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좋은 환경은 곧 나를 가르치려는 주인공의 배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많은 境界에 부딪치게 된다. 그 境界는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고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境界가 어디서 일어났든간에 結局 그 境界란
바로 自己 自身인 것이다. 나와는 아무런 關係가 없이 오는 것처럼 보이는 境界들도 우선은 내가
거기에 있음으로서 겪게 되는 境界인데 내가 겪게 되는 境界란 結局 내가 數億劫 前부터 지어온
業/行爲의 結果이기에 나의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제의 業이 오늘의 境界가 되고 오늘의 境界가 業이 되어 내일의 境界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境界 속에서 그것을 싫어하거나 좋아하고, 미워하거나 사랑하고 한다면 그런 二分
法的인 分離 分別해서 보는 그 境界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거기에 무게를 보태어 未來라는 倉庫에
貯藏되었다가 다시 나를 향해 안팎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境界를 결코 分離 分別해서 二分法的으로 보지 말라. 즉, 나와 相對, 主와 客으로 나누어서 보지 말라.
어떤 아름다운 모습에도 迷惑되지 말고 어떤 위대한 것에도 굴하지 말라. 내가 있기에 世界라는 境界
가 있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온갖 境界가 있는 것이다. 모든 境界는 畢竟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宇宙萬物 一切가 오직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境界가 닥쳐올지라도 결코 動搖할 이유
가 없는 것이다. 어떤 境界이든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의 나의 다른 모습들일 뿐이다.
알고 보면 境界가 境界로 되는 것은 바로 거짓自己(假我) 때문이니, ‘나'나 ‘나의 것' 이라는 觀念 즉,
二分法的인 槪念 生覺, 分別화는 마음이 없으면 그 어떤 境界도 맑은 거울에 비친 風境과 같을 것이
다. 거울처럼 오직 대상 경계를 비춰 보일 뿐 愛憎이나 好惡등의 分別 判斷하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마음자리에는 迷惑과 煩惱 妄想이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다가온 境界에 쩔쩔매지 말라. 다가온 境界를 붙들고 끙끙거리지 말라. 그러는 모습이 비록 세상 사람들
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여 두 번 괴로워할 것인가. 境界가 닥치니 괴롭고 그 境界에 얽매이니 또
괴로운데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자초하려는가. 逆境界에 부딪혔을 때 ‘내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만
닥치는가.' 하고 의기소침할 일이 아니다. 그럴 때일수록 ‘이제야 성숙할 기회를 맞았구나.' 라고 생각해
야 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문제가 곧 自己의 未來를 左右한다. 결정권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의 자기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逆境界을 싫어하고 順境界을 반기는 것은 바로 揀擇하는 마음이니 그런 分別 揀擇하는 마음은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다. 主人公으로서의 마음은 툭 틔어 밝은 시작도 끝도 없는 虛空과 같아서 어떤 境界에도
執着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順境에 愛着을 해서 主人公과 만나고자 하는 生覺은 도리어 어리석은 마음
을 북돋을 뿐이니 空한 道理를 알지 못함이라, 道의 자리에는 군더더기 하나 먼지 한톨 붙을 자리가 없다.
道는 활발하고 드높고 시원시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쁜 環境이란 事實은 나를 가르쳐서 意識의 盛熟을 도모하려는 主人公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環境에 치어서 本來의 마음, 主人公을 잃어 버리는 것이 변명이 될 수도 없고 당연시 되어서도 안된다.
나쁜 環境은 알고 보면 主人公의 배려이니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가르치려는 그 큰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아니 지나치다 그렇지 않다 할 것도 없지만 逆境이 닥쳤을 때
工夫하는 바가 더 많다. 그러므로 逆境이 닥쳐오거든 工夫하는 절호의 機會로 알고 슬기롭게 넘기도록 해
야 한다. 넘기 힘든 고개가 넘고 나면 더 보람된 법이다.
모난 돌을 쪼는데 정을 쓰듯이 境界란 것은 나로 하여금 둘 아닌 道理 즉, 不二의 理致를 알게 하는 것이다.
主人公이 나를 圓融하게 둥글게 성숙시키기 위해 以心傳心으로 境界 相對를 通해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境界가 닥쳐온들 그 境界에 感謝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一切 境界에 참으로 感謝하고
또 感謝해야 할 일이니 남을 증오할 것도 배신할 것도 없다. 오직 主人公에게 感謝하는 歡喜의 웃음 띤 얼
굴만이 工夫하는 이의 모습일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順境界가 오면 좋아하고 깨달은 사람은 逆境界가 닥치더라도 껄껄 웃어버린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逆境界가 닥치면 슬퍼하고 안절부절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順境界가 와도 묵연히 흘려 보낸다.
닥쳐오는 境界는 같건만 그것에 對應하는 마음은 어찌 이리도 서로 다른가. 실로 修行者의 道德은 境界에
닥쳐서야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계를 묵연히 수용한다 함은 참는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境界조차도 本性이 空하다는 事實을 확연하게
알고, 또 그 境界는 自身이 誘發한 다른 모습의 나임을 알고, 나아가 그 境界란 곧 나를 단련시키는 길잡
이로서 나는 그것을 通해 進化한다는 事實을 아는 것이지 억울하지만 꾹 참고 나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境界를 분병 차별하는 마음으로 거부하지 않는 것이 수행자의 묵연한 자세인 것이다.
어떠한 境界도 그 實體를 찾아보면 空이다. 어떠한 煩惱 妄想도 그 實體를 찾아보면 空이다. 어떠한 貪欲,
罪業, 渴愛도 그 實體를 찾아보면 空이다. 정신적 물질적인 이 세상 모든 것은 本來 텅~빈 虛空의 幻으로
생긴 신기루 그림자 처럼 일어난 것, 幻化空身이다. 흰구름처럼, 번갯불처럼 일어난 것이다. 눈병 난 사람
이 멀쩡한 텅~빈 虛空에 꽃보라가 날리는 것으로 보는 것처럼 안팎의 모든 境界는 그러한 것이다.
모든 境界가 畢竟에는 나와 다르지 않다. 自己에게 닥쳐오는 숱한 問題들은 결코 회피하려 한다고 해서
피해지지 않는 境界들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믿음, 不二의 理致를 알고 主人公에게
모든 것을 놓고 맡길 때 모든 境界에 대한 두러움이 사라지고 그 境界을 正面으로 直視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 境界를 通해 不滅의 實相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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