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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경 --- 여래십대발원문

장백산-1 2014. 11. 8. 01:55

 

 

법상스님의 천수경 강의 제15강 - 여래십대발원문|영상법문 녹취록

 

 

천수경 지난번에 준제진언 보품?까지 했구요. 그리고 이제 如來十大發願文 부분을 할 차례입니다.

여래십대발원문은 여래 열가지 큰 서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여래가 되려는 우리들이 가져야 될 열가지 발원

이러한 발원을 원을 세워서 정진하고 발원을 해라 하는 부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가는지 우리가 수행하고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열가지 원을

내가 어떤 원을 세우는 게 좋을까? 여기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아마 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원컨대 내가 영원히 삼악도를 멀리 여의기를 발원합니다. 먼저 이런 의미가 되겠죠.

삼악도 하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지옥 아귀 축생의 어떤 세가지 악도, 악도에 태어나는 것을 여의기를 발원합니다.

 

그래서 탐심을 일으키면 아귀, 치심을 일으키면 축생, 악행을 많이 했을 경우에는 지옥에 간다고 그러는데

보통 우리들은 이생에 살면서 어지간한 그야말로 탐진치 삼독심을 과하게 일으키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우리의 밑에 우리의 어떤 의식수준보다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는 힘들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축생의 나중에 개나 돼지로 태어나지 않을까? 지옥가서 태어나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들이 많은데

 

보통은 그러지 않지요? 특히나 일반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같으면 더욱 더 그렇지 않겠죠.

그런데 삼악도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했을 때 아 내가 죽고 나면 지옥에 가서 태어날 수도 있고

뭐 축생으로도 태어날 수가 있고 천상에도 태어날 수가 있고 이런 것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어 어찌보면 삼악도라는 건 또 삼선도라는 거 모두가 우리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가 있어요. 꼭 여섯가지의 길만 있느냐?

윤회를 할 때 꼭 여섯가지만 딱 정해져서 가느냐? 그것도 아니구요.

내가 어떠한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좀 쉽게 말하면 그겁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해서 어떤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마음속에

내가 마음 속에서 演習한 것이 그대로 내 안에 연습이 되어 있는 거죠.

선행을 많이 연습한 사람은 선의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잖습니까?

선의 과보를 많이 받는 곳에 가서 태어 날 수 밖에 없겠죠.

천상이라는 그런식으로 표현을 해놓은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지구상에도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도 어느 날은 축생에 가까운 때도 있고

어느 날은 지옥같은 삶을 살 때도 있잖습니까?

이것처럼 삼도라는 것 자체가 명확하게 요만큼 선을 그어서 이만큼은 지옥이고

여기 딱 경계를 그어서 이만큼은 무슨 인간이고 이만큼은 천상이고

이렇게 어떤 실체적인 어떤 세계가 있다. 이렇게 이해하기 보다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행위의 파장이 그대로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한 행위가 그대로 내가 받을 수 밖에 없는 과보를 초래한다.

그래서 그렇게 나쁜 업을 많이 지을 경우에 나쁜 과보를 초래하지 않겠습니까?

삼악도라는 과보를 받지 않겠어요?

 

그래서 원컨대 삼악도를 기리 여의기를 발원합니다. 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삼악도를 여의려면 당연히 선한 탐진치 삼독을 일으키지 않고

또 선행을 많이 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삼악도를 여윌 수가 있겠죠?

 

그래서 첫째로 깨달음을 얻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장 처음으로 세워야 할 원이 이겁니다.

다시 말해서 삼악도를 가게 되면 안좋은 분위기, 안좋은 환경, 안좋은 조건 속에 가게되면

거기서는 수행 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되고 복을 지을 수 있는 환경도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우리 주변이 하루하루 맨날 지옥같다. 그냥 탐심에 사로 잡히고

어리석음에 사로 잡혀서 지옥같은 이런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수행하겠습니까?

뭐 복을 짓겠어요? 그게 잘안된다 말이예요. 주변에 도반도 있고, 수행하는 도반들도 있고,

복 짓는 도반들도 있고 이런 어떤 삼선도의 좋은 분위기 속에 있을 때

나도 그냥 덩달아 분위기 그 波長에 함께 얹혀가는 거예요. 다시말해 共鳴을 하는 겁니다.  

 

쉽게말해서 業報의 法則이라는 것은 共鳴의 法則과도 비슷해요.

어떤 行爲를 하는냐에 따라서 그 행위와 비슷한 波長을 계속 만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절에서 불교에서는 초기경전에서도 좋은 친구 사귀는 것을 깨달음의 전부라고

하는 이유는 좋은 친구를 주변에 많이 두는 것은 그 자체가 분위기 波長 자체가 좋은 波長

좋은 에너지 좋은 業의 분위기와 내가 함께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걸 닮아 갈 수밖에 없죠. 共鳴의 법칙에 따라서 함께 같이 振動하는 어떤 共鳴의 波長에 따라서 같아진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뭐 사기꾼이 많은 곳에 가든가. 뭐 이런 것 보다는 절에 자주 나오면

절의 波長 절에서의 어떤 밝고 원만한 波長 이런 것들이 자꾸만 연습이 되면,그것들이 내 삶에 또 共鳴을 하겠죠.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에는 절에 나오고 법문을 듣고 시간 되면 한번씩 초하루나 보름에 절에 가서

뭐 법문 들을 수 있음 듣고 일요일날 시간이 뭐 되면가서 법문도 듣고 아니면 말고 

아니 내가 뭐 바쁜 일 있음 못가는거고 이런 마음 자체가 내 생활의 주가 되는 거잖아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좀 잘살까? 돈도 벌까? 좀 내 생활, 내가 노는 생활, 돈 버는 생활.

내가 자식들 키우는 생활 즉 쉽게 말해서 이 세속 생활, 세상 사는 게 더 주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한 생각 돌이킨다면 여러분이 공부의 진도가 빨리 나가려면, 공부의 진도가 빨리 나가려면

그리고 내 마음의 波長이 내가 工夫가 제일 먼저다. 공부가 제일 먼저다.

 

우리 저 보살님들 보니까 목요일 금요일날 뭐 불교 공부를 한다. 불교 아카데미를 한다.

이러니까 그날은 뭐 아예 약속 안 잡고 싹 빼놨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시던데, 그런 자세입니다.

이게 뭐냐하면? 이게 내 마음속의 비중, 마음속의 發願을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무엇을 내가 중점적으로 여기고 있느냐? 이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걸 의미하는 거예요. 근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왜 중요하냐면은요?

 

世上은 백퍼센트 모든 것이 다 어떻게 願을 세우느냐? 어떻게 마음을 내느냐?

어떤 것이 내 人生의 主가 되느냐? 그것에 따라서 世上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式으로 願을 세우느냐에 따라서...

 

심지어 깨달음도 내가 설마 깨달을 수 있겠어 하는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안오지만

반드시 이생에 깨닫는다 하는 사람에게는 이생에서 깨달을 수 있는 因緣이 찾아온다는 말이예요.

부자도 마찬가지 부자의 願을 세우는 사람에게 부자가 오지 않겠습니까?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중점적으로 여기는 내 마음 속에 비중이 있는 그것이 내 삶의 現實이 됩니다.

 

절에 오는 것은 내가 佛法을 더 닦겠다. 道를 닦겠다. 뭐 깨달음을 얻겠다. 뭐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걸맞는 좀 쉬운 말로 제가 바꿔 드리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좋고 나쁜 周邊 狀況속에 휘둘리면서 사는 것,

돈이 많을 땐 행복했다가, 돈이 없으면 괴롭고, 누가 나에게 시비걸고 욕했다면 괴롭다가 칭찬해주면 행복하고,

좋은 집사면 좋았다가 좁은 데로 이사 가게 되면 괴롭고,자식이 잘 될땐 행복하다가 자식이 잘못될 때는 괴롭고...

이렇게 끊임없이 지금까지 휘둘리는 삶을 살아 왔잖아요?

周邊 與件이나 狀況이나 條件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왔단 말이예요.

이거 억울하고 답답하단 말이죠.나는 왜 이렇게 밖에 못살까? 왜 이렇게 살아야 될까?

전 사실 너무 속상하고 답답하고 너무 정말 당황스럽고

왜 나라는 이 주인공이 이렇게 세상에 휘둘리고 살아야 되는가?

이 삶의 조건에 휘둘리고 살아야 되는가? 그게 억울하거든요. 답답하고,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냐? 언제나 딱 中心잡힌 幸福, 어떤 이런 삶은 없을까?

어떤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부자 가난 이런거 뭐 말도 할 것 없이,

生死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딱 中心 잡힌 삶이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工夫하는 게 절에와서 공부하는 거거든요.

 

이 工夫를 내가 하겠다 하는 願을 세우는 게 重要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내 마음속의 비중이 절이야 그냥 뭐 심심할 때 한번씩 가는 거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 공부는 그야말로 이제 몇 생 뒤로 늦춰집니다. 몇 생이 걸려요. 그렇게 공부하면...

조금 조금씩 因緣 짓는 것 밖에 안되니까,

 

그런데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도 마음속에 法門 듣는 시간이 제일 좋고,

工夫하는 시간이 제일 좋고, 절에 오는 게 뭐 이렇게 친한 사람도 있고 이런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뭐 친한 사람도 있고 재미나고 이래서 오는 것도 처음에 그렇게 인연을 쌓는거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工夫하러 와야 된다 말이죠.

 

工夫하러 와서 내가 工夫하는 게 제일 즐겁다. 정말 이 工夫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이 工夫만은 꼭 하겠다.이런 마음을 탁 가지게 돼서 자꾸 절에 찾아 오고

자꾸 道伴을 만나고 자꾸 스님을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그렇게 되는 게 내 마음의 波長이

어디에 딱 맞춰져 있는 거냐면? 三惡途에 맞춰져 있는 게 아니라 三善途

또는 삼선도를 뛰어 넘는 工夫와 智慧에 맞춰져 있단 말이예요.

六途를 훌쩍 뛰어 넘는 出世間의 큰 工夫의 내 마음의 波長이 딱 맞춰져 있다 말이예요.

 

내 마음의 波長이 어디에 맞춰져 있을 것인가? 그것에 따라서 내 工夫가 익어가는 게 結定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빠른 게 없습니다. 제가 몇 번을 말씀 드렸는데 절 삼천배 만배를 잘하거나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 열시간씩 앉아서 참선을 잘하거나염불 간경 독경 이런걸 잘하거나

몇시간을 탁 결가부좌를 하거나 아니면 호궤합장을 하고 금강경을 7독을 하거나

이런 사람이 수행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라고 옛날에 禪師들이 다 그렇게 얘기 했단 말이예요.

부처님도 苦行은 이거 修行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셨고...

 

第一  重要한 核心은 이거 한가지입니다.

내가 마음의 波長을 어디에 맞추느냐? 즉 어떻게 願을 세우느냐?

부처님과도 같은 願을 세우면 된다. 願을 세우는 것이 나를 끌어 갑니다.

나의 스승은 다른 게 아니라, 願이다 말이예요.그러니까 내 바깥에 스승이 있는 게 아니구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어떻게 願을 세우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마음의 波長을 어떻게 딱 모으느냐에 따라서

내가 마음에 願을 세운 그 願이 그대로 내 人生을 끌고 가는 스승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어떤 願力을 세워서, 야 내가 정말 이 貪瞋癡 三毒心을 여의고 정말 이 공부를

한번 해봐야 되겠다. 정말 내가 중심 잡힌 이런 삶을 살아봐야 되겠다.뭔가 이 智慧를 내가 깨달아 봐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마음속에 담아 놓고 사는 사람과 그냥 시간 되면 절에 한번 가보지.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

이 두사람은 겉에 보기에는 똑같이 절에 열심히 나오는데 天差萬別로 달라 진다는 말이예요.

 

법문 시작하면 한 시간 삼십분 사십분 보통 일요법회는 사십분 설법하고 祭일때는 삼사십분 하는데 아이

이거 길어서 이십분 삼십분 지나면 빨리 좀 안 끝나나.빨리 좀 끝나야지 생각하면? 이건 뭐 法에는

별 關心이 없는 것이죠.빨리 끝내고 밥먹고 저 도반들 하고 얘기 나누고 이런 게 더 關心事인 사람이겠죠.

 

그런데 아이 왜 우리 스님은 삼십분 사십분 밖에 설법을 안하나?

어렵게 여기까지 차 끌고 비싼 기름값 내가지고 내 귀한 시간 내가지고 왔는데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좀 해주지. 이런 마음이 사실은 나야 되죠. 이런 마음이 나야죠.

그래서 설법 끝나는 게 가슴 아프고 이래야 된다. 사실은.

 

정말 法을 듣고 싶고 그런 마음이 들어야 되는 거거든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삼십년전 쯤에 이십년전 쯤에 그 때는 법문 들을 수가 없었잖아요.

어디 법문 하는 절이 없었거든요.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법문 하는 스님이 없었습니다.

너무 법문을 듣고 싶은데 그래가지고 정말 어렵게 어렵게 법문 들으러 다니고 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나거든요.  

지금은 정말 이 法을 들을 수 있는 機會가 많으니까,

 

그래서 내가 법을 듣겠다라는 이 마음을 딱 이렇게 초점을 맞추는 거

그렇게 맞추고 사는 사람, 내가 복을 짓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

내가 될 수 있으면 욕심을 좀 여의고 살아야지. 욕심 부리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보다.

공돈 어떻게 안 생기나 하고 어떻게 내가 좀 대박 안나나 하는 마음보다

어떻게 내가 소박하고 滿足하며 살아야지하는 이게 貪心을 여의는 거거든요. 아귀를 여의는 마음이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선행을 많이 하는가? 이게 이제 악행을 여의고 지옥을 여의는 삶이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痴心을 여의고 밝은 智慧를 證得해 볼까? 이런 마음이 축생의 치심을 여의는 마음이거든요.

이런 마음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삼악도를 여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뭐 우리가 죽고 나서 따로 삼악도 안가길 막 발원하고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어떤 곳에 마음의 초점이 맞춰져 있느냐? 이걸 보면 내가 죽고 나서 갈 데가 훤히 보이죠. 훤히...

내가 마음을 어디에 焦點 맞추고 사는지 마음의 中心을 어디다 두고 사는지를 보면

죽고 나서 똑같은 마음의 波長 그대로 가는 거니까,

 

그런 얘기가 있잖습니까? 이렇게 딱 죽고 나면 第一 먼저 오는 우리를 데리고 가는 건 저승사자가 아니고

저승사자가 우리한테 확 오는 게 아니구요. 딱 죽자마자 第一 먼저 오는 건 저 最高 높은 天上世界에 있는

天神들이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 無色界 저 非上 非非上天에 있는 가장 높은 天上世界  工夫 많이 한  工夫 많이 한 天神이 와서

우리를 데리러 가려고 탁 마중을 온다 말이죠. 그런데 천신의 波長이 너무 밝아가지고 우리 波長이 안맞는 거예요.

우리가 거부한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따라 못가겠습니다. 하고 거부한다 말이죠.

내 波長의 周波數는 낮은데 저 너무 高次元 波長의 周波數니까 못 따라 가는 거예요. 내가

 

그러니까 이게 이제 우리가 죽고 나면 뭐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審判해서 염라대왕이 심판을 해가지고 나를 어디로

확 집어넣고 너는 잘못했으니까 지옥으로 확 던져버리고 이런 재판관이 염라대왕 부처님 신이 아니란 말이예요.

아닙니다. 내가 한다 말이예요. 내가...

 

그 좀 더 밑에 波長 周波數 次元, 밑에 次元 神들이 계속 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내 波長 周波數와 딱 맞는 程度 水準의 天神이 날 데리러 올 때 그 때쯤 되서야

내가 따라가겠습니다. 따라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惡業을 지은 사람은 천상세계나 이런 좋은 삼선도에 있는 천신들이 나를 데리러 올 때는 안 따라 가다가

지옥에서 온 사신 지옥에 있는 아주 어둡고 濁한 波長을 가지고 있는 使神이 나와 共鳴하거든요

마음의 波長이 一致를 이루니까 그 地獄에 있는 使者가 가장 아름답게 여겨진다는거죠.

그 地獄에서 온 使者를 쫓아 간다는거죠. 그러니까 지옥에 가는거죠.

그러니까 내가 가는 거지. 누가 보내 주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내가 간다.그 때 어떤 왜 판결을 하겠습니까?

내가 평소에 마음 속에 무엇을 演習해 놓았나에 따라서 그대로 가게 되어 있다.

 

그 다음에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痴) 원컨대 내가 속히 탐진치를 끊기를 발원합니다. 했단 말이죠.

이제 우리가 끊어야 되는 세가지가 이제 탐진치 삼독이라고 했고 탐진치 삼독심은 나다하는 我相에서 온다고

그랬습니다. 나다하는 我相이라는 것이 내가 있다고 生覺하는 錯覺하는 마음이죠.

내가 있고 내 바깥에 世界가 있다. 이렇게 錯覺하는 겁니다.

 

내가 있다라고 錯覺하니까 내것을 더 늘려야 되겠다라는 生覺으로 貪心을 내고

내가 있다고 錯覺하니까 내 마음대로 안될 땐 화가 나는 성 내고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내가 있다라는 그 錯覺 그 自體가 바로 癡心을 가져온다는거죠. 어리석음,

내가 있다는 錯覺이 貪瞋癡의 原因이 된다.  

 

나라는 存在는 因緣에 따라서 잠시 잠깐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지.

이 몸뚱아리가 진짜 나인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가 있다라는 虛妄한 錯覺을 하니까,

거기서 貪瞋癡  三毒心이 생긴다. 그래서 탐진치 삼독심이 있었을 때 우리 삶은 괴로울 수 밖에 없죠.

탐진치 삼독을 가지고 뭔가 좋은 거는 붙잡아 貪하고, 싫은 거에 대해서 화내고 성내고,

좋은 거는 더 執着하고 싫은 거는 밀어 내려고 하는 그 마음이 癡心이거든요.

더 붙잡고 밀쳐내려는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바로 貪瞋癡 三毒心에 起因한다.

 

그래서 삼독심을 속히 끊고자 발원해야된다. 그러니까 三惡道를 여의고 三毒心을 끊는다.

第一 먼저 이 두가지가 나왔단 말이예요. 나쁜 것들을 먼저 끊어 없앤다.

이게 왜 그러냐면? 제가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 破邪顯正이라고 해서 바른 거를 向해서 막 쫓아 가는 것보다

더 重要한 거는 삿된 거를 여의기만 하면, 그냥 바른 게 드러난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지금 이자리에서 부처(佛)이기 때문에 그래서 眞理 아님이 없고, 밝은 光明 아님이 없기 때문에

애써서 부처를 찾아야  되거나 眞理를 찾거나 깨달음을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던 妄想 分別 貪瞋癡 三毒心만 없애버리면 그리고 마음을 밝은 곳으로 向하기만 하면 三惡道가 아니라 三善道 쪽으로

밝은 쪽으로 마음을 向하기만 해도 그렇게 바뀐다.

 

왜 그러냐하면? 破邪 삿된 것을 破하면 顯正 바른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미 完全한 存在이기 때문에 그래요. 조금도 不完全한 存在가 없습니다. 부처 아닌 존재가 없고

진부하게 설명한다면 그런데,  지금 이자리에서 여지없이 부처다. 여지없이 부처다.

내 分別 妄想만 貪瞋癡 三毒心만 分別心만 놓을 수 있다면 지금 이대로 부처다 진리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애써서 부처를 찾는 게 아니라, 이 妄想, 妄想을 가지고 자꾸 괴로움에 波動 周波數를

맞추는 三毒心을 여의고 자꾸 삼독심을 가지고 있는 삿된 마음을 여의기만 해도

우리 마음은 저절로 밝은 것과 진리가 저절로 나에게 오게 되어 있다. 이미 있는 眞理를 보게 되어 있는 거죠.

우리는 애써서 眞理를 찾아가야 되는 存在가 아니라, 그동안 眞理를 보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던 煩惱 妄想 이런

것만을 여의면  저절로 진리 부처 깨달음이 드러난다는 거죠.

 

그 다음은 이렇게 두가지 삿된 것을 먼저 여의겠다는 發願을 세우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해야 되는 것이 참되게 發心을 하는 거예요.

工夫하겠다. 마음공부를 정말 하겠다하는 마음을 비로소 세우는 겁니다.

 

첫번째가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불법승 삼보님의 이름을 항상 듣기를 원하옵니다. 발원합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스님들을 언제나 따르면서 언제나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또 스님의 가르침들을

언제나 따르면서 그 이름을 항상 들으면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으로 내가 발심을 하겠다. 하는 얘기입니다.

 

즉 내 마음이 언제나 이런 三惡道에 와 있는 게 아니라, 佛法僧 三寶에 가 있는 거예요.

초기불교 경전에 보면 두려움에 빠졌을 때 힘이 들 때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부처님께 질문을 하는데, 부처님께서 불법승 삼보를 生覺해라. 불법승 삼보를 떠올려라. 불법승 삼보에게

歸依하는 마음을 가져라. 그렇게만 해도 이 두려운 마음에서 놓여날 수 있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불법승 삼보님을 恒常 마음속에 간직해야 된다. 이게 아주 重要한 말입니다.

이게 대개 기본적이고 쉬운 얘기인데, 너무 중요한 얘기입니다.

내 안에 나는 어리석은 衆生이 아니라, 衆生 卽 부처거든요. 중생이 바로 부처거든요.

나는 중생으로써의 모습으로 이렇게 살고 있지만 事實은 내가 중생이 아니라,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마음을 언제나 잊지 않고 살아야 된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마음은 부처로 向하고 있는 거잖아요? 중생으로 向하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

그러면 그 마음따라 가게 돼 있다니까요. 發願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나는 願을 중생이니까, 부처가 되려면 멀었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現實이 벌어지는데,

 

내가 바로 부처다. 내가 바로 부처다. 내가 지금 부처로 드러나지 않고 부처로 확인하지 못해서 그렇지,

언제나 부처를 쓰고 있고 부처와 함께 잠을 자고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부처와 함께 먹고 부처와 함께 말하고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있다면 보고 있다는 것은 부처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이 보고 있다라는 것은 妄想을 따라가면 煩惱 妄想을 따라가서 보게 되면 이건 境界가 되고,

보이는 境界가 되잖습니까? 눈 眼根으로 보는 色境이 되죠. 눈으로 보는 境界가 되지만,

그 識 알음알이 分別心이라고 하는 六根 六境 六識 할 때 六識 말이죠. 意識, 意識으로 分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딱 보게 되면 있는 그대로 소리(손바닥을 치시며)를 듣게 되면 이 소리(손바닥을 치시며)를 듣고

아 그 손바닥으로 박수 치는 소리이구나. 解釋하지 말고 意味를 따라가지 않고 그냥 소리나는 自體 波長으로만,

듣게 되면 그 듣는 그 者가 부처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平素에 習慣이 안되어 있죠. 보면 아 부처님이고 아 스님이고

이건 좋은 거고, 이건 나쁜 거고 解釋을 따라가니까 이젠 衆生인 거죠.

그러니까 눈 뜨고 있는 사람은 다 부처입니다. 보고 있다라는 것,보는 者가.

바로 부처가 있어야 보니까, 듣을 때는 부처가 있어야 들으니까,

 

그러니까 언제나 우리는 부처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부처와 함께 있다.

이런 온전히 굳게 믿고 그 부처가 되는 그 부처의 길로 가겠다. 하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게 歸依거든요.

부처님께 歸依 하는 것

 

그리고 내 안에 法이 있다. 바깥으로 그 어떤 法을 찾아 갈 게 아니라, 내 안에 답이 있단 말이죠.

내 안에 정답이 있다. 내 안에 언제나 나를 이끄는 참된 스승이 내안에 있다.

그 모든걸 내 안에 탁 맡겨 놓으면 내 안의 부처가 나를 이끌고 갑니다.

分別하지 말고 우리 마음은 分別心을 따라가잖아요. 生覺을 따라가잖아요.

生覺과 判斷을 따라가서 내 生覺이 옳다고 生覺하니까, 生覺과 判斷을 따라가는데

生覺과 判斷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내 안에 탁 맡겨 놓으면 내안에 있는 法이 저절로 나를 끌고 간단 말이죠.

언제나 우리 안에는 法이 具足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게 좋을까? 저렇게 하는 게 좋을까? 生覺으로 하면은 答이 안나온단 말이예요.

탁 내 맡기면 내 안에 있는 부처가 답을 내 준다 말이죠.그런 방식으로 삶을 法을 언제나 依持해서 살아가겠다.

내 안에 있는 참된 法을 依持해서 살겠다. 이게 法을 恒常 듣는 것이구요.

 

또 僧이라는 것은 내가 스님의 말씀을 잘 따르겠다. 스님의 법문을 잘 듣겠다. 이것도 하나의 승에 귀의하는 거지만

또 하나는 뭐냐면? 내 안에 欲心을 따라가고 欲心 부리겠다. 뭔가 내가 한번 成功해보겠다하는

뭐 이런 어떤 煩惱 妄想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뭔가 부처님을 닮고 싶고 깨달음을 갈구 하고 싶고

뭔가 참된 행복을 추구하고 싶고 뭔가 진지한 진리를 갈구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스님의 마음이예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숨어 있는 수행자의 마음

 

그러니까 우리는 겉으로 봐서는 衆生이지만 겉으로 봐서는 내 職業이 따로 있잖아요.

주부라는 직업이 있고 무슨 뭐 학생이라는 직업이 있고 나름대로의 직업이 있겠지만

우리의 根本은 누구나 修行者라는 職業을 가진 存在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本質的인 職業은 누구나 修行者 이거든요. 職業이라고 말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부처고 법이고 수행자이고 스님이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 속에서 기도하고 수행하겠다는 마음을 내면

나는 그 자리에서 스님이 되는겁니다. 승보가 되는 거예요. 승보가...

 

그러니까 중생의 마음을 따라가지 말고 승보의 마음을 따라간다.그것을 내 마음속에 담고 있겠다. 하는 발원을

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나 불법승 삼보님 이름을 항상 듣고 내가 바로 佛法僧 三寶라는 事實을

내 안의 自性 三寶에 언제나 歸依 하겠다라는 마음으로 언제나 불법승 삼보

나라는 存在는 중생이 아니고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고 불법승 삼보다 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불법승 삼보를 항상 마음속에 담는 것, 그러기를 귀의 하는 거죠. 그러기를 발원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내안의 불법승 삼보가 나를 끌고 가는 엄청난 힘이 갖춰집니다.

이 불법승 삼보를 내안에 담는다는 그 자체는 그 저 티벳불교 같은 데서는 보면은 대개 뭐랄까 좀 신비주의적으로

아주  엄청나게 아름답게 포장을 해놔 있어요. 그런데 그 말이 틀리지가 않습니다.

삼보 이것만 탁 내가 귀의하겠다고 하고 내가 아무리 逆境에 처하더라도

불법승 삼보님만 탁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 이것만 딱 해도 죽고 나서도 절대 지옥에 끄달려 갈 일이 없다.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귀의 불법승 하는데 있어서 그 마음만 내면

아주 어떤 놀라운 신비적인 신비로운 힘이 담긴다. 이렇게 까지 얘기한다 말이죠.

 

그 다음에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삼보님을 항상 내 마음속에 담고 있은 다음에 원아근수계정혜

원컨대 내가 부지런히 닦기를 발원하는데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힘써 닦기를 발원합니다.

처음에 공부할 때 어떻게 하냐면? 이렇게 삼악도를 여의고 탐진치를 딱 여읜 다음에 그 다음에 밝은 것

불법승 삼보를 마음속에 품고 이제 계정혜 삼학을 닦기 시작하는 겁니다.

 

법당에서도 처음에 삼보 삼귀의를 먼저 하잖아요. 그리고 법문을 듣잖습니까? 법문이 전부다 계정혜 삼학을 닦는

거고 그 다음에 나오는 諸佛學 부처님이 가르쳐 준 것을 배우는 것이고 또 보리심을 닦아 가는 것이 거든요.

 

그래서 먼저 工夫하는 데 있어서 첫번째로 戒定慧  三學을 닦는다.

즉 계율, 계율을 먼저 닦는다. 계율 자체는 절대적인 어떤 진리, 절대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方便의 眞理입니다. 方便의 眞理. 쉽게 말해서 殺生을 한다. 내 마음이 좀 거리낌이 생기잖습니까?

누구 막 죽였는데 마음이 便할 사람이 없잖습니까?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修行이 되겠습니까?

수행이 안된다 말이예요.그러니까 불살생, 살생하지 마라.하고 

 

불투도 도둑질 하면 거리낌이 생기니까, 이거 찜찜해가지고 수행이 안된다 말이예요.

수행에 장애가 되는 가장 큰 다섯가지를 얘기한겁니다.이거를 여의여야지만 수행에 딱 집중하기가 좋다.

이 소리예요. 그래서 이거는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래서 열고 닫을 줄 알아야 된다. 그래서 開遮法을 얘기하잖습니까?

 

그래서 이 수행을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은 다른 데 雜生覺에 거리낌이 없고,

마음이 淸淨해져서 마음이 그냥 흔연해지기 때문에 내가 이제 定을 닦기가 쉬워져요.

그래서 그래야지 定을 닦으면 고요한 마음, 마음속에 번뇌로 오염된 마음이 아닌 고요한 마음이

끊임없이 번뇌 분별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대신 고요한 禪定의 마음 이게 이제 닦여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定을 닦기 위해서 뭐 念佛에도 集中을 하고 무슨 절도 하고 수많은 修行法들이 이렇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定만 닦아서 되는 게 아니라, 禪定속에서 慧가 나온다 말이예요. 智慧가 나온다.

智慧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觀하는 것이라고 힐 수 있는데, 觀을 하게 되었을 때 거기서 智慧가 생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定을 닦고 연이어 智慧를 證得하는 이 계정혜 삼학을 공부하겠다. 삼학을 닦겠다.

이 모든 공부는 정혜, 정혜, 정혜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혜를 닦으려면 계를 계가 우선되지 않은 사람은

정혜를 닦을 수 없기 때문에 정혜를 닦는 데 있어서 이 두가지 양대 가장 핵심이 되는 가장 기초 토대가 계란 말이죠.

계정혜 삼학을 힘써 닦으며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修諸佛學)

원컨대 내가 항상 모든 부처님의 공부를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항상 배우기를 발원합니다.

항상 닦아 가기를 발원합니다. 부처님을 따라 항상 배우겠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주신 모든 공부들을 언제나

내가 배우겠다. 하는 마음을 내고 부처님 가르침을 언제나 곁에 두고 언제나 부처님 가르침 법문을 듣고 하는 마음을 내겠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항상 따라 배우겠다.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컨대 내가 불퇴 퇴전하지 않기를 발원한다.

보리심에서 퇴전하지 않기로 발원한다. 이거 아주 중요한 얘기인데요.

보리심 보리는 깨달음인데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보리심인데

그래 내가 한번 깨달음을 구해봐야 되겠다. 내가 깨달아 봐야 되겠다.

내가 이생에 왔는데 이생에 와서 내가 한번 내 마음 걸고 목숨걸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이 보리심 밖에 없거든요. 어떤 보살님이 그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眞心으로 너무나 人生이 虛妄하다는거예요. 요즘에 너무 허망함을 느껴서,한편으로 우울증 같은 게 오면서

너무 허망하다는 거예요. 허망하니까 자꾸 이 허망감을 채우려고, 자꾸 이걸 채우려고 애들이 학교가기 시작했을 때,

너무 이제 허망하니까, 뭐가 허망하냐 그랬더니 남편은 이렇게 회사에서 승승장구 하면서 잘 나가고 있고

돈도 잘벌어 주기 때문에 남들이 봤을 때는 허망한 게 하나도 없는 보살님이거예요.

잘살고 애들도 잘크고 공부도 잘하고 다 잘하니까,

 

그런데 이분은 남편은 남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고 뭔가 많이 배우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식들은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는데, 나는 애들 키우느라 맨날 밥해주고 공부 시켜주고 이거나 하지.

뭔가 내 마음에 空虛感을 채울 게 없다는 겁니다. 내가 나중에 나이가 더 들었을 때, 노후가 되었을 때

이렇게 그냥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겁니다. 그래가지고 뭔가 이 空虛感을 채우려고

뭔가 배워야 되지 않을까? 이래가지고 처음에는 이것도 배우려 다니고 저것도 배우려 다니고 동사무소에서

하는 것마다 다 배우러 다녔다는 거죠. 그런데도 空虛하더래요. 그래서 運動을 하면 좀 좋아지려나?

그래서 운동을 일이년 배웠다는 거예요. 계속했다는 거예요.

몸은 좀 상쾌해 지는데, 根源的인 空虛感은 없어 지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뭐 영어도 배우려 다녀보고 뭐도 다녀보고 이제 막 배우려 다닌거예요.

알음알이 知識이 좀 느니까 좀 뿌듯한 마음은 있지만 자격증도 따고 그래 놓으니까 좀 뿌듯한 마음은 있지만

그게 끝이라는 겁니다. 애들은 점점 더 커가고 있고 남편하고 대화도 좀 어찌보면 잘 안되고,

남편은 남편의 회사에서의 나름대로 그게 있다 보니까, 내가 이해도 못하고

어쨌든 남편은 성장하는 것 같은데 자식들도 성장하는 것 같은데 나만이 停滯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하시면서 뭐를 배우면 좋을까? 하고 또 자꾸 뭔가 배우는 거 뭐를 배우면 좋을지를 고민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니면 어디 취직을 해야될까? 돈을 벌면 공허감이 채워질까? 생각을 하고 계시더라구요.

 

여러분 생각에 어떻습니까? 배우면 그 공허감이 없어질까요? 아무리 배워도 그 空虛咸은 채워질 수 없습니다.

根源的인 空虛感. 박사학위 몇개를 따도 공허감은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박사학위 몇개를 따봐야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요. 남들이 욕하는 것 때문에 몇일 동안 괴로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 말이예요.

 

知識은 결코 내 공허감을 채워 줄 수 없습니다. 내 공허감을...돈을 벌면 채워질까요?

남편이 벌어오는 돈 이거 가지고 만족하고 살지 못하면 더 많이 벌어봐야 자식 더 비싼 과외는 보낼 수 있겠죠.

더 비싼 음식은 먹을 수 있겠죠. 더 좋은 노후 더 비싼 집에서는 살 수는 있겠죠.

그거는 내 공허감을 절대 채워주지 못합니다. 돈이라는 것은.

事業的인 成就도 나의 空虛感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成就는 끝이 있어요. 끝이

오십 육십 칠십 넘어가면 사업적인 성취는 끝난다 말이예요. 끝난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지적인 성취, 남들을 돕는것 물론 이거는 좀 나은거예요. 남들을 돕기 위한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 智慧로우신 분들은 첫째는 남들 돕는 자원봉사하고, 절에 와서 봉사하고 한다 말이예요.

이거는 그나마 우리가 世俗的으로 추구할 수 있는 가치중에 가장 수승한 가치입니다. 이게 최고의 가치죠.

그런데 이 가치가 진정으로 봉사가 되려면 많은 사람들은 그러거든요. 나는 자원봉사를 많이 했는데, 했는데도

空虛합니다. 그런단 말이예요. 왜냐하면 眞正한 慈悲를 추구한 게 아니라, 成就感으로 慈悲心을 행한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봉사를 했는데, 나한테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 이러면

갑자기 공허해지는겁니다. 봉사도 자비와 지혜가 바탕이 된 자비여야지만 空虛感을 메워줄 수 있습니다.

智慧와 慈悲가 하나가 되어야만 된다. 이말은 뭐냐하면? 여러분들 人間 存在의 根元的인 空虛感을 채워줄 수

있는 거는 唯一한 하나입니다. 유일한 하나. 이 法을 工夫하는 것 外에는 다른 方法이 없습니다.

정말 眞理를 工夫하는 것만이 根源的인 渴症을 완전히 解消시켜주지.

다른 그 어떤 것도 人間 根源的인 갈증을 해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되면 여러분들의 結末은 어떻게 되냐하면?

그거를 괜히 추구했다가 결국에 가서는 무너지는 겁니다. 그것밖에 할 수가 없어요.

 

돈벌어야지 해가지고 머리 쓰고 돈 쓰고 막 스트레스 받아 가면서 어떤 회사를 냈어요.

뭔 가게를 하나 냈어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받다가 마음은 마음대로 다치고

힘은 힘대로 들고, 돈은 돈대로 버리면서 나중에 가서 물론 돈은 좀 벌 수도 있겠지만,

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空虛해요. 空虛해. 空虛感만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成就일지라도...

이렇게 말씀을 드릴 때 여러분들 뭐 머리로 하시겠지만, 빨리 회심을 해서 이것만이 나의 根源的인 渴症을

없앨 수 있는 거구나. 진리를 찾아서 미국도 갔다가 인도도 갔다가 아슈람에도 가고 별 별짓을 다하는 사람이

結局에는 딱 돌아와서 더 이상 갈 데가 없구나... 이 工夫밖에 없었구나...

다시 틀어 앉아 가지고 이 工夫를 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정말 그런 갈증조차 없는 사람이라면 더 심각하게 나를 돌아봐야 되요.

나는 내 人生에 根源的인 渴症도 없나? 이는 더 안타까운거죠. 어찌보면.

그래서 이 정말 工夫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 工夫를 한번 해봐야 되겠다.

이거는 진짜 분명한 거거든요. 이 工夫 아니면 答을 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라는 것이...

수없이 많은 저 뭐 哲學을 하고 하던 學者들이나 心理相談을 배우고 하던 사람들이나,

法을 眞理를 찾으려고 全 世界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結局에 終着하는 게 다 佛法입니다. 佛法...

 

인류의 수많은 경제 무슨 과학, 물리학, 심리학, 의학 모든 것의 종점이 부처님 가르침으로 귀결되고 있잖아요. 지금,

더 이상 딴 데 가서 찾느라고 생고생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많이 해봤거든요 지금까지 工夫하면서

심리학도 기웃거려봤고, 뭐 어차피 공부해야되니까,저 인도의 힌두교 성인에서 부터 미국의 뭐 깨달았다는 사람들,

온갖 사상 철학등 온갖 것 다 기웃거려 봤단 말이예요. 해보니까, 공연한 기웃거림이였구나.

다만 저처럼 부처님 가르침을 傳하는 立場에서는 도움이 되더란 말이죠.

왜? 그거 다 그렇게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다 알려줄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다 하고.

그렇지 않고서는 괜히 여기 저기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結局에는 이게 정말 이거 分明한 答입니다. 이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내가 더 이상 딴 데 불퇴전할 필요가 없다 말이예요. 이 보리심에서 깨달음을 얻어야겠다.

부처님 가르침을 딱 알아야 되겠다는 하는 보리심을 퇴전 할 필요없이 그냥 이 길로만 가면 됩니다.

그러면 가장 수승한 길로 가장 최고의 빠른 길 수많은 세상속에 있는 수많은 지혜로운 현자들 돌고 돌고 돌고

돌아가지고 결국에는 종착한 그길. 그길이 여깁니다.

 

뭐 맘대로 하세요. 돌고 돌아서 오더래도 그 때가서 돌고 돌아서 와도 괜찮고,그런데 돌고 돌아 봤더니

제가 돌고 돌아 봤더니. 제가 결국 이거더라는 것을 저 또한 분명하더라구요. 그래서 이 工夫를 해야됩니다.

 

짧으니까 요거 간단하게 할께요.

원앙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이거는 좀 淨土思想과 連結되는 가르침인데요. 원컨대 내가 결정코 안양세계 안양국토

안양국토가 극락세계를 얘기합니다. 극락세계 안양국토에 태어나기를 往生하기를 발원하고

 

그래서 원아속견아미타 속히 안양국토 극락세계 교주가 阿彌陀 부처님이잖아요?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을 속히 親見하기를 발원합니다. 실제 내가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나서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해서 그곳에서 내가 성불하기를 발원합니다. 이렇게 세우는 것도 여기에 들 수가 있고,

 

또 우리가 쉽게 설명을 한다면 안양세계에 태어나 決定生安養 내가 안양국토에 태어나겠다.

안양국토 극락국토가 이 세상과 다른 것이 뭐냐? 다른 것이 법이 분명히 있고 부처님이 분명히 있단 말이죠.

불법이 있는 곳이란 말이죠 그곳은. 그래서 佛法을 通해서 내가 바로 옆에서 쉽게 말해서 일대일 교섭을 받으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딱 배워서 부처가 되는 게 定해진 어떤 그런 世界입니다.

그러면 저 서방 극락정토에 가야지만 안양세계가 있는가?

우리 마음속에서 내가 이 마음속의 부처님의 세계를 마음속에 품고 정토를 품고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언제나 공부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그자리가

바로 안양국토고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한겁니다.

 

부처님을 어디서 친견하느냐?

저 서방 극락정토에 가야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을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는 게 아니고

이것(죽비를 치시며) 이소리(죽비를 치시며)를 들을 수 있다면 아 이소리(죽비를 치시며)를 듣는 게 부처인데...

내가 언제나 부처와 멀어질 수가 없는데 분리될 수가 없는데

먹고 자고, 눈으로 뭔가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촉감 느끼고, 생각 할 수 있다면

생각하는 者가 부처고, 맛보고 보고 듣는 그 者가 부처인데...내가 이 허망한 분별심으로 덧씌우는 것만 하지 않으면 그게 부처인데, 그러면 뭐하러 서방세계 극락정토까지 가서 만납니까? 지금 이자리에서 여지없이 언제나 만나고 있는데, 그러면 언제나 이 자리가 이것을 듣고(죽비를 치시며) 죽비를 쳤구나. 이렇게 하면 벌써 중생이고

이걸 탁 듣고(죽비를 치시며) 듣는 그 者가 누군가? 듣는 그 者가 누군가? 分別하지 않았을 때 듣는 그 者가 누군가? 하고 돌이켜 본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極樂 國土에 태어나고자 마음을 내는 것과 같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저 극락세계 가서만 이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언제나 이자리에서 부처를 친견할 수 있는데

다만 우리는 分別 妄想 때문에 이 阿彌陀부처님을 親見하지 못할 뿐이다.

 

이 소리(죽비를 치시며)를 듣고 우리는 죽비소리로 밖에 듣지 못하니까

우리는 중생만을 늘 보고 있지만 똑같은 이 소리(죽비를 치며) 하나속에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다면

나에게는 그게 그냥 왜 죽비소리로 밖에 안들릴까? 도대체 그 소리를 듣는 者가 누구일까? 하고 돌이키는 마음

그 마음 그걸 일으켰을 때 바로 阿彌陀佛을 親見하게 된다. 法身부처님을 親見하게 된다.

 

속히 부처님을 친견하길 발원합니다. 속히 내가 性稟을 보기를 발원한다는. 말이예요.

내 마음 하나에 있는 부처성품(佛性), 本來자리, 本來面目, 眞面目을 보기를 發願한다.

내가 빨리 내 안에 있는 부처를 확인하기를 발원한다. 이 소리입니다.

 

그래서 원안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원컨대 내가 分身을 일으켜서 진찰 아주 티끌같이 수없이 많은 사바세계에 두루두루 나투기를 발원하고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그래서 내가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기를 발원합니다.

 

즉 이렇게 부처님을 친견해서... 보세요.

삼악도를 여의고, 탐진치를 여의어서, 불법승을 마음에 담고, 계정혜를 닦고,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닦아서,

보리심에서 퇴전치 않아서, 정진하게 되어서, 結局에 부처님을 親見하고, 부처님을 친견해서

그 자리를 극락세계로 만들어 버리고, 그 자리에 성품을 친견해서 견성을 딱 해서 성불을 이루었을 때

 

그게 끝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다시 微塵 國土에 나투어 가지고 다시 一切 衆生에게 法을 說하는 佛法을 說해서

수없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기를 발원한다. 이렇게 해서 如來十大發願文이 막을 내리는 겁니다.

 

이와 같이 열가지 발원이라는 것은 단계 단계적으로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우리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중생으로 돌아와서 중생을 제도하는,  그 정토회에서는 정토에 가는 것을 往生한다.

그리고 다시 이생에 돌아오는 거를 還生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러니까 부처가 되어서 다시 이곳에 돌아와서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 하는 마음 일체의 자비심 보리심을 자비로

회향하는 마음, 회향심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을 일으켜야한다. 해서 이렇게까지 해서 여래의 십대발원문이 마감이 됩니다. 이걸 여래십대발원문을 총원이라 할 수가 있고 또 다른 총원은 발사홍서원을

다음번에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고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