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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모양을 빼고 세상을 바라보라

장백산-1 2015. 3. 12. 15:19

 

 

 

15. 03. 11 - 이름과 모양을 빼고 세상을 바라보라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2015년 03월 11일 방송   ' 이름과 모양을 빼고 세상을 바라보라 '

 

 
 

 

이름(名)과 모양(色)을 빼고 세상을 바라보면 !!!

 


法性偈(법성게)에 보면, 無名無相絶一切라고  ‘이름(名)도 없고 모양(色/相)도 없어서 一切가 다 끊어졌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金剛經(금강경)에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모든 相(모양/色)이 相(/모양/色)이

 

아님을 보면 직바로 如來를 볼것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 表現이 불교 工夫에서는 아주 重要한데요,

 

어떻게 하는 工夫가 이름(名)과 모양(色/相)을 끊어버리고 세상을 보는 工夫고, 과연 무엇이 모든 相

 

(모양/色)을  相(모양/色)이 아닌 것으로 바라보는 것일까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마음은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인 識, 卽 알음알이, 分別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 識, 알음알이, 分別心은 對相 世上을 名(이름)과 色(모양/相)으로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입니다. 卽, 識, 알음알이, 마음 속의 對相/境界가 名(이름)과 色(모양/相)이지요. 우리가 보통

 

 

 

사람 事物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 때 그 알음알이, 앎, 識, 分別心에 이름(名)과 모양(色/相)을

 

붙여서 머릿속에 入力합니다. 컴퓨터도 파일 하나를 메모리칩에 記憶시켜서 貯藏하려면 파일 이름(名)을

 

指定해 주어야 하듯, 우리도 무언가 特定한 모양(色/相)의 事物을 머릿속에 貯藏할 때는 그것에 이름(名)을

 

지어 붙여서 記憶하는 겁니다.

 

 

 

사과를 예로 들면 사과를 볼 때 내 머릿속에 사과의 모양(色/相)과 ‘사과’라는 이름(名)이 同時에

 

入力됨으로써 潛在意識이라는 記憶 속에 貯藏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世上과 對相이 이와 똑같은

 

方式으로 잠재의식이라는 記憶 속에 貯藏이 됩니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의식으로 생각의 대상을 헤아릴 때

 

언제나 이름과 모양으로 그것들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各各의 對相, 境界를 아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처음 뭔가를 배울 때 正確히 이런 方式으로 世上을 배웁니다. 사과 모양(色/相)의

 

그림을 보여주고 ‘사과’라는 이름(名)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사과’라는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方式으로 우리가 對相을 認識해서 알게되는 모양(色)과 이름(名)을 名色

 

이라고 부르고, 이 名色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을 ‘識’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부릅니다.

 

알음알이(識), 分別心, 마음은 이런 方式으로 만들어집니다.

 

 

 

 

어린 아이는 처음부터 이런 方式으로 世上을 對相을 이름(名)과 모양(色/相)으로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지 못합니다. 世上을 그저 통채로, 全切 한바탕으로 볼 뿐이지요. 어린 아이들이 世上을 볼 때는

 

아무런 어떤 差別心 分別心이 없습니다. 世上 全部가 온통으로 하나 뿐이지요. 내 편, 네 편도 없고,

 

크다 작다도 없고, 잘났다 못났다도 없이 그냥 世上 全切를 통째로 온통 하나로 아무런 分別心 없이

 

알음알이, 識, 마음 없이 세상을 대상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世上을 對相을 이름과 모양, 名色으로 分別하고 認識하고 判斷해서 아는 마음,

 

識, 알음알이, 分別心의 方式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世上을 對相을 둘로 나누고 쪼개서 分別하고 認識

 

해서 알기 始作합니다. 이 世上 모든 苦痛 괴로움의 根本 原因인 思量心, 分別心, 生覺, 마음(識/알음알이),

 

煩惱, 妄想이 드디어 發動되기 始作하는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世上을 對相을 名과 色이라는 꼬리표로

 

記憶하기 始作하면서부터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무능한 사람, 좋은 직업 나쁜 직업,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성공 실패 등 둘로 나뉜 다양한 對相에 自己 알음알이(識/마음/分別心)대로

 

名色을 붙여 分別하기 始作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게 된 世上 對相에 固定된 實體가 있어서 그렇게 名色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非實體的인 對相 世上을 단지 쉽게 알아보기 위해서 名色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對相을 그렇게 分別 認識해서 알고 名色을 붙여 解釋해서 살다 보면 우리의 意識은 그 對相을

 

固定된 不變하는 實體라고 生覺하게 되면서 錯覺하는 그 生覺에 執着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삶의 모든

 

苦痛 괴로움의 問題가 생겨나기 始作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마음工夫는 어릴적부터 對相 世上에 이런 方式으로 만들어 왔던 온갖 모양(相/色)을 짓는 作業,

 

이름(名)과 槪念을 지어왔던 作業을 다시 어린 아이의 原來의 처음 마음 狀態로 되돌리는 作業,

 

對相과 世上에 지어붙였던 이름(名)과 모양(色/相)을 빼버리는 作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金剛經에서 一切의 모양(相/색)을 打破하라고 강조하는 理由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意識이 스스로 對相에 짓고  붙여 온 모양(相/色)과 이름(名))이 事實은 虛妄한 텅~빈 空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世上과 對相을 둘로 쪼개고 나누고 分別하고 認識해서 對相을 名色으로 差別的으로

 

認識해서 알던 삶의 方式을 다시금 對相과 世上에 지어 붙였던 그 모든 모양(相/色)과 이름(名)을

 

打破해서 對相과 世上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工夫가 마음工夫입니다. 對相에 모양(色/相) 槪念

 

 

 

이름(名)을 지어 붙혀서 分別하고 認識해서 世上을 알게 되면,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등의 두 가지로

 

世上이 나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좋은 것에 執着해서 괴롭고, 나쁜 것을 싫어함에 執着해서 멀리

 

하려고 괴로워하는 苦痛의 삶이 始作되는 것입니다.

 

 

 

 世上을 對相을 是非 分別 比較 判斷 解釋하지 말고 槪念 짓지 말고, 世上 對相에 이름(名)

 

모양(色/相)을 지어서 붙이지 말고, 내 앞에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든 對相들 世上을 바라보세요.

 

바로 그 때 世上에 對相에 이름(名)과 모양(色/相) 이 없을 때의  ‘나’는 누구입니까?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