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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온과 행온무아

장백산-1 2015. 3. 16. 02:22

 

 

 

 

 

행온과 행온무아 - 행온(6)|붓다수업 교리강좌

 

 

 

 

 

(4) 行蘊과 行蘊無我

 

행온의 의미

 

행온은 意志 作用, 形成 作用을 말한다. 무언가를 行爲하려고 하는 意志, 意圖, 意向 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고자 하는 欲求나 바람의 의미도 담고 있다. 行蘊은 業을 일으키는 形成力이 된다. 그래서 業과 行이라는

用語는 같은 意味로 쓰이기도 한다.

 

十八界가 觸하면 受想行이 생겨난다고 했는데, 눈이 무언가를 보았을 때 受蘊으로 좋고 나쁜 느낌을 느끼고,

想蘊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槪念化하여 思惟하고 나면, 行蘊에서 좋은 것은 더 가지고 싶고, 싫은 것은 멀리

하고 싶은 의지,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배고픈 狀況에서 눈으로 사과나무를 보았을 때, 受蘊은 배가 고프다는 因緣 따라 그 사과에 대해 좋은 느낌을

일으키고, 想蘊은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과’라고 槪念 지어 知覺하고, 行蘊은 사과를 따 먹고자 意圖, 意志를

일으켜내는 作用을 의미한다.

 

이처럼 十八계가 觸할 때 受想行이 나타나는 것처럼, 受想行의 마음作用은 함께 일어나면서 分別하여

認識해서 아는 識의 作用을 돕는다. 그래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識을 心法으로, 受想行을 心所法으로

나누어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行蘊은 恒常 複數로 나타나는 것으로, 嚴密히 말한다면 ‘意志作用을 필두로 하는 수많은

心理現象들’을 의미한다. 行蘊은 受, 想, 識을 除外한 모든 精神作用을 다 包含한다. 淸淨道論에서는

50가지의 심리현상을, 구사론에서는 46가지 심리현상을 행으로 들고 있다. 예를들면 의도 뿐 아니라

주의, 집중, 의욕, 탐욕, 성냄, 믿음, 양심, 수치심 등이 모두 행온에 속한다.

 

그러나 이 중에도 특히 의도, 의지작용이 行蘊의 主要한 心理作用이다 보니 行蘊은 주로 의지, 의도로써

쉽게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意志作用이 내 안에서 일어나면서 業을 지어 가다 보니, 우리는 이러한 意志作用을 가진

 ‘의도하는 나’가 있다고 錯覺한다. 이러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의도하는 마음작용’이 바로 行蘊이다.

 

行蘊은 이처럼 의지작용, 형성작용을 말한다고 했는데, 교리적으로 살펴보면, ‘有爲를 造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有爲를 造作하는 存在가 내 안에 있다고 生覺하고 바로 그 有爲를 造作하는 마음인 行蘊을 나의

一部로 여기는 것이다. 有爲란 ‘만들어진 것’, ‘造作된 것’을 뜻한다. 有爲의 法은 ‘一切의 모든 存在’,

‘일체의 모든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有爲를 造作한다는 것은 意圖를 일으켜서 삶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行蘊을 意志作用, 形成作用이라고 말한 것이다.

 

뒤에 識蘊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行蘊이 有爲를 造作해 만들어 놓으면 識蘊은 行蘊이 만들어낸

有爲인 行爲를 認識한다. 그런데 識蘊은 有爲를 認識할 때 이름(名)과 모습(色)를 부여해서 認識한다.

이름과 형태를 名色이라고 말한다. 卽, 識蘊은 行蘊이 만들어낸 有爲를 名과 色으로 認識하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뒤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니 여기에서는 이 정도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行蘊無我

 

상윳다 니까야에서는 ‘行蘊들을 自細히 觀察하고 깊이 照射해보면 行蘊들은 텅~빈 것으로 드러나고

虛妄한 것으로 드러나며 實體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行蘊에 무슨 實體가 있겠는가?’

라고 함으로써 行蘊 또한 非實體的인 無我임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일으키는 意圖와 意志, 欲求와 바람 등을 生覺해 보자. 그것은 結定論的으로 定해진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工夫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되고자 意圖를 일으켰다. 열심히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뜻밖의 因緣으로 새로운 事業을 시작하게 되었다거나, 會社에 취직하게 될 因緣이 생겨났다. 만약

어릴적부터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듯 因緣이 생기게 되면, 자신의

本來 意圖를 버리고 새로운 꿈을 향해 새로운 意志와 欲求를 불태울 수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스님은, 출가 전에 너무도 열심히 수행을 하기에 ‘출가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절대 출가는 안 한다”고 하더니, 1~2년 쯤 後에 스스로 出家를 決定했다.

 

이처럼 우리는 절대 안 할 것 같다가도 그것을 하기도 한다. 부와 풍요,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던 사람도 어느

瞬間 그러한 삶이 虛妄한 것임을 깨닫고는 가진 富와 財産을 다 나누어 주고 修行者의 길을 걷기도 한다.

 

이처럼 意志라는 것은 固定되게 存在하는 ‘나’가 아니다. ‘意圖하는 나’가 定해져 있지 않다. 어떤 특정

방향으로의 삶을 意圖하고 固執하며 欲求를 일으키는 ‘나’가 定해져 있다면, 언제까지고 그런 삶만을 固執하게 되겠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언제든 因緣 따라서 마음의 欲求도 달라지고, 意圖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내 안에 ‘부자가 되려는 의지’, ‘성공하려는 의지’가 고정된 실체로써 정해져 있어서, 나는 부자가 되고,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自我라는 生覺에 집착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또한 언제든 變할 수 있는 것이다.

 

이 事實을 안다면, 어떤 特定한 한 가지 의지나 욕구를 끝까지 고집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삶에서

괴로워하는 수많은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내 의도, 내 욕구, 내 바람만을 끝까지 고집하고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다른 의도를

가진 사람들과 다투게 되고, 생각이 한 가지 방향으로만 制限되어 꽉 막힌 채 意識이 닫히고 갇혀 버린다.

 

사람들은 보통 한 가지 生覺이 옳다고 여기고, 그런 方式대로 일이 되어야만 한다고 自己 意圖에 執着하게

되면 그 방식 이외의 다른 방식이나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고 여기기 쉽다.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만이 나의 길이라 여기고, 내가 의도한 방식이 바로 ‘나’라고 여긴다. 행여 다른 사람이 나의 방식을

틀렸다고 하면서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면, 우리는 내가 공격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공격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단지 다른 방식을 제안했고, 내 방식이 옳지 못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의도, 의지, 욕구’를 ‘나’라고 여기며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된 것 같이 여기고,

내가 공격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 공허하고 변하기 쉬운 ‘의도’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意圖’를 ‘나’라고 여긴다는 증거다. ‘意圖’는 因緣 따라 생겨난

非實體的인 하나의 마음일 뿐, 意圖하는 마음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다. ‘意圖하는 나’는 없다.

 

 

 

 

 

 

업(業)도 내가 아니다

 

行蘊은 또한 形成하는 에너지로써 ‘業’을 짓게 하는 意圖的 行爲라고 했다. 우리가 業을 지으면 그 業은

내 意識안에 貯藏되고, 지금까지 潛在意識 속에 짓고 쌓아 온 業의 무더기들이 바로 나라고 여긴다. 過去에

惡業을 지었다면 그로 因해 언제까지고 罪意識에 사로잡힌다. 惡業을 짓고 罪를 지은 實體的인 ‘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第一義空經의 ‘業報/果報는 있으나 業을 짓는 作者는 없다’고 하는 觀點에서 본다면, 지은 業의 果報는 있을지언정 業을 지은 ‘나’라는 固定된 實體的인 存在는 있을 수 없다는 無我라는 말이다 

 

果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는 말을 잠시 살펴보자. 業을 짓게 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果報는 받게 된다.

그러나 實體的 存在로써 業을 짓는 作者가 있고 果報를 받는 者가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촛불이

처음 탈 때의 불꽃과 時間이 흐른 뒤에 타는 불꽃은 前者와 後者가 같은 불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혀 다른 불꽃이라고도 할 수 없다. 前者와 後資는 끊임없이 흐르며 이어지는 變化 속에서의 連結性은

있지만(業과 果報), 獨者的이고 實體的인 어떤 實體(作者)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業과 果報는 있되 作者는

없는 것이다. 우유가 發酵되어 치즈가 되었다면, 그 둘 사이를 連結해서 흐르는 連結性은 있지만, 卽 業과

果報는 있지만, 實體的인 어떤 存在로써의 作者는 없다.

 

이번 生에 한국의 남자로 태어났지만 다음 生에 미국의 여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한국남자와

미국여자는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한국의 남자가 진짜 ‘나’인가, 미국의 여자가 진짜 ‘나’인가? 그 둘

사이를 連結해 줄 固定된 實體的 存在가 있을 수 있을까? 그 둘은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같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다르다고 해서도 안 된다. 前生과 後生의 사이의 關係는 恒常하는 것도 아니고 斷滅

하는 것도 아닌 不常不斷이고, 둘은 같지도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은 不一不異의 關係다. 이것이 中道的 視角이다. 이처럼 모든 存在는 中道的으로, 卽 緣起的으로, 非實體的으로 있을 뿐, 固定된 實體的 存在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남자로 보시를 行했고, 그 果報로 다음 생의 미국의 여자가 부자가 되는 福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이것이 바로 業과 果報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業을 지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結果인 果報는 있다.

그러나 實體的으로 業을 짓는 ‘者’와 그 業의 果報를 받는 ‘者’는 同一한 固定된 어떤 存在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同一한 固定된 實體的인 存在로서 業을 짓는 者와 그 業의 果報를 받는 者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業을 짓는 者와  그 業의 果報를 받는 者가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 中道的이고 緣起的인,

끊임없이 變化하고 흐르는 無常性과 無我性를 바탕으로 業을 짓고 그 業의 果報를 받기 때문에 卽, 業과 報는

있지만, 實體的으로 業을 짓고 그 業의 果報를 받는 者, 卽 作者는 없다는 말이다.

 

바라문교에서는 業을 짓는 者와 그 業의 果報를 받는 者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固定된 實體的인 自我가

있기 때문에 同一한 根源的 自我인 아트만이 業을 짓고 그 業의 果報를 받는다고 生覺했다. 그러나 이 生覺은

肉身이 죽어도 계속 이어지는 固定된 實體인 自我가 있다는 상견(常見)이며, 그 實體的인 自我는 過去 現在

未來 三世에 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유견(有見)이지만, 부처님께서는 不常不斷의 斷常中道와 有無中道를

설하심으로써 固定된 實體的인 自我를 否定하고 中道를 드러내셨다.

 

촛불도 사람도 마찬가지로, 前者와 後者는 ‘끊임없이 變化하고 흐르면서 이어지는’ 것이기는 해도,

前者와 後者를 同一한 固定된 어떤 實體的 ‘存在’로 生覺해서는 안 된다.

 

 

‘業과 報는 있되, 作者는 없다’의 실천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우리는 보통 ‘좋은 사람이야’ 혹은 ‘별로야’라고 답변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런 式으로 우리의 意識 속에서 착한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으로 分類되어 記憶된다. 그러나 착한 사람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나쁜 짓을 행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사람에게 ‘착한사람’이라는 固定된 實體가 있다면 그는 어떤 짓을 해도 永遠히 착한 사람이겠지만,

그에게는 착한 사람이라는 固定된 實體가 있어서 착한사람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착한 行爲를 했을 때

착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일 뿐이다. 착한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착한 行爲가 먼저인 것이다. 착한 行爲(業)를

하면 착한 사람(報)이 되는 것이지, 착한 사람(作者, 實體的 存在)이라는 固定된 實體가 있는 것은 아니다.

卽, 業과 報/果報는 있되, 作者는 없다.

 

이 事實은 實踐的인 重要한 삶의 가르침을 전해준다. 우리는 사람들을 착하거나 나쁜 어떤 사람으로 規定

짓고 實體化하기를 좋아한다. 想蘊으로 槪念化하는 것이다. 나쁜 놈, 도둑놈, 배신자, 착한 사람, 수행자,

보시하는 사람 등으로 規定짓곤 한다. 그렇게 規定 짓고 나면 우리는 그 規定된 槪念에 正體性을 부여한다.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계속 배신을 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배신자라는 꼬리표를 계속해서 달아주는 것이다.

業과 報는 있되, 作者는 없다라는 理致에서 본다면, 事實 배신자라는 固定된 實體는 없다. 다만 배신(業)이라는 行爲를 했을 때 배신자(報)라는 말을 듣고, 배신자 取扱을 받는 果報를 받을 뿐이다. 그 사람은 배신을 했을 때 배신자인 것이지, 배신을 하지 않을 때는 배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계속해서 배신을 할 거라고 여겨 언제까지고 偏見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배신자라고 烙印찍고는 한다. ‘業과 報는 있되 作者는 없다’는 理致에서는 배신을 한 것은 過去의 業이고, 現在는 배신을 하지 않았다면, 그를 배신자로 烙印 찍어서는 안 된다. 배신자라는 ‘作者’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계속해서 배신자라고 그를 烙印 찍어 놓고 배신자라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改過遷善

해서 바뀔 수 있는 可能性이 있음에도 더욱 더 바뀌기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러나 배신자라고 낙인 찍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써 바라봐 준다면 그는 더 이상 배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에 잘못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실체적인 배신자, 도둑놈, 나쁜놈이 되어 버린다면 이 세상에 나쁜놈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無限한 容恕와 行爲의 宗敎

 

과거를 내려 놓고, 용서해 주고, 참회함을 통해서 언제고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앙굴리마라는 99명을 죽인 살인자였지만, 이후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행을 한 결과 아라한이

되었다. 작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살인자이겠지만, 작자가 없기 때문에 그는 불교의 수행교단에 들어와

살인자가 아닌 한 명의 수행자요 아라한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일반

중생들은 여전히 그를 한 명의 살인자가 스님 행세를 하는 나쁜 놈으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래서

탁발을 나갈 때마다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구타를 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

서는 그 어떤 악행이라 할지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고, 참회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와 참회와 용서의 방식이다.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그 어떤 죄의식에도 실체적으로 사로잡히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한

사람일지라도, 세상 모두가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비웃는다 할지라도, 부처님 전에 와서는 크게 안심해도

좋다. 이 불가의 방식은 전혀 과거를 문제 삼거나, 과거의 잘못을 문제 삼는 가르침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로

이미 지나갔고, 과거의 살인자도 죄인도 ‘작자는 없다’는 가르침에 의하면 지금은 더 이상 살인자도 아니며

죄인도 아닌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과보는 받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용서받을 수 있으며,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실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종교나 사상, 철학 등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겠지만, 불교의 가르침

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억지로 용서하려고 해서 용서하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가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진리에 합일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는 ⟪숫타니파타⟫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에 의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현자(賢者)는 이와 같이 행위를

사실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 세상은 행위로 말미

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어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쐐기에 의해 매어 있듯이.” 라는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는 이처럼 作者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行爲가 중요하다. 실체적 자아, 실체적 바라문이나, 실체적 왕이나, 실체적 도둑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行爲에 依해 모든 것이 決定지어진다고 본다. 아무리 과거에

잘못을 지었을지라도 지금 이 瞬間 그의 行爲에 依해 그는 每瞬間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存在인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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