른겁니다. 그 말은 本來 定해진 틀/관념이 없다는 말예요.

정해진 틀이...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지없이 完全하다. 完全하다. 여지없이 完全하다.단 하나도 바꿀 필요가 없다.

깨달은 道人은 神足通이 열려서 막 버스 안 타고 다니고 훨훨 날아다니고, 他心通이 딱 열려서 사람들 마음을 확

읽어가지고 당신 앞으로 뭔일 생기겠네요. 이런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 말이죠. 이런 짓을 해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는 사이비들이 있잖습니까? 그게 깨달음이 아니란 말이죠.

 

깨달음은 意識世界가 自由하고 平和로운거 신통자재 한거지.

그렇게 몸이 왔다 갔다하고 이런게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깨달은 자의 삶도 일반인과 똑같다 말이죠. 삶은 똑같습니다.

부처님도 늙구요. 부처님도 병들구요. 부처님도 돌아가실 때가 되면 돌아가신다 말이예요.

 

그런데 돌아가셔도 돌아가신 바가 없고. 아파도 아픈 바가 없고, 아무리 뭘 잘해도 잘한 바가 없다 말이예요.

하나도 남긴 흔적이 없단 말입니다.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부처님에게도 벌어지고, 우리에게도 벌어지고 똑같이,

부처님에게는 完全한 일이 언제나 完全하고 如如하게 일어나고 있을 뿐이고,

우리에게도 完全한 일이 언제나 完全하고 如如하게 벌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公然히 生覺을 가지고 나는 成功했다. 나는 失敗했다. 이런式 二分法的으로

기쁘다. 즐겁다. 괴롭다. 이래서 이렇다. 저래서 저렇다. 괜한 分別妄想을 피운단 말이죠. 妄想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同一한 狀況에서 나에게는 괴로운 마음/망상이 있지만, 부처님에게는 괴로운 마음/망상이 없죠.

우리가 괴롭다고 生覺할 때 딱 돌이켜서 아 내 意識이 妄想을 피우고 있구나하고.

지금 이자리로 딱 돌아와야 됩니다.지금 이자리로 딱 돌아오면 지금 法門 듣고 있는데 괴로울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도 괴로울 마음/妄想이 없죠.

 

남들과 싸울 필요도 없는거죠. 화 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화내는 거는 내 주장이 있고 내가 옳다는 생각이 있고 내 주장 생각대로 되야 된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남들과 싸우는 거 아니겠어요? 남들이 나한테 욕을 했다. 뭐라고 했다. 운전 못한다고 옆에서 손가락질을 했다.

이런 狀況들은 完全한 狀況입니다. 아무 問題가 없는 狀況입니다. 왜? 그 狀況이 問題가 되죠?

내 생각으로 그 상황을 문제로 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거지.

그 사람이 나한테 뭐라 그러는 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經典에도 그렇게 나와 있죠.

 

부처님께서 세상 사람들은 잘하면 잘한다고 욕한다.못하면 못한다고 욕한다. 중간만 해도 중간만 한다고 또 욕한다.

누구도 어디를 가더라도 是非와 辱으로부터 自由로울 수는 없다. 어디로 떠나가가지고서는 自由로워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그 是非 分別에 對한 생각 마음을 딱 놔버리면 그 자리에서 누가 나를 욕해도 상관없고, 비난해도 상관없게 되는 거죠. 부처님이 딱 되면 부처님을 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느냐? 그게 아닙니다.

 

부처님한테 욕하는 사람만 있었습니까? 자객도 보내 죽이려하고 온갖 험담을 퍼트리고 없는 사건을 만들어 내서

부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외부적인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그런 일이 아무리 있어도 일이 있는 바가 없는거예요.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라는 그 틀/槪念/觀念/相/生覺 自體가 딱 없어졌으니까.

 

우리가 보통 하루에 삼만에서 오만 육만가지 生覺이 일어난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그 육만가지 生覺이 일어난다라는 말는 육만가지 分別心이 일어난다라는 말이구요.

分別心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世上을 둘로 나누는 마음이고, 둘로 나누는 마음이 되면 無條件 分裂이 됩니다.

그러니 생각마음의식이라는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세상을 둘로 나누고 둘로 나뉜 마음이되어 마음이 분열되면

마음의식생각은 자동으로 괴로워질 수 밖에 없어요. 둘로 나뉘면

 

한 生覺/마음/의식이 딱 일어났다는 거는 벌써 그 일어났다는 生覺과 내가 둘로 나누어져 있고,

그 生覺 自體는 過去고, 지금은 이 瞬間이라서 過去와 現在가 나뉘어져 있고,

맞다 틀리다 말하면 너와 내가 나뉘어져 있고, 그 어떤 것도 둘로 나뉘지 않는 게 없다 말이죠.

 

근데 마음이 둘로 딱 나뉘게 되면 이게 癡心이고 어리석음이고 둘로 딱 나누면서 妄想을 일으키면

生覺을 일으켰다 하면 그 煩惱 生覺 그게 다 妄想덩어리란 말이죠. 그게 癡心이고 어리석은 分別心입니다.

痴心 그것 때문에 내가 옳다고 生覺하고 너는 틀렸다고 生覺하고

그러니까 치심에서 瞋心이 일어나는 거예요. 화 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냥 서로 다른 見解를 가질 뿐인데.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일어나는.

 

저 사람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없고 내가 전적으로 옳은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옳은 견해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견해도 그 말이 전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단지 方便의 가르침으로 한 말일 뿐이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는 거예요. 方便으로 옳은 것이지. 그 말 自體가 全的으로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말씀하신 말씀이 아니예요.부처님이 팔십년 동안 법을 말씀했다고 했지만 열반 하시면서

법을 설했지만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한 이유가 팔만대장경을 설했지만 대장경 그 단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라고 하는 이유가 말에 執着해 버리면 眞理 自體를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인 겁니다.

 

말속에 經典의 말속에 백퍼센트 眞理 絶對 眞理는 없습니다. 相對 眞理가 있을 뿐이지.

그래서 이게 絶對 眞理다 라고 生覺하면 어리석은 마음이예요.

이러한 事實이 저 西洋宗敎에서는 文字主義에 치우쳐져 있다 그래서, 聖經을 있는 그대로 文字에만 치우쳐서

理解하는 사람. 文字 그대로 백프로 眞理라고 生覺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文字主義에 치우쳐져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점은 佛敎도 마찬가지입니다.

 

經典 속 文字 그대로의 眞理는 없습니다.그러기 때문에 말로 表現된 方便은 全部 다 相對眞理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불교에서는 말로 表現된 건 全部 다 世俗諦다.세속적인 方便으로 만들어낸 眞理일 뿐이다.

그 根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本質的인 第一義諦 勝義諦가 있다. 참진리가 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말로 표현하면 이미 어긋나니까, 둘로 나눠지니까, 분별심이 일어나니까,

 

그래서요. 첫째 瞋心 화내고 성낼 필요가 없는 理由는 내가 옳은 것이 아니고

내가 옳다고 錯覺한 妄想으로 우리가 화낸 거 뿐이지. 저사람은 틀렸다라는 틀렸는데 저사람은 틀린 生覺 가지고

계속해서 固執하니까, 내가 화가 나지만, 그게 저사람이 진짜 틀린거로 固執하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맞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意識이 成長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점을 認定해줄 必要가 있다.

 

그러니까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라고 生覺해가지고 싸운다라는 것은 서로의 생각이 틀렸다라고 해서 싸우는 일은

이것은 어리석은 마음의 극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나는 어리석습니다. 저는 貪瞋痴 三毒心에 사로 잡혀 있어서

저는 佛法이라곤 하나도 모릅니다. 아주 이것과 똑같은 얘기예요. 佛法을 머리로만 工夫했습니다.

몸으로 體驗이 전혀 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自息한테 툭하면 화를 버럭버럭 내고 남편하고 아내하고 버럭버럭 툭하면 싸운다.

이거는 저는 공부를 해도 공부한 바가 공부가 전혀 안되고 머리로만 공부했습니다. 불법을...

똑같은 얘기예요. 다를게 없으면, 화내고 싸울 사실은 없죠.

 

그리고 이 癡心, 치심의 實體는 다른데 있는게 아니고 내가 妄想 分別 일으키는 그 自體가 痴心이다.

그래서 妄想 分別心만 일으키지 않으면 이자리에서 여지없이 온전한 眞理가 그대로 드러난다니까요.

 

業은 그대로 굴러간다는 말이죠.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도 業의 果保를 받잖아요.

그런데 과보를 받아도 받는 업보가 없단 말이예요. 반면 우리는 받아도 받는 바가 계속 있고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화살을 끊임없이 맞는데 깨달은 사람은 첫번째 화살 조차 첫번째 화살을 딱 맞지만 그것도 흔적이 없이...

그것이 깨달은 자이지. 깨달았다고해서 모든게 뭐 다 끝나고 괴로움이 아예 없어지고 이런게 아니란 말이죠.

괴로움을 않좋은 일을 있는 그 自體로 온전히 受容하게 되죠.許諾하는 겁니다.괴로움 그것 자체가 괴로움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괴로움이 眞理가 드러나는 完全性이라는 진실을 아니까, 하나 괴로울 게 없어지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면서,불교 그러면 아 좋은 말씀, 인생 사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

법문을 들으면 그때 참 고개가 끄덕여지고 야 내가 점점 더 착해지는 것 같애.내가 점점 더 너그러워지는 것 같애.

이 부처님 가르침 참 좋은 것 같애 여기까지를 佛敎라고 生覺하면 아니올시다라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만 할 것 같으면은 그렇게 우리가 미친듯이 열심히 막 목숨걸고 수행을 하고

한 나라를 막 버리고까지 출가를 해가지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그럴 필요가 없죠.

단지 마음 한 자락 便히 살고 싶으면 그렇게까지 힘들게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게 佛敎工夫  全部가 아니라니까요.

 

痴心이 사라지는 이 境界는, 貪瞋痴 三毒心이 사라지는 이 境界는 우리가 生覺하는 그렇게 마음 便해지는

이런 境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단 한번도, 단 한번도 想像속에서도 있어보지 못했던,

한번도 生覺해 본 적도 없는, 말로 도저히 表現할 수가 없고, 한번도 그 感情을 느껴본 적도 없는,

여러분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뻤던 瞬間, 이게 뭐 方便으로 表現한다면 가장 기뻤던 瞬間 그거는

三毒心이 사라지는 이 境界 여기에 비한다면 이거는 기쁘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또 다른 世界가 있단 말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범접해 보지 못한,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또 다른 깨달음의 세계라는 게 분명히 있단 말이죠.

 

이게 불교 공부를 하면 대개분들이 어떻게 生覺하느냐면? 아 저 2500년전에 부처님이 깨달으신 거.

부처님같은 根機가 수승한 분들이 깨달으신 거,2500년 지난 지금에 그런거는 없고 뭐 있어도 저 성철스님이나 

이런 어떤 대단한 상상할 수 없는 피나는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 얻으신 분들에게 나 있는,

나같이 한 두시간만 앉아 있어도 다리가 아프고 한시간 법문 듣는 것도 지금 다리가 아파 죽겠고,

삼천배 하라고 그래도 다리가 막 아파서 못하겠고, 선방 가서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들고,

염불도 한시간 하면 못하겠고, 금강경도 7독은 못하겠고,이런 나같이 根機도 떨어지는 사람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했고, 자식한테 맨날 소리만 벅벅 지르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나? 어떻게 깨달을 수 있나?

이렇게 分別妄想을 피우고 있다 말이죠. 이건 完全한 妄想일 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보면요. 우리가 錯覺하는게 엄청난 修行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엄청난 錯覺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걸 表現해서 어떤 사람은 大衆 見性 이렇게 表現하던데,

그래서 요즘에도 대중 견성 운동이 일어나야 된다. 이러던데. 그 말 맞아요.

 

심지어 이렇습니다. 도둑이 도둑떼가 오백명이 있단 말이예요.

오백명의 도둑떼를 그 자리에서 부처님이 딱 敎化를 해버립니다. 法門을 딱 해주는데,

그가운데 상당수가 그자리에서 딱 어떤 사람은 阿那含과 어떤 사람은 修多元과를 증득하기도 한다.

 

재가 신도님들이 법문을 들으러 왔다가 법문을 딱 듣고 나서 그냥 법문 듣고 딱 그자리에서

아라한과, 아나함과, 사다함 수다원과를 증득한다 말이죠. 그 어떤 사람은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가,

다음에 아라한과를 증득도 하고, 점점 그 가르침이 鮮明해지면서,점점 깨달음이 確固해진다는 그런 말이죠.

 

부처님 당시에 뭐 念佛을 하고 절을 하고 讀經을 하고 이래서 깨달았다 이런거 보다.

탁 말씀 듣고 깨달은 사람이 더 많다 말이죠. 경전에 보면, 그래도 못 깨닫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제 身受心法을 觀해라 하는 方便의 修行法을 말씀해 주신 거란 말이죠.

 

중국 祖師禪의 황금기 육조 스님이나 마조 스님이니 修行하지 마라. 이랬단 말이예요.

수행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거는 없다. 극단적으로 얘기 하신 분들은 그렇게 얘기 했는데,

그 때는 왜 그랬냐 하면? 딱 스승이 있으니까, 뭐 수행을 통해서 깨닫는 게 아니고,

탁 한 生覺에 한 消息, 말 한 마디에 法門을 듣고 깨닫는다는 말이죠.

 

이것이 意味하는 바가 뭐냐하면? 우리가 자꾸 分別妄想을 피우면 안된다는 말이예요.

나는 수행을 몇 시간 동안 오래 하지도 못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되겠나?

이런 妄想 分別心을 피우면 안된다. 그런걸 통해서만 얻어지는게 그런게 工夫의 다가 아니다.

 

저기 2500년 전에 깨달은 그 분만 부처님이 아니고, 지금 이 시대에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이런 分別妄想에서 벗어나야 된다. 이거는 現實입니다. 現實. 現實이고

現實에서는 우리가 當然히 이것을 얻어야 되는 것이고

 

또 한번, 한번 우리가 이렇게 딱 태어났는데, 태어나서 한번 인생 사는데

아이 지지부지하게 돈 벌고 명예 권력 지위 뭐 좋은 집, 좋은 차 뭐 수백억 수천억 뭐 이런거 시시껄렁한 이런 거

가지고 우리가 막 목숨 걸고 살 필요가 있느냐? 해봐야 백년도 안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거 돈 數千億 벌었어요. 내가 원하는 최고 높은 자리에 올라 갔습니다.집, 빌딩, 내집이, 빌딩이 몇개가 있어요.

그런데 내일 아파가지고 쓸어지면 어쩔겁니까?

末期癌이다. 몇년 못산다.이러면 그것들 다 뭐하겠어요. 어디다 써 먹겠어요? 數千億 있어 봐야.

자식들 남겨 주면 자식들 그거 가지고 싸움이나 하지. 그거 어디다 써먹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돈을 어디다 다 써먹을 줄로 錯覺한단 말이예요. 써먹을데가 엄청 많은 줄 착각한다 말입니다.

돈 벌면, 그것만이 최고인줄 안단 말이예요. 이런 어리석은 錯覺과 엄청난 妄想 속 삶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단

말이죠. 지금까지 그 虛妄한 幻想인 分別妄想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목숨걸고 뭔가를 열심히 하는거 그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구요.하란 말이죠. 하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 보다 더 重要한 價値가 있구나. 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돈이거 오래 못가잖습니까?

명예 오래 못가잖습니까? 좋은 집, 좋은 차 오래 못가잖아요.

 

그러나 法, 眞理, 道는 오래 못가는게 아니고 그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언제나 있는 것인데,

우리들의 생각 마음 의식이 分別妄想 피우느라고 恒常  法, 眞理, 道를 까먹고 잊어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法이 그대로 드러나서 法을 쓰고 살지만, 眞理가 그대로 드러나서 眞理를 쓰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妄想속을 사니까, 眞理로 眞理속을 못살고 妄想속을 사니까. 眞理가 完全하게 드러나 있는데도 眞理를 보지않고 妄想을 보고 사니까,

 

여러분 生覺에는 여러분이 삶을 산다고 生覺 하잖아요?

事實은 여러분들은 眞正한 人生을 우리 모두는 眞正한 삶을 살고있지 않구요.

머리속 分別妄想속의 虛構의 人生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머리속에 드러난 삶을 살고있는 겁니다.

 

그래서 萬法唯識이라고 말합니다. 宇宙萬物 이 世上 모든 것은 내 머리속에 드러난 現實을 사는 거예요.

바깥의 진짜배기 世上이 物質世界가 다 있다고 그러잖습니까?

저기 가면 대통령도 있고, 미국에 가면 미국이라는 나라도 있고, 저 바깥에 나가면 자동차 타고 지금 성묘 가는

사람들도 있고 저 벌초하러 가는 사람도 있고, 저기 가면 학교도 있다고 이렇게 生覺하잖아요?

나 말고 獨者的으로 움직이는 世界가 있다고 生覺하잖아요? 이게 다 分別妄想일 뿐입니다.

 

이것들은 萬法은 다 내 意識안에서 일어나는 幻影들이 머리속에서 벌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意識 바깥에 진짜배기가 固定된 實體가 存在하는 것을 내가 이렇게 解釋하지! 이게 아닙니다.

내 意識 속에서만 宇宙萬物 그것이 그렇게 있는 것 처럼 錯覺할 뿐이다.

 

두 눈 뜨고 이렇게 萬物이 보이는데 이렇게 사람이 보이고 이 世上이 보이는데 이게 전부고 진짜죠 라고 生覺하지만,

人間은 宇宙空間 속의 無量한 빛 波動 중에서 단지 可視光線만을 볼 수 있잖아요?

동물 중에는 紫外線만 볼 수 있는 동물이 있고 赤外線만 볼 수 있는 동물이 있어요.

紫外線만 보는 동물이 인간이 보는 세상을 이렇게 보면 이렇게 안보여요. 이상하게 보인단 말이죠.

그러면  자외선만을 볼 수 있는 동물은 사람만이 보는 세상, 可視光線만 보는 사람이 보는 世上뿐만이 아니라 

또 天眼을 가진 存在들, 여기 법문 듣는 법당에 와 있는 수많은 華嚴神衆들이며,

혹은 큰스님들이 법문 할 때 법문 들으러 오는 天上의 天上世界 神들까지도 볼 수 있을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次元의 世界를 볼 수 있단 말이죠.

人間은 肉眼을 가지고 있으니까, 肉眼으로 볼 수 있는 世界만 보기 때문에

肉眼을 통해서 보이는 世界만이 全部요 진짜배기로 實在한다 生覺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生覺은 어디까지나 人間의 分別妄想일 뿐이죠. 인간의 意識속에서만 드러난 世上인 겁니다.

인간의 意識속에서만 드러난 妄想인 虛妄한 夢幻泡影인 世界라는 말이죠, 내가 아는 모든 것은 妄想이죠.

안다는 自體가 불교에서 識이라고 그럽니다. 識 分別心으로 認識한다는 識 意識.

이 識은 다 虛妄한 意識인 겁니다. 우리가 안다고 生覺하는 건 다 虛妄한 分別識인데, 虛妄한 意識인 分別識

안다는 것이 虛妄한 생각 마음 의식이라고 生覺 못하고 사니까

안다는 거 그게 全部 진짜인줄 알고 虛妄한 그 妄想의 意識을 진짜로 알고 사니까,

 

이 癡心 어리석은 생각 마음 의식이 생겨서 우리들의 괴로운 생각 마음 의식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고정된 실체의 괴로움이 생기는게 아니고 내 마음 속에서 생각 속에서 의식 속에서 

이건 괴로움이라고 해석한 것 뿐인 거예요. 妄想속에서 생각마음의식이 괴로움이라고 해석한 것 뿐인겁니다.

 

우리 일학년 생도들 또는 이등병들 군생활하는 이등병들 아니면 여러분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와 너무 힘듭니다. 이 사년을 어떻게 버팁니까? 그 힘든 것은 내 妄想속에서 힘든거죠.

이것 좀 쉽게 비유해서 生覺해 보란 말이죠. 비유해서.나보다 훨씬 못한 아프리카에 있는 애들하고 비교하면

나는 엄청 행복한거죠. 그런데 저 자유로운 사람들과 비교하니까 내가 괴로운거지.

 

전쟁 나서 지금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고 먹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허덕이는 사람앞에 가서

우리가 지금 괴롭다 말할 수 있겠어요? 나보다 더 잘난 사람하고 비교하니 괴로운거지.

그러니까 괴로움은 실체가 아니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을 괴로움이라고 내 생각마음의식이 해석했으니까,

내가 괴로운거지. 실제 괴로움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그건 다만 마음 속 생각 속 의식 속 머리 속 幻想일 뿐이지. 실체가 없어요. 괴로움의 실체가 없습니다.

 

貪瞋癡 三毒心이 다 虛妄한 텅~비어 空한 分別妄想일 뿐인데, 그걸 진짜배기 世上이라고 믿으니까,

진짜라고 믿으니까 거기서 괴로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 괴로움을 만든 것도 나죠. 幻想인 生覺으로 만든 幻想이죠.

부처님의 법문도 幻想의 法門일 뿐입니다, 幻想을 깨주기 위한 幻想의 藥일 뿐이죠.

그러니까 뗏목을 버려라. 배를 타고 넘어갔을 때는 뗏목을 버리라고 말씀하는 理由는

法도 다 내팽겨쳐라 이런 얘기가 아니라. 인간들이 幻想으로 因해서 괴로워하니까,

幻想으로 因해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幻想의 法門을 알려줬으니까

幻想을 딱 깨고 나면 幻想의 法門이 必要없죠. 아무 말도 必要없죠.

 

이렇게 貪瞋癡 三毒心을 그때 그때 하나하나 낱낱이 참회하는 것 이게 十惡懺悔입니다. 事懺悔예요.

지금까지 말한 事懺悔는 로 한 악행, 으로 한 악행, 으로 지은 악행

이러한 악업을 하나하나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이래서 참회하는 거예요.

이게 사참회 방법이예요. 그런데 사참회는 어찌보면 漸進的인 방법이죠.

 

점진적으로 하나하나 죄송합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용서합니다. 하나하나 참회해야 된다 말이예요.

그런데 이 길만 있느냐? 이런 점수적인 방법만 있느냐?불교에서는 돈오적인 방법도 있단 말이예요.

돈오적인 방법도 있다. 그게 바로 理懺悔입니다. 이참회. 이 理懺悔가 너무 수준 높은 법문이다 보니까,

이걸 보고 저 사람들이 어리석은 중생들은 이렇게 높은 법문을 듣고 나면,

이걸 誤解한다 말이예요. 오해해요. 아 참회할 것도 본래 없고 내가 죄 지은 것도 본래 없구나.

막행막식해도 되는구나. 내가 죄를 져도 되는구나.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너무 차원이 높으면 너무 공부가 안되어 있는 사람한테는 이게 이해가 소화가 안되는 법입니다.

불교는 空이니까 돈도 벌 필요가 없다. 열심히 살 필요도 없다. 공부도 가르칠 필요도 없다.

대충대충 설렁설렁 해라. 이게 어리석은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意識은 空이라는 思想에 잘못 치우쳐 있는거예요.  

여기 다음에 나오는 게송이 뭐냐면?  理懺悔를 가르치는 건데요.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백겁동안 쌓인 죄도 한 생각에 사라진다. 일념에 돈탕 탕진된다.

그런데 마른 풀이 불에 타듯이 남김없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천년 만년된 동굴 속 어둠도 불 한번 딱 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환해 지지

이게 뭐 천년동안 환해져야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한방에 끝낼 수도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아 내가 이참회를 하면 그자리에서 그냥 바로 죄가 없구나.

이건 엄밀히 말한다면 이 이참회는 어찌보면 내가 딱 깨닫는 순간 이참회가 다 끝나 버리는 거죠.

그 모든 죄업이 다 끝나 버리는 거죠.  죄가 있어도 있는 게 아닌게 돼버리는거죠.

 

理懺悔가 바로 요새 말한 것처럼 한 生覺에 몰록 罪業을 消滅 시킬 수 있다.

그럼 이걸 내가 완전히 깨달아야만 이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理致를 原理를 알고 내가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이 事懺悔的인 方便에만 몰두 해왔고

또 지금까지 부처님 말씀하신 이 本質 이거는 좀 등한시 하고  方便에만 너무 치중해 오다 보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 드린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罪意識에 사로 잡히지 마라. 사람들은 대부분이 죄의식에 사로 잡혀 있단 말이예요.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業이 지중할거야. 다음 생에 내가 지옥에 갈지도 모르고

내가 옛날에 죄업을 많이 지었는데 내가 나중에 힘들고 괴롭지 않을까? 이런 죄의식 속에 시달려 살 필요가 없다.

딱 참회를 하고 사참회를 너무 길게 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 하는 것도 그겁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하고 죽을 때까지 참회해야된다 生覺하고 죽을 때까지 참회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罪意識을 强化시키고 있는 거예요. 계속 참회하면 어때요. 죄의식이 계속 강화됩니다.

참회가 안됐다는 얘기 아니예요. 계속 참회하는 거는,  자꾸 죄의식을 강화시키고 있어요. 우리는

꺼꾸로 죄의식을 강화시키는 공부만 계속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죄를 졌어도 이게 불교의 慈悲心이라는 거는요.

죄를 지은 사람에겐 벌을 주고 죄를 안 지은 사람에게는 복을 주는 그런 그게 아닙니다.

그 건 선악이 있는 종교에서나 하는 이야기죠. 선악이 있는 종교에서는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야.

이걸 하면 절대악이고 이걸 하면 절대선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악을 저지른 사람은 그냥 죽을 때까지 

죄업을 받아야되고 무조건 지옥에 가야되는 겁니다. 선악이 분명하니까

불교는요? 선악이 분명하지 않다니까요. 선악이 없다니까요. 따로 없습니다.내 意識 속에서만 선악을 지어 낼 뿐이지.

 

선악이 분명한 종교는 선을 위해서는 악을 죽이는 것이 선입니다. 종교전쟁이 그래서 일어나는게 아니겠어요?

불교는 선악이 딱 분명하게 나눠지거나 그러지 않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불교는 선이니까 불교 안믿는 사람은

악이니까 전쟁을 해서라도 불교를 믿게 해야한다.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無限한 慈悲라는 말은 善惡과 相關없는 慈悲입니다.

어머님도 자식이 잘못해도 무한히 감싸줄텐데. 부처님, 진리가 있다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나쁜짓한 사람은 벌주고 미워하고 착한일 한 사람은 사랑하고 이런 어리석은 思量分別心에 依한 行動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믿고 있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기독교 천주교 믿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단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어두운 삶을 살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라는 건 본래 없기 때문에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忘)

죄라는 건 본래 자성이 없어서 다만 마음따라 일어날 뿐이다, 해서 그 마음이 사라지면 죄 또한 사라진다

 

제가 이런 비유를 자주 들죠. 내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데 딴 여자를 또 만나서 그 여자와 결혼해서 산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게 악이죠. 죄악이죠. 죄죠. 죄. 그런데 뭐 一夫多妻制 국가에서는 능력이죠. 능력.

그리고 또 一妻多夫制 티벳 같은데서는 한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산다.

그러면서도 그 남자들은 별일 안합니다. 여자가 일 다해요. 그러니까 여러 거느리고 살겠죠.

 

그러니까 보세요.

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래 없는데 자성이 없는데 단지 마음 따라서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은 두사람 세사람을 남편 아내로 데리고 산다. 이거는 죄입니다. 죄.

내 마음속에서 죄가 되죠. 우리나라 법에서도 죄라고 하고 그러니까 내가 죄의식을 가지면서,

바람피는 사람 어때요? 다 죄의식이 있잖아요.

 

그런데 딴 나라에서는 죄의식 가질 필요없이 데리고 살면 된다니까요. 죄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니 죄, 죄의식 이게 마음따라 일어나는 거지 어디서 일어나는 겁니까?

그 나라에서는 죄가 아닌데 여기서만 죄다. 이건 뭐 문제 있는 것 아니예요.

절대선 절대악이라는 건 없습니다. 마음따라 일어난 것 뿐이지.

 

그러니까 眞理라는 건 普遍的인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진리인데 딴나라에서는 진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인데 딴나라에서는 악이다. 이건 진짜 진리가 아닙니다. 어디가도 통용되는 理致가 진짜 眞理죠.

 

그런데 선악이라는 槪念은 時代에 따라 다르고 곳에 따라 다르고 自己信念에 따라 달라요.

제가 어떤 배타적인 타종교 믿는 사람은 스님들은 마귀라고 이러고 막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던데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단 말이죠. 그러면 제가 어느 곳에서는 선인데 어느 곳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진짜 저에게 그런 선이나 악이란 실체가 있어서 그럴까요? 그건 그 사람들의 마음따라 일어나는 겁니다.

그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진거예요. 自己가 生覺으로 分別妄想으로 이런 價値觀 저런 價値觀을 選擇했을 뿐이죠.

그것을 마음이라고 이름지어 觀念지어 부르지요. 아주 배타적 독선적인 문자주의에 치우쳐 있는 타종교를 믿는다.

그러면 다른 종교 믿는 사람은 다 나쁜 사람처럼 보이겠죠.

 

내가 그러한 생각을 그러한 견해 지견을 내 알음알이로 내 식으로 받아드렸으니까, 그렇게 망상을 피웠으니까,

그사람에겐 그게 죄업이 되는겁니다. 그사람이 절에 와서 강제로 절에 와가지고 기도를 시켰다. 절을 시켰다고 그러면 수치스럽겠죠. 엄청난 불경한 죄를  범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죠. 실체가 있어 그런게 아니라 마음에서 그렇게 느끼니까,

 

마음에서 그렇게 느끼면 진짜 벌을 받습니다. 왜? 벌은 내 마음이 끌어당기니까.

내마음 속에서 죄의식을 붙잡고 있으면 그 죄의식을 붙잡은거에 따른 果報를 宇宙法界에서 보내 주는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죄의식을 붙잡아서 강화시키고 있었으니까.

 

마음에서 자유로우면 죄의 과보에서도 자유롭습니다.그 래서 罪無自性從心起, 마음따라 일어난 것 뿐이예요.

죄라는 실체가 없어요.

여기서 죄인게 저기서는 죄가 안될 수도 있고

여기서 선인게 저기서는 악이 될 수도 있고

저기서 악인게 여기서는 선이 될 수도 있죠.

 

우리나라에서는 위대한 위인이 딴나라에서는 최악의 적일 수도 있죠. 전쟁통 속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이 위대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보면은 야 진짜 저 사람 우리나라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죽이고 이런 사람이 될 수도 있죠.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忘) 마음에서 만약에 그 죄의식이 한 마음이 멸할 때 죄 또한 멸한다.

當然한 말 아니겠습니까? 생각마음의식이라는 妄想으로 붙잡은게 죄니까 실체 없는거를 내가 실체로 만들어서

붙잡은게 죄의 실체니까 그 마음에서 딱 놔지면 죄 또한 없어지는거죠.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 죄도 마음도 사라지면 죄도 마음도 또한 텅~비어져서 空하게 된다.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다.

 

般若心經에서 말하는 色卽是空이다. 이소리와 똑같습니다.

物質만 空하다는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리가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모든 느낌감정 생각마음의식이 다 空합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인데 受想行識도 亦復如是다.

마음속에서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모든 感情 느낌 生覺 見解 欲望 罪意識 이런 모든 마음의

作用들  이게 다 텅~비어 空해서 固定된 實體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진짜가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진짜라고 내 스스로 죄라고 해서 내 스스로 요만큼 요만큼 요만큼은 죄야.

내 스스로 요만큼 요만큼 범하니까 나는 오늘 죄를 범했구나. 찜찜하게 느끼고

하다못해 여러분이 밤에 야 맥주를 먹으면 안돼 담배 피우는 사람은 야 담배 피우면 안돼

인스턴트 식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인스턴트 식품을 자꾸 먹으면 안돼. 살찌고 몸이 나빠져

자식들을 가르치는 부모님이 너가 자꾸 그렇게 그런 음식만 먹으면 너 아토피 생기고 안좋아.

이렇게 얘기한다 말이예요.

 

그런데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그런 것들도 먹어야 될 때가 있단 말이예요. 여러분 極端的인 올바름은 올바름이 아님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안좋은 음식도 아무리 안좋다 생각하는 술도 극단적으로 안좋다 생각하면 그건 어리석은 거예요. 극단적으로 안좋은 건 없습니다. 극단적인 악은 없잖아요. 불교에서

 

맥주를 먹습니다. 그런데 맥주를 먹으면서 뭐라고 생각하냐면은?아 이거 다 살로 되는 것이고 이거 먹으면 계율도

범하는 것이고 이것 먹으면 다 내가 진짜 안좋은데 하면서 안좋은 생각하고 안좋은 마음 가지면서 먹으면서 속으로 찜찜하고 찝찝하단 말이예요. 뭐하러 그러면서 먹느냐 말입니다. 어차피 먹어야 되면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햐~ 진짜 맛있다. 이런 마음으로 먹고

 

아이들 못 먹게 하더라도 너무 못 먹게 하면 그아이가 그게 병이 됩니다. 병이 돼서 더 먹게 되죠.

맛있게 먹게 할려면 기왕 맛있게 먹게 하려면 맛있게 먹어라 이렇게 해야지

화를 내면서 맘대로 해 다 먹고 니 죽든 살든 마음대로 해 이렇게 하지 말고, 맛있게 먹어라.

 

게임도 게임하면서 니 어쩌고 하지말고 옆에서 야 어떻게 하는거니? 같이 한번 해보자.

하고 같이 한번 해보기도 해보고 그러다 같이 중독된 엄마도 봤습니다. 제가, 그러면 안되지만

 

그러니까 절대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 말이예요.

그거는 내 머리속에서 요거 요거는 죄악이라고 내 마음이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分別妄想

내 마음 스스로 빠져서 내 마음 스스로 괴로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 뿐이죠.

 

제 친구가 초등학교 때 중학교까지 친구였던 아이가 너무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지고 일본 게임에 빠져 있으니까 정말 그 어머니한테 너무 너무 혼나는거예요.그런데 그 애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는 겁니다.집에서 안하고 몰래 밖에 나가서 매일같이 그것만 듣고 있는 거예요. 공부도 안해요 이 친구는, 맨날 외국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거예요.

 

저도 우습게 생각했어요. 저놈은 어떻게 맨날 저기에 빠져 있느냐?그런데 얘가 몇년뒤에 이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이 친구가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데 일본어로만 엄청 빠르게 따다다다 떠드는데 이 친구가 막 웃으면서 보는거예요.제가 신기해서 저거 다 이해가 돼? 당연하지! 다 듣고 있는겁니다. 그래서 일본어 배운적 있어? 한번도 안 배웠다는 거예요.한번도 배운적이 없는데 일본만화 일본 애니메이션 이거가지고 계속 듣다 보니까

그냥 일본어가 자유자재로 되는겁니다. 이친구는,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나중에 이 어머님이 내가 이럴줄은 몰랐다. 얘가. 그렇게 혼냈는데 이럴줄을 몰랐다고 깜짝 놀라면서

이 친구는 결국 일본어 관련된 쪽으로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게 진짜 나쁜지 좋은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악이다. 죄다. 복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 거기에 실체가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예요.

실체가 아니다. 無所得 本來 얻을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절대적인 죄를 짓지도 않고

단 한번도 절대적인 복을 짓지도 않습니다. 복이다. 죄다. 하는 거 전부가 다 사실 妄想속에 들어가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그 果報가 없다? 이건 아닙니다. 있습니다. 죄업를 지으면 죄의 과보를 받습니다.

복을 지으면 복의 과보를 받습니다.즉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그러면 죄무자성종심기니까

나는 죄를 짓고 마음에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겠습니다. 뭐 마음대로 해도 되요.

 

다만 남들이 나를 한대 때렸는데도 아프지가 않다. 나한테 욕했는데도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돈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부자가 되든 가난하든 아무 상관없이 언제나 여여하다.

그러면은 맘대로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法이 없을 때는 내가 事物을 쫓아 간다 말이예요. 돈을 쫓아가고 명예를 쫓아가고 쫓아갑니다.

眞理를 딱 깨닫고 보면 내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쫓아 온다고 그런 얘기를 한다 말이예요.

딱 깨닫고 보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게 다 선한겁니다. 모든 게 진리 그 자체다. 뭔 짓을 해도.

그러니까 그 사람은 뭔 짓을 해도 상관이 없어요. 흔적이 없으니까,그리고 그런 사람은

아예 법에 합당한 일을 하니까, 뭐 죄를 짓고 하는 자체가 없겠죠.

 

그런데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런게 있죠. 意識속에서 있죠. 虛妄하게 있죠. 虛妄하게...

꿈도 꿈은 진짜 있는거예요? 아니예요?  진짜가 아니지 않습니까?

깨면 끝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꿈속에서도 좋은 꿈이 있고 악몽이 있잖습니까?

 

꿈속에서는 그 악몽이 진짜지요. 진짜가 아닌데도 진짜 같다 말이예요.이게 현실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삶에서 복을 안지으면 가난하게 되겠죠. 복을 많이 지으면 부자가 되겠죠.

 

남들을 막 괴롭히면 내가 누군가의 괴롭힘을 당하겠죠.남들에게 부드럽고 따듯하게 잘 대하면 나도 행복감을

많이 누리겠죠. 그런데 그 행복을 느끼든 괴로움을 느끼든 그게 꿈속과 똑같다. 그게 다 虛妄한거니까, 錯覺 속에서

즐거워 하고 괴로워 하는 거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錯覺속에서 즐거워 하는 일을 자꾸 가르쳐 주는게 아닙니다.

錯覺속에서 즐거운거 살아봐야 뭐하겠어요? 그게 다 錯覺속 虛妄한 幻想일 뿐인데...

 

그러니까 金剛經에서 저 갠지즈강의 모래알만큼의 많은 宇宙, 世界, 三千大千世界가 있고,

그 모래알만큼의 어마어마한 三千大千世界를 칠보로써 금은보화로 가득채워 가지고 보시한다 할지라도

金剛經 가르침을 딱 제대로 깨달아 아는 것보다 더 큰 功德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죠.

 

그런데 앞의 재물보시는 생각 마음 의식 속 그 속에서 좋고 나쁜 관념 속에서 妄想 속에서 즐거운 거예요.

복을 아무리 지어봐야.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장식해봐야. 쉽게 말해서 꿈속에서 좋은 꿈을 꾸는 것 밖에 안되는겁니다. 아무리 그런 유위의 복을 짓더라도...

 

그런데 이 工夫는 이런 法의 工夫는 그걸 넘어 서는 공부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人間으로 한번 태어난 以上 여러분들이 정말 價値 있는 도전을 한번 해보고 싶다.

아이뭐 저 돈 많이 벌고 세속적인 그 어떤 대단한 것도 꿈속에서의 일이다. 망상속에서의 기쁨일 뿐이다.

그러니까 정말 뭐랄까? 大丈夫란 말은 南女 이런 얘기 아닙니다.法을 工夫하는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대장부로써 한번 인생 태어난 이상 한번 도전해 봐야 되죠. 뭔가 도전해 봐야 되는데. 뭐에 도전 할 것인가?

 

아이 뭐 지지부리한 돈같데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 이런 애들 장난감같은 제가 그렇다는게 아니고

부처님法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님法에서는 수조원이 된들 그게 애들 장난감밖에 더 되겠어요?

그런 거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정말 한번 멋있게 내가 한번 인생 한번 걸어보자. 내가 한번 이 법에 내가 한번 딱 목숨 걸어보자.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生覺하시냐면? 방법을 알아야죠. 방법을...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내지는 이런 얘기를 계속 한단 말이예요.

 

事實은 方法대로 하는 거는 다 知見입니다. 알음알이입니다.

方法/方便따라 하는거는 다 알음알이예요. 사실은. 方法없는 門없는 門이라고 그러잖습니까?

無門關이라고 그러잖아요? 門없는 門. 왜 門없는 門인지 아십니까? 제가 여러분들께 자주자주 말씀드리잖아요?

 

그래서 법문 듣고 나면 한편으로는 기쁜데 여러분들 제 법문 듣고 기쁜 날이 있어요.기쁜 날이 있고 뭔가 갑갑하고

진짜 화딱지가 나는 날이 있습니다.이해도 안되고 도저히 뭔 말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럴 때가 있어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좋은 날입니다. 뭔가 기쁜 날은 다 알아 들었다는 소리거든요.

 

아 알아듣고 기쁜건 뭐냐면? 알음알이 속에서 知識 속에서 理解가 됐다는 소리예요. 이건 妄想인겁니다.

그러니까 事實은 알음알이 지식을 늘리는 즐거운 법문을 해주면 여러분은 좋아 하시지만 법에서 있어서는

뭐 그렇게까지, 그냥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어떤 윤리적인 이런 공부는 될 수 있을 지언정

本質에서는 딱 공부를 하고 가면 더 갑갑하고 더 막막해야 됩니다.  법문 듣고 가면 더 막막해야되요.

 

아 우리 스님이 저렇게 얘기하는데 뭐가 저런 法이 있다하고, 眞理가 있다고 하고

이런 妄想 피우는게 아니라 정말 그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깨달음의 세계가 있지만 없습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분명히 있지만 얻을 바가 없단 말이예요. 없어요. 없어... 얻을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얻어야 된다 말이예요. 얻고 나면 얻을 바가 없는 것을 얻었다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된다. 선불교에서 견성해야 된다고 하니까,

초기불교 막 너무 치우쳐져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해요.부처님은 無我라고 하고 참나도 없다고 했는데

왜 대승불교는 참나가 있다고 하느냐? 없습니다. 없는 것을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는... 이래서.

없지만 없는게 아니란 말이예요. 있지만 있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없다 있다로 얘기할 수가 없어요.

 

輪廻 있습니까? 없습니까? 輪廻는 있죠. 그런데 없습니다.

깨달은 者의 입장에서 보면 輪廻는 없죠. 그런데 우리 범부 중생의 입장에서는 輪廻가 있죠.

누가 한대 때렸을 때 아픈 사람에게는 輪廻가 있는 거예요. 地獄도 있고 天上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法을 딱 깨달아 놨다. 그러면 모두가 한바탕 한마음 한성품 한뿌리 한생명일 뿐이지.

뭔 地獄이 따로 있고, 天上이 따로 있고, 罪가 따로 있고, 輪廻가 따로 있고, 이런거 모두 없습니다.

그런데 범부 중생의 意識次元에서도 業이 없다? 輪廻가 없다? 이건 어리석은 生覺이죠.

그러니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말이 바른 말이예요.이렇게 얘기하니 어때요 여러분? 답답하죠.

 

여러분들 제가 이렇게 들고(죽비를 드시며) 흔들 때 보고 있잖습니까? 저를 보고 있잖아요?

보고 있는 게 누가 보고 있습니까? 눈이 보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시신경이 보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보는 어떤 놈이 있다니까요. 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것...

 

이 소리(죽비를 치시며)를 듣는, 듣는 게 있다니까요. 듣고 있는 게... 말하고 있는 게 있고

그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일심이라고 하는 한바탕 한마음 한성품 한생명 한뿌리의 자리에서

모든 걸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이것 입니다.

 

여러분은 보지 않은 적도 없고, 듣지 않은 적도 없고, 움직이지 않은 적도 없어요.

행하지 않은 적도 없고 그 모든 것을 행하는 자리 그 모든 작용을 일으키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知見으로만 알음알이로만 알면 이거는 正答이 아닙니다.

이것과 딱 하나 되는 瞬間이 있단 말이죠.불교에서 견성이라고 하든, 이걸 체험이라고 하든, 하나 된다고 하든

 

그런데 나는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데 그 자리를 모르겠다.그런데 그 자리는 알음알이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냥 갑갑할 뿐이죠.방법은 없는데 알고는 싶은데 갑갑하다.알아야 되겠는데 답은 없다.

방법도 없다.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고.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고

그러나 마음은 간절하고 이럴 때가 공부 잘 하는 때다. 하는겁니다.이렇게 막막할 때가 공부 잘 될 때다.

 

그렇게 막막함이 있다가 탁~ 터지는 거 이게 話頭라는 거예요. 看話禪에서, 疑心, 疑問, 내가 누구인가?

맛보고 生覺하고 말하고 行動하는 진짜 나의 本質이 누굴까? 무얼까?? 本來面目이 누굴까? 뭘까? 도대체...

그것이 뭔데 이렇게 하나가 되지 않는거지? 체험이 안되는거지? 모른다 말이죠. 이 모름, 모름, 모름이 사무쳤을 때 이게 한번 탁~ 터지는 때가 있다. 이것을 禪에서는 見性이다. 見性成佛 이렇게 表現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어떤 길로 가는거냐? 간절한 어떤 發心을 가지고서 내가 그냥 딱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자리에서

오직 모를 뿐 하잖습니까? 숭산스님께서.오직 모르는 그 꽉 막히는 앞뒤로 어떻게 답을 낼 수 없는

오직 모르고 꽉 막히는 그런 상황이 지속될 때  그게 이제 공부가 잘 익어 갈 때란 말이죠.

 

야 이제 나는 법상스님이 하는 법문 이제 거반 이해 다 간다.맨날 하는 얘기 비슷비슷한 얘기고, 나는 이해 다 된다.

이건 이제 妄想 피우고 있는 겁니다. 知見으로 妄想을 피우고 있는 거예요.이해 되는 부분은 아 方便으로써 法을

설하기 위해서 方便으로써 法을 모르는 사람에게 요자리까지 제가 지금 말씀드린 그 자리까지 오게 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법문도 하고 생활속에 어떻게 하라고도 하고, 자식 얘기도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방편을 쓰는 거지.

그것만 이해 됐다고 끝이 아니고 그것만 얘기 한다고 해서 아 법문은, 불교는 그게 단가?

그렇게 얘기 할 것 같으면 저 심리상담하는 사람하고 뭐가 다르겠어요? 그게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 마음공부는 그게 끝이 아닙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상상해 보지도 못하고, 꿈꿔 보지도 못한, 그런 자리가 있다.

 

이걸 어떤 스님은 이 자리에 앉아 가지고 온 우주에서 일어나는 실상을 다 알 수 있고

손하나 뻗어 가지고 저 미국이든 아프리카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올 수도 있고

뭐 이 자리에 앉아 가지고 바로 머리카락이 몇개인지도 셀 수가 있고

온 우주 법계에 뭔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바로 이자리에서 다 알 수가 있다.

이렇게 표현도 했단 말이죠. 말로 표현을 한거고.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죠.

 

마음공부는 온 宇宙法界와 둘이 아니게 되는거니까, 둘로 나누는 게 하나도 없는 거니까,

보고 듣고 맛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너와나 생각 말 언어 뭐 듣는것 말하는것 이것이 둘이 아니 하나란 말이죠.

다 하나로 한바탕 한뿌리 한성품 한마음 한생명에서 일어나는 꿈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일 뿐이니까.

 

그 텅~빈 한바탕과 하나되면 한바탕인 꿈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에서 뭐가 일어나든,

즉 꿈속에서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부자가 되든, 가난하게 되든, 법문을 듣든, 남자가 되든, 여자가 되든,

미국을 가든, 안드로메다를 가든, 꿈속에서는 뭔짓도 마음대로 다 할 수가 있잖아요.

그러나 꿈을 깨고 보면 꿈 속 모든 게 虛妄한 錯覺 아니겠습니까? 허망한 것 아니겠어요? 그것과 똑같다.

 

그런데 그러니까 우리는 밤에는 눈을 감고 자고, 낮에는 눈을 뜨고 자는거죠.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다는 錯覺 속에서 살고 있는 거고. 죽었을 때는 그냥 온데로 가는거죠. 본래 자리로.

본래 왔던 데로 다시 가는 거죠. 죽고 산다는 것도 괴롭다는 것도 意識의 虛妄한 錯覺 일 뿐인거죠. 不去不來죠

 

어 이렇게 오늘 理懺悔를 誤解 하거나 誤認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참된 내가 참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 알고 나면

크게 죄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하면서 수행하면서 살수 있게 됩니다.

내가 수행 못한다는 錯覺, 내가 죄를 지었다는 錯覺 이런 데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걸림없이, 정말 따듯한 마음으로...

 

아 ~ 나는 宇宙法界의 無限한 慈悲心 속에서 언제나 보살핌을 받고 있구나! 하는

어떤 어머님 품 속과도 같은 이런 듣든함 같은 것들이 불법을 공부하면 탁 생긴다 말이예요.

 

언제나 나는 잘못 할 수가 없구나! 잘못 될 수가 없구나! 언제나 이 아름다운 完全性이 있을 뿐이구나!

다만 지금 妄想 피우느라고 그 妄想 幻想이라는 생각마음의식 속에서 내 意識이 괴로운 것처럼 느낄 뿐이지.

그러니까 내가 그 妄想만 거두면 되는거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妄想을 바라보는 공부를 해야 된다 말이죠.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