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아름다운 인연

장백산-1 2014. 11. 29. 22:52

 

 

아름다운 인연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의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같이 그렇게 다생겁래로
이른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닦아 오신 성자는
아무런 고통 없이 평생 잘 지내신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부처님 같으신 분도 당신 평생에
열 번이나 곤란한 경우를 겪으셨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삼아승지겁을 닦아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부처님을 가장 시달리게 한 사람이
자기 친종제 제바달다(提婆達多) 아닙니까?
제바달다는 종제이면서도 심지어 부처님의 생명까지도 빼앗으려 한
아주 표독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두가 다
부처님 스스로 지은 업(業)의 과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業이라는 것이 굉장히 지독한 것입니다.
겪어보면 業을 짓고서 몇 십 년이 지나도 그 業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몇 십 년이 아니라 몇 겁, 몇 천 겁의 세월이 흘러가도
한번 지어놓은 業은 소멸이 안 됩니다.


-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생각으로 지은 삼업의 굴레

그 業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우리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우리 생각으로 짓는단 말입니다.
 
가령 남을 한번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저 사람 참 고약하다, 차라리 어디 가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生覺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런 生覺을 찰나 동안만 해도 그것이 소멸이 안 됩니다.
그 生覺 하나로 자기의 온 細胞가 汚染돼 버립니다.
 
또한 우리 生命은  나뿐만 아니라 宇宙와 連結되어 더불어서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저 다른 나라에 있는 돌멩이 하나나  여기 있는 나뭇가지 하나나
모두가 다 같은 因緣 가운데에서 生겨나고 變化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華嚴界에서 말하는 重重無盡입니다.
얽히고설키고 宇宙의 모든 것이 다 하나의 因緣 가운데 있습니다.
때문에 부처님도 제바달다한테 당한 만큼
역시 과거 전생에 제바달다를 못살게 굴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누구나 부처님 공부 가운데는 참선하는 공부가
그야말로 가장 높은 공부고 부처님 공부의 핵심이므로
기왕이면 참선을 좀 했으면 쓰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형편상 선방에도 갈 수 없고 또 그때그때 절을 찾아가
재가불자님들과 더불어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니까,
참선은 도저히 안 되겠구나,  이렇게 체념하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참선은
사실 천하에 제일 쉬운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것은 천하에 쉽고
좋지 못한 것은 천하에 어렵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만을 말씀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은 다 근원적이고 실존적입니다.
다만 허물은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렇습니다.


- 참선 염불은 業 덩어리를 녹이는 가장 빠른 길
 
우리가 기왕 불법을 공부하고 불도를 닦기 위해서는
출가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출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속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세속을 떠난다는 것은
세속적인 여러 가지 잘못된 견해를 다 씻어버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도리를 깨닫기 위함입니다.
 
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영원한 道理를 알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이 출가자 아닙니까?
따라서 비록 출가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세간에 대한 집착을 못 떠나면 그것은 출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출가(身出家)ㆍ심출가(心出家)라,
몸으로 출가하고 마음으로 출가해야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출가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眞理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느끼고
진리는 분명히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명백합니다.
나 아(我)자, 볼 견(見)자,
我見이 있으면 그때는 眞理가 아니고,
我見이 없어야 眞理입니다. 
 
存在라는 것, 法이라는 말은 모두가 다 現象 아닙니까?
이런 것은 다 因緣生입니다.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잠시잠간 있는 것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나 내 觀念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하나의 相인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 그대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
눈에 보이는 對相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꿈이나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단 말입니다.
꿈이 실제 있습니까? 허깨비가 실제 있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그러면 어째서 올바로 실상을 보지를 못하는가,
業障 때문에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지금 業障 덩어리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업숙체(業熟體)라, 業 에너지 덩어리에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참선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  얽히고설킨 業덩어리를 녹이기 위해서입니다.
계율은 무엇 때문에 지키는 것인가,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하면  업덩어리가 녹지 않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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