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 가을이 머무는 풍경
☆ 웰-다잉(well-dying) ☆
- 죽음과 마주하는 법 -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 손과 발을, 어른들은 얼굴과 몸을 닦았다.할머니와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아직 먼 것처럼 느끼지만…
- 김스텔라 : 서울 모현가정 호스피스 수녀 -
(장면 1)
그 할머니를 만난 것은, 통증이 너무 심하자 할머니의 아들이 다급한 마음에 가정호스피스를 찾아
우리에게 연락했기 때문이다. 통상 서너달 진단을 받은 말기암 환자들에게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간호를 하는 게 가정호스피스 역할이다.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며 하얀 천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발가락 사이사이에도 동여매고 있었다.
"할머니, 머리는 왜 그러고 계셔요?" "머리를 꽁꽁 묶어 놓으면 머리가 안 아프거든."
할머니는 암 말기로 더 이상 병원에서 해 줄 게 없다고 해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가서 치렁치렁 고무호스와 줄을 매달고 있느니 집에서 조용히 임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너무 고통을 겪어 아프지 않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할머니께 진통제를 드리자 통증은 조절되기 시작했고, 구역질과 구토 문제도 해결돼 식사도
제대로 하게 됐다. 그렇다고 죽음의 두려움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집안에 혼자 계셔야 할 때가 많아 오히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하루는 밤늦게 통증이 심하다고 해 집으로 방문하자,
할머니는 "사람도 아녀"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할머니는 갑자기 목소리가 살아나더니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와 같다"고 했다.
할머니의 이런 말씀을 듣는 순간, '아! 이게 바로 우리 삶이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는 아프고 힘들 때 누군가가 늘 함께 있어 주기를 원했던 거였다.
신체적인 통증만 아니라 정신적 통증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늦은 시간에도 집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는 편안해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시간에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렇게 4개월여를 보낸 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손자들도 모여 있었다.
"지금 할머니는 여행을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니 손자들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의 권유에 아이들이 한명씩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젠 아프지 마세요.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사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말할 힘조차 없는 할머니는 눈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얼굴은 금세 평안해졌고
가족들도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할머니에게 새 옷을 입히기 위해선 목욕을 시켜드리시죠"고 하자,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의 손과 발을 씻겼고, 어른들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여윈 몸을 닦았다.
할머니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과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할머니는 비록 한마디도 못하고 숨 쉴 힘조차 없는 상황이 됐지만
얼굴 표정으로, 눈 한번 맞추는 것으로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할머니와
지낸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할머니의 장례식과 유언에 대해 말했다.
자신의 유언대로 가족들이 해 줄지 염려하는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그런 얘기를 하면
환자들은 되레 차분해지면서 위로를 받는다. 할머니는 그날 자신의 소원대로 온 가족이 둘러앉은 가운데
어둠을 잘 헤치시고 빛을 향해 웃으며 가시지 않았을까.
나는 이 가정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아가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병원에서 임종해 죽음을 접할 기회가 적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임종을 지키게 할 것이냐를 놓고 물어보면 대부분 가정들은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녀들이 받게 될 상실감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면 2)
유방암 말기인 38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친척들은 "아이들에게 아픈 엄마의 나쁜 기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은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엄마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제일 큰 녀석이 엄마에게 "이젠 아프지 말라"고 말하면서 엄마 품에 한참 동안
안겼고, 자기 한 몸 가누기조차 힘든 엄마도 그렇게 아이를 안았다.
둘째도 엄마에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했고
6살짜리 막내가 "엄마 잘 가"라며 아픈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소리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린 자녀 셋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는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들을 보며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가족과 인사를 한 아이 엄마는 그날 밤 숨을 거뒀다.
장례를 치른 뒤 아이들의 아빠가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엄마의 죽음을 못 봤다면 아마 엄마 이야기는 우리 집에선 말도 꺼내지 못했을 텐데….
온 가족들이 모두 그런 어려움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지금은 서로 엄마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이 나보고도 오히려 힘내라고 하니…."
어른들의 염려와 다르게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통해
죽음이 아주 캄캄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삶의 自然스러운 過程으로 생각하지 않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겐 죽음을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로 남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마치 나에게는 아직도 먼 것처럼 느끼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태아가 열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엄마와 함께 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죽어서 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기에 마치 태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장면 3)
우울한 사회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다시 늘고 있다.
한때 주춤하던 자살자는 지난해 4년 만에 1만4000명을 넘어섰다.
특히 '잿빛 황혼' 속에 생을 마감하는 60대 이상 자살자가 가장 많았다.
2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는 1만4579명으로,
2008년 1만2270명에 비해 18.8% 늘었다.
2005년 1만4011명을 기록한 이후 2006년 1만2968명,
2007년 1만3407명, 2008년 1만2270명으로 주춤했으나 4년 만에 다시 1만4000명을 돌파했다.
연령대별로는 61세 이상이 4614명(31.6%)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40대 2770명(18.9%),
30대 2508명(17.2%), 50대 2427명(16.6%), 20대 1793명(12.2%) 순이었다.
20세 이하에서 목숨을 끊은 이도 452명(3%)에 이른다.
연령대별 전년 대비 증가율은 50대가 31%(575명)로 가장 높았고,
20세 이하는 29%(102명), 30대는 20.3%(424명) 증가했다.
61세 이상은 자살 인원이 많다보니 증가율(14.5%·585명)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특히 20대 자살은 2005년 1428명에서 2006년 1148명으로 감소한 뒤 지난 3년간 최대 35% 증가했다.
자살 원인을 국제 손상외인 분류체계를 근거로 살펴볼 때
'정신적, 정신과적 문제'가 4123명(28.2%)으로 가장 많았다.
'육체적 질병'과 '경제적 생활 문제'가 각각 3190명(21.8%), 2357명(16.1%)이었고
'가정 문제'는 1832명(12.5%), '남녀 문제'는 1040명(7.0%),
직장 또는 업무상 문제'는 960명(6.0%)이었다.
전문가들은 자살이 개인 차원의 정신병리적 문제와 사회·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하면서도 연령별로 원인은 다소 다르다고 진단한다.
20∼30대는 취업 실패 등으로 인한 사회적 박탈감,
40∼50대는 직장·업무상 문제나 사업 실패 등으로 인한 좌절,
노인층은 고립감과 신체적 질병 등으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죽음과 마주하는 법은 살아갈 자와 죽을 자가 모두 다 생명의 존귀함을 인정할 때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 잘 죽는법에 대한 이해가 성숙한 사회일수록 자살하는 사람,
죽고싶어하는 사람들이 감소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높아지고 품위있는 생로병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
이 깊어져서 사회복지적인 대책도 발달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가족간의 아름다운 인간적 이해와 상호작용
의 깊이와 넓이도 확대되어 보다 인간적인 사회,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가는데 이바지 할것이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그러한 마음을 스스로 가질때 삶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느끼고 삶의 가치를
더욱 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자살자도 줄어들 것이다. 인간의 삶의 대한 이해의 과정은 삶의 소중함과 자신
에 대한 참사랑의 가치에 눈뜨게 한다. 우리는 누구나 가장 좋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자기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즉, 우리 삶과 죽음의 윤리 도덕적 가치를 고양시켜야 하지
않을까? 성냄과 분노 어리석음 그리고 충동적 행동으로 인한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참인간, 참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진정한 삶과 죽음의 윤리 도덕을 완성해 나갈 수 있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은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가는 門이 아닐까?
나 자신도 삶과 죽음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없기에 ??? 표를 붙혀본다.
우리 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오래 사는 것 (長壽)을 가장 큰 福으로 삼았고,
제명대로 살다가 便安히 죽는 것(考終命)을 五福의 하나로 꼽았다.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
“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다.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을 돌려라. 그리고 미구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라.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그대가 아무리 번민할 때라도 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번민은 곧 해결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무란 무엇인가, 인간의 소원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 아아, 명성을 떨쳤던 사람도 죽고 나면 이렇게 빨리 잊혀지는 것일까!”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소포클레스(Sophokles)의 말이다.
이를 받듯이 몽테뉴(Montaigne, M.)는 그의 ≪수상록 隨想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自由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을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속박에서 우리들을 解放시킨다.”
어쨌든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단 한번 혼자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끝막음이다.
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거부하지 못하며 전신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은 다시 되풀이된다...사고뭉치, 거지발싸개같은 싸가지없는 쓰레기 인간들이 자살한다면
이런 글도 올리지 않을텐데, 그런 인간들은 남의 눈을 속이고 잘 살고 있으며 아까운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우리나라의 구조를 생각하니...ㅠ.ㅠ 오늘은 아까운 자살자들을 보면서 횡설수설해 봅니다.
이웃님들, 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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