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만약 前生에 심은 種子를 알고자 한다면 今生에 받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未來生의 열매를 알고자 한다면 今生에 짓는 業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지능과 재주와 기술을 믿으면서 공명과 부귀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공명과 부귀는 재주와 지능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농부가 좋은 밭 골라 갈고 때 맞춰 씨를 뿌린 후에 가을에 하나의 씨앗에서 백배 수확하는 것과 같아
내가 前生에 禪定을 닦은 것이 今生의 재주와 지혜를 만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은 迷惑한 사람이다. 또 나에게 있던 부귀와 공명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부서지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그 일을 엄청 恨스럽게 여기는데, 나의 복량(福量)이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임을 아예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서져버리는 것은 모두 나의 分守에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 저 사람 때문에 잃은 것이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근심으로 여겨 돌이켜서 하늘을 怨望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원수를 맺어서 풀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 통해서 孔子의 안명설(安命說)은 바로 佛敎의 인과설(因果說)임을 알 수 있다. 만약 安命說을 안다면 貧富와 得失을 모두 前生에 定해진 것에 맡기게 된다. 모든 것이 내가 지은 것이라면 貧窮과 榮達과 長壽와 妖折이 다 나의 명(命)이 本來 그랬던 것이다. 만약 因果說을 分明하게 믿는다면 今生에 받아쓰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내가 前世에 닦아서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原來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재주와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재주와 지혜로 가져온 것이 있다 해도 나의 분수에 본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또 무엇 때문에 득실을 비교해가면서 따지느라 마음과 生覺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면서 虛妄하게 거기에다가 恩惠의 마음과 怨望의 마음을 차곡차곡 쌓을 필요가 있으랴.
만약 밝은 智慧를 지닌 사람이라면 因果應報를 分明하게 믿어서 以前의 得失을 기어코 따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今生의 現在 눈앞에 있는 것에 걸맞게 하여 이것으로 未來生의 福田에 씨앗을 심을 것이니 마치 農夫가 좋은 밭을 골라서 깊이 갈아 김매기를 쉽게 하고 때에 맞춰 씨를 뿌린 다음 가을에 하나의 씨앗에서 열배 백배의 收穫을 얻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고 분명한 것이다. 다만 씨를 뿌리는 밭이 비옥한지 척박한지에 따라 같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불법승 삼보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 뛰어난 복전[勝田]이고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섬기는 것이 공경의 복전[敬田]이고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고통을 뽑아내주는 것이 마음의 복전[心田]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世上의 智慧로운 거사들이 이왕 지나간 得失을 따지지 않고 未來의 福田에 씨앗을 심는 것뿐이다. 眞實로 生覺으로 過度하게 따지느라고 虛費하는 無益한 짓을 줄이고 財物로 사치를 부리는 것과 몸과 입을 조절하여 세 가지 福田에 씨앗을 심는다면 未來生에 福德으로 莊嚴하는 것이 增長될 뿐만 아니라 現世에 데리고 다니는 몸과 마음이 便安해져서 第一 가는 복인(福人)이 될 것이다.
만약 세 가지 福田에 福의 씨앗을 심고 나아가서 부처님 法에 마음을 쓴다면 念佛을 통해 妄想을 消滅시키고 慈悲의 마음으로 貪心과 瞋심을 轉換시키고 유연하고 調和로운 자세로 사나운 이들을 敎化시키고 겸허의 光明으로 我慢을 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을 크게 낸 菩薩의 實踐行이다. 거사께서 이것을 정말로 確信할 수 있다면 가장 뛰어나고 용맹한 大丈夫라고 불릴 것이다.
장효자에게 들려준 감로 이야기 내가 일찍이 방외(方外)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