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나는 지금도 경계인이다"
시사INLive 고제규 기자 입력2015.10.30. 02:05 수정2015.10.30. 12:29기사 내용
천식 호흡기를 챙겼다. 외출할 때 필수품이다.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불안해서….' 11년 전 구치소에서
천식이 처음 발병했다. 당시 호흡곤란을 겪기도 했다. 천식은 371일간의 귀향이 그의 몸에 남긴 화인
(火印)이다.
2003년 환갑을 앞두고 고국을 찾았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그는 이제 일흔한 살로, '동료들의 부고를 듣는'
고희를 넘겼다. 세월이 흘렀지만 ‘송두율’ 하면 국내에선 여전히 ‘거물 간첩’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08년 대법원은 반국가단체 구성 등 국가보안법 혐의 대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는 불편한 존재로 남았다. 보수뿐 아니라 진보 진영에서도 전향에 가까운
자기반성을 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한국어로 된 책 11권을 출간하고 기명 칼럼을 쓰던 학자는
그 사건 이후 한국에서의 활동이 학문적인 것마저 봉쇄되었다. 언론에서도 사라졌다.
기자는 2003년 그의 입국부터 법정, 이듬해 출국장까지 현장 취재를 했다. 11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왜, 지금, 다시 송두율인가? 2003~2004년 그때를, 현재 한국 사회를, 그의 학문적 개념을 빌리자면 ‘내
재적 비판적’ 시각으로 되돌아보고 싶었다. 인터뷰는 송 교수의 베를린 자택에서 두 차례 진행되었다.
부인 정정희씨(73)도 함께했다.
뮌스터 대학에서 언제 은퇴했나?
65세가 정년이니까 2009년 은퇴했다. 은퇴하고도 박사 논문을 지도하는 제자들이 있어서 그 학생들을
2년 정도 더 지도했다. 아내는 2007년 은퇴했다(정정희씨는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전문 사서로 일했다).
2003년 귀국할 때 시인 하이네를 많이 언급했다. 돌아가면 하이네의 <독일, 겨울 동화> 같은 저작을
쓰겠다고 했는데?
유대인으로서 프랑스 망명 생활을 했던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는 1843년 13년 만에 조국 독일을
찾았으나 결국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파리로 돌아가 그 고뇌를 <독일, 겨울 동화>라는 유명한 시집에
담았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많이 언급했다. 2007년 한국에서 펴낸 <미완
의 귀향과 그 이후>(후마니타스)가 그런 작업의 과정이었다. 2012년에는 동료 라이너 베르닝(Rainer We
rning)과 <코레아>라는 독일어 책을 냈다. 한국 문제와 관련한 마지막 저술이다. 국내에 번역은 안 됐다.
지금 구상하는 저서는 한국어로 쓰는 자서전이다. 자서전이기에 신중해야 하고 또 가끔 그때 사건으로 인한
격한 감정 탓에 한 줄도 못 쓰는 날도 있다. 동시에 독일어로 <경계인으로서 삶의 편린(가제)>을 쓰고 있다.
1960년대 후진국에서 온 젊은 철학도가 학자로서 성장한 과정, 남과 북,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고 하버마스
등 여러 당대 지식인을 만나며 지적 고뇌를 쌓아온 과정을 학술적으로 되돌아보려고 한다. 우리 말 자서전과
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마지막으로 독일어로 된 나의 현대성 연구 3부작의 마지막 권인 <현대성의 구성(가
제)>을 집필하고 있다. 서구 지성인들과 달리, 경계인이라는 위치에서, 또 분단 상황을 겪은 내가 보는 현대성
은 다르다. 저술 활동 외에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지인들과 가끔 산행도 한다.
지금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나?
시간이 약이란 말도 있지만 보통 때는 잊고 있다가도 불현듯 생각이 난다. 내가 그 당시에 고통을
당했어도 국가보안법이 없어졌다면 진정한 귀향이었을 텐데 하는 회한도 많다.
정정희:스트레스가 병을 만든다고 그 10개월을 어떻게 견뎌냈는지…(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억울했던
순간들, 고마웠던 분들을 생각하면서 통곡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와 짐 풀고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우리에게는 아직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긴 한숨 끝에 정씨는 웃었다.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변호를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당시 사건을 회상하며 우리 사회가 경계인을 이방인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방인은 말 그대로 완전히 밖에 있는 사람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받고 배제된
사람이다. 그러나 경계인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한 채 모두가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만드는 사
람이다. 난 아직도 경계인을 고집한다. 한국에서는 경계인을 이해도 못하고, 또 관심도 없으면서 단지 회색분
자로만 보는데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경계선이 면이 되고 공간이 되면 ‘생산적인 제3의 창조’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휴전선이 경계선이 아니고 경계면이 되고 평화 공간으로 활용된다면 새로운 삶의 영역 창조가 얼
마든지 가능하다.
당시 ‘경계인’이라는 표현을 스스로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앞서 말한 대로 한국에서 경계인은 회색분자로 비친다고 변호인단과 친지들이 걱정했다. 남과 북,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 2>가 개봉되었을 때 지금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 당시 주한 독일 대사였던 자이트 씨가 노르웨이 대사 등 다른 외교관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너무 충격적이라 토론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했다. 0과 1 사이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데 그땐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했다. 그때 나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구치소에 빨리 가는 것이 일종의 해방이
었다. 하버마스 표현대로 그때 난 ‘놀이공(Spielball)’이었다. 당시 내 생각을 온전히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
또 내가 이야기하면 ‘조·중·동’은 완전히 다르게 보도했다. 구치소에 들어가서야 나는 생각할 수 있는 여유
를 갖게 되었다. 그때 아내가 참 외로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
정정희:우리에게는 이 영화가 너무 잔인했다.
잔인했다는 건 그때 상황인가, 다큐멘터리 자체인가?
상황도 작품도 그랬다. 10개월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당사자여서 그런지 작품이 상처를 후벼 팠다.
우린 지금도 남편이 끌려가는 다큐멘터리 장면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우리 기호에 맞게 다 고쳐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이 많이 아팠다(이에 대해 홍형숙 감독은 '개인 중심의 서사보다는 송두율을 통한 대한
민국의 초상에 초점을 맞췄다. 송 교수 쪽과 의견 차이는 있었고 어찌됐든 송 교수에게 빚을 졌다'라고 말했다).
국정원 조사 때 1973년 방북 과정에서 노동당에 가입했다는 진술이 워낙 파장이 컸다.
가입에 따른 실효성도 없었고 법적인 유효도 지나서 처벌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국정원에서 먼저
확인한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진술했다. 난 크게 문제가 될 것으로 보지 않았는데 그게 보수 언론을 통해
공표되었고 나중엔 그것만 남았다.
국정원 조사나 검찰 조사 때 변호인 입회가 불허되었다. 입회했다면 좀 달라졌을까?
변호인이 옆에 있었으면 아무래도 달랐을 것이다. 독일 영사도 변호인 입회하에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알려주었다. 나중에 보니 국정원에서 청와대와 주한 독일 대사 쪽에 변호인이 입회한
걸로 거짓 보고를 했다. 조사는 예견했지만 형식적인 것으로 여겼다. 상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갈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가시밭길을 가면 가시에 찔리기 마련이다.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국가보안법 체제가 10년이 지난 오늘은 더 공고해졌고 종북 논쟁까지 겹쳐 더 이상 국가보안법 폐지를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 분노한다(송두율 교수 사건으로 한국의 피의자 인권이 개선되었다. 당시 송두율
교수 변호인단은 변호인 참여를 불허한 검찰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준항고를 냈다. 2003년 11월 대법원
은 피의자 신문 때 변호인 참여권을 헌법상 권리라고 결정했다. 조국 교수는 <피의자 신문 시 변호인 참여
권 소고> 논문에서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미란다 규칙의 또 다른 부분을 도입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변
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은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명문화되었다).
당시 주임검사를 기억하는가?
정점식 검사다. 법정에서 하도 비열하게 심문해서 기억에 남는다(피고인석에 앉았던 송 교수는 흑백논리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며 입을 다물었고, 검사들은 공판 때마다 돌아가며 답변 없는 질문을 읽어 내려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정정희:둘째 아들 린이 법정에 매번 갔는데 ‘내가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저 검사(정점식 검사)를
혼내주겠다’고 했다. 변호사들이 말렸을 정도다.
당시 정 검사는 부부장 검사였는데,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TF팀장을 지냈고 현재 대검찰청
공안부장이다.
1956년에 해산한 독일 공산당(KPD) 판례를 근거 삼았는데, 독일에서는 해산을 결정하는 데 6년이나
걸렸다. 또 1968년 빌리 브란트 정권에서 재창당한 독일 공산당(DKP)은 묵인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
소장(1994~2001년)을 지낸 유타 림바흐는 당시 해산 결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법무부나 검사들이 그런
걸 알기는 할까?(이명박정부 시절인 2008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헌법재판소장회의에 참석한 유타 림바흐
전 소장은 윤이상씨 사례를 들며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척도는 민주주의의 성숙도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은 필요 없다'라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송 교수에 대한 처벌보다 포용을 강조했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송 교수 석방 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자고 해 논란이 컸다.
정치인으로서는 드문 사람이라고 본다. 솔직 담백한 지도자였다. 시대가 그런 지도자상을 요구하지
않았나 싶다. 남북문제도 전향적으로 풀어가려 했고 독립국가의 수반으로서 미국에 대해서 ‘노’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 때 ‘노’라고 말한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때도 고급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며 보수 신문들이 야비하게 보도했다. 그 신문들은 오늘도 여전하다.
구치소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을 때 ‘썩은 내 나는 신문’이라며 언론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지금은 종편까지 생겨서 더하지 않나. 과거 남북학술대회를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사와도
함께 개최했다. 자기들이 끼었을 땐 주필이 나서서 우호적으로 기사도 썼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자기
논리로 돌아가더라. 내가 직접 사건을 겪은 뒤 신조가 생겼다. 조·중·동 기자하고는 사건 이후 한 번도
인터뷰한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간첩 혐의로 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현재 학문
활동이 왕성하다. 이에 비해 송 교수는 국내에서 학문 활동을 할 기회가 완전히 차단당했다.
정 소장은 원래 조선족이었지만 나는 한국에서 유년기-소년기-대학 시절을 보냈다. 한국에서 대학 나오고
유학까지 한 엘리트가 조국을 배반했다는 잘못된 편견이 남아 있다. 또 정 소장의 학문 대상은 문명사이고,
난 아무래도 사회주의라는 예민한 현실 문제가 연구 대상이다. 내가 북한 사회를 내재적 비판적으로 보자고
하면 무조건 적대적인 세력을 옹호한다고 여긴다(지난 4월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은 <통일담론 지성사>
를 출간했다. 강만길·문익환·리영희·백낙청과 함께 송두율의 통일론을 소개하며 재평가 작업에 들어갔다.
송두율 편을 쓴 박영균 교수는 ‘통일의 방법이 아니라 통일 그 자체를 철학적으로 접근한, 분단 이후 한국
에서 통일철학자라고 명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송두율이라는 재독 철학자’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경계인은 송두율에게 실존의 개념이면서 동시에 송두율의 통일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
여주는 개념이다. 2003년에는 한국 사회가 포용하지 못했다. 송두율의 통일 철학은 이제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를 비롯한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은 지난 8월 송 교수를 베를
린 현지에서 인터뷰했다. 내년에 대담집이 나올 예정이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동시성(남한)과 주체를 강조하는 비동시성(북한)의 세계가 공존한다고 했다.
남한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북한에서는 김정일·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면서 남북한 사이 동
시성과 비동시성의 간격이 더 커진 것 아닌가?
남북 사이에 동시성과 비동시성의 간격이 커진 건 맞다. 신냉전이 태평양 지역에 드리우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일본은 헌법을 고쳐서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이를 용인하고 있고. 신냉전 상황에서 남북한이 가지고 있는 카드가 별로 없다. 남북이 함께 성장할
철학이 필요한데, 박근혜 정부는 그런 철학이 없는 것 같다. 남과 북은 서로 주관과 객관의 관계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으로 북을 봐야 하고, 북도 남을 환경으로 보고 서로 적응해야 한다.
김정은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진단도 나온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김일성 주석의 사위 장성택을 하루아침에 정리했다. 중국에서도 불가능하다.
1970년대 중국에서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4인방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일사천리로 장성택을
정리한 것은 군부의 힘이 건재하다는 것이다. 김정은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밖에서 보면 김정은
유일체제로 보이지만 안에는 엘리트 집단이 있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론’을 주장하는데 진보 쪽은 오히려 통일론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통일대박론의 전제는 북한붕괴론이다. 독일식 흡수통일이 가능하다는 건데 중국이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경제가 어렵다 보니 흡수통일을 해서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인데, 기만
이다. 날아가는 물체를 방향도 속도도 모르고 쏘아서 명중시키겠다는 것과 같다.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과정이다. 통일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통일대박론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보려는 것이다.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나 정착할 계획은 없나?
좋은 충격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쁜 충격이라서 그런지 현재로서는 그럴 생각이 거의 없다. 큰아들 준이는
독일 여성과 결혼했다. 내 사건 때문에 가까이 있어야 해서 일본에서 조교수를 지냈다. 가끔 일본을 찾는데,
아들이나 며느리도 바로 옆 한국을 향한 발걸음이 여전히 무거운 듯하다. 둘째 린이는 의사로 한국에 파견
근무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거부했다.
정정희:두 아이에게는 상처가 여전히 깊다는 것이 부모로서 가슴 아프다(거실엔 손자 사진이 걸려 있었다.
송 교수가 독일 이름과 한국 이름을 합쳐 직접 이름을 지었다. 그는 '손자가 베를린 송씨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송 교수와 베를린 시 외곽 가토우 지역에 있는 시립묘지를 찾았다.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은 재독 음악가 윤이상이 묻힌 곳이다. 윤이상 묘는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이라며 베를
린 시가 유일하게 관리하고 있다. 묘비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
지 않는다)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송 교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이 반대하는데, 내가 죽으면
유골을 휴전선에 뿌려달라고 할까도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2003년 학문적 자존심마저 짓밟혔던 그는, 마지
막 순간까지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헤어지며 정정희씨는 '우리를 인터뷰해 기사를
써도 괜찮겠느냐'라고 취재진을 걱정했다. 기자는 '기사가 나가면 댓글은 읽지 말라'고 부탁했다. 부부는 말
없이 웃기만 했다.
고제규 기자 /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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