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의미
中道는 수행자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길을
알려 준다. 佛敎의 基本 敎說인 緣起法에 따르면 이 世上 모든 것들은 서로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서로의 因緣에 依持해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라
서로 連結된 긴밀한 因緣 관계에 따라 生成되고 消滅되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緣起思想은 곧 無我思想
이다. 서로의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들은 非實體的이기에, 어떤 하나의 가치나 표현을 가지고 그것들
을 規定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길다 짧다, 옳다 그르다, 아름답다 추하다는 등의 分別과 相對的인 極端은
사실 인연에 따라서 잠시 그렇게 불려지는 것에 불과하다.
연필은 긴가 짧은가? 그것은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이 옆에 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봇대 옆에 연필은 짧지만, 성냥개비 옆에 연필은 긴 것이 된다. 인연 따라 길거나 짧다고
느끼는 것이지 길고 짧은 고정된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된 모든 것들은 무아이고 중도로
이해된다. 연기된다는 것은 나 홀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뜻이다. 내가 지금 여기 이 자리
에 있는 것은 나와 連結되어 있고 聯關된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인연으로 도울 때 가능한 것이다.
이 連結性은 이 우주, 법계, 진리의 세계 전체가 즉,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모두 함께
동참하여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서 나라는 꽃을 피워낸 것으로써, 重重無盡으로 連結되어
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事實 나를 있게 한 것은 이 宇宙 全切다. 結局 나는 이 우주와 다르지 않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우주, 법계를 바다라고 치면, 나와 너, 크고 작은 모든 존재는 단지 바다의 일부인 파
도일 뿐이다.
이 우주, 법계, 진리의 세계,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실상이 이러하기 때문에 너와 나는 서로 다르지 않고,
나와 우주는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너에게 베푸는 것은 곧 나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며, 너를 도울 때
내가 도움 받는 것이다. 이것이 眞正한 意味의 無住相보시이며, 자비다. ‘내가 너를 돕는다’는 相을 낼 아
무 理由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同體的인 生覺, 불이(不二)적인 사유의 바탕 위에서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
들은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을래야 돕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結局 緣起, 無我, 慈悲, 中道는
서로 다른 뜻이 아닌 같은 가르침이다.
세상을 중도적을 보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수행이다. 과도하게 어떤 한 가지 가치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특정한 목표에 집착해 있다거나, 한 사람을 유난히 애착하거나 미워한다거나, 특정한 정치적 성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거나, 내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이고 다른 종교는 다 틀린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심지어 수행을 통해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조차 中道에서 어긋난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中道的인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에 대해 특별히 과도하게 좋아하
거나, 과도하게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생각이나 판단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절대적으로 옳다
고 추종하거나, 과도하게 잘못이라고 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中道的으로 대한다.
中道的으로 대한다는 것은 좋거나 나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
대로 보는 치우치지 않은 시선을 말한다.
이처럼 中道는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거나, 다른 한 쪽을 틀렸다고 보는 극단적 편견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선입견과 차별심 없이 바라보는 삶의 실천이다. 差別과 分別없이 다만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매 순간 意識이 활짝 깨어있음으로써 나의 생각 말 행동 즉,
行爲가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생각이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말이 중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나의 견해가 극단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등에 대해 깨어서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다.
八正道(팔정도)의 의미
팔정도는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실천 수행이며, 中道의 수행을 구체적으로 실천 구현하는 길을 설한
가르침이다. 『중아함경』에서는 팔정도에 대해 ‘苦를 소멸하기 위해서’, ‘無明을 끊기 위해서’ 수행
하는 실천임을 설하고 있으며, 『잡아함경』에서는 ‘愛慾을 끊기 위하여’, ‘三毒을 끊어 없애기 위하
여’, 또 『증일아함경』에서는 ‘생사의 어려움을 건너기 위하여’ 팔정도를 수행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팔정도는 그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 수행 방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팔정도를 처음 접하면서 가장 궁금해 하는 점이 바로 ‘정(正)’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
이냐이다.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등을 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런 말이야 누구인들
못 하겠는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팔정도야말로 ‘고를 소멸하고, 무명과 애욕과 삼독을 끊으며, 生
과 死를 뛰어넘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수행이라고 말씀 하신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팔정도에서는 ‘올바른’이라는 수식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八正道의 정(正)은 中道의 중(中)의 의미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中道는 곧 연기, 무아, 무분별,
자비를 의미한다. 正은 또한 大乘佛敎의 空思想, 無自性과도 같은 의미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연기
법이라는 眞理를 이처럼 다양한 方式으로, 다양한 側面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설명하신 것이다.
八正道의 정(正)은 바로 緣起, 無我, 中道, 慈悲를 의미하며, 더 나아가 無分別, 無自性, 無執着, 空, 無爲
行 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八正道의 正 이것을 조금 더 쉽게 말하면, 그 어떤 槪念이나 偏見에도 치우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分別心이 없이, 생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보는 것을 말한
다. 正見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안목이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정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禪에서 말하는 入處, 當處의
本來面目을 곧장 직바로 보는 見性이다. 禪의 直指人心이라는 말도 분별망상을 배제하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 진리, 법,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손가락으로 곧장 가리켜 보이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八正道의 正見이다. 이처럼 조사선, 간화선을 비롯한 모든 수행법이 바로 中道와 八正道를
구현하는 수행 방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올바르게 생각한다는 正思惟 또한 치우침이나 분별 없이, 머무름 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즉 공과 중도, 무
집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니 이는 곧, 마음껏 생각을 하고 마음을 내되, 그 생각 마음에 한 치도 머무름
이 없이 생각하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말하되 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正語이고, 행동하되
행동을 한 바가 없는 것이 바로 正業이다. 팔정도는 이처럼 말하고 生覺하고 行動하고 사유하고 노력하
고 생활하고 고요히 깨어있는 일거수 일투족에서 생각 말 행동을 하되, 한 바가 없는 분별 없고 의식이
활짝 깨어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야말로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사상인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를 실천하는 대표
적인 수행 방법이다. 보통 우리는 올바른 見解로, 올바른 生覺을 하고, 올바른 言語를 쓰고, 올바른 生活을
하는 등의 行爲를 ‘修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좌선, 절, 염불만이 수행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 팔정도라는 사실은 곧 올바르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노력하고, 알아차리고, 고요히 하는 모든 行爲 自體가 낱낱이 삶 속의 ‘수행’이라는 것을 말한다.
정견(正見)의 수행
정견(正見)은 ‘올바른 견해’로서, 팔정도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수행 방식으로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잡아함경』 28권에서는 ‘정견이 있으므로 정지(正志) 내지 정정(正定)을 일으킨다’고 함으로
써 정견이야말로 나머지 일곱 가지 실천의 구체적 내용을 규정하고 있으며 팔정도 성립의 근본이 됨을 설
명하고 있다. 주로 경전에서는 정견을 ‘사성제에 대한 바른 지혜’, 혹은 ‘연기에 대한 바른 지혜’라고 설명
하며, 이는 곧 무명의 반대가 되는 명(明)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올바른’ 견해라 함은 곧 연기와 사성제, 무아와 중도, 자비, 무분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識見
을 의미한다. 정견은 세상을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連結되어 있는 연기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이며, 고정된 실체관념으로 보는 식견이 아니라 비실체적인 무아로써 보는 견해이고, 어느 한 극
단에 치우친 견해가 아닌 중도적으로 보는 식견이다. 또한 이처럼 일체 즉,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
상만물이 서로서로 중중무진으로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그러한 동체적인 自覺 속
에서 同體大悲心으로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식견이 나온다.
이러한 연기와 무아, 중도가 바탕이 된 정견은 어떤 특정한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견해
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中道에 어긋난다. 그래서 『맛지마 니까야』 72경에서는 “고타마 붓다는
어떤 견해를 취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여래는 그 어떤 견해도 취하지 않으며, 모든 견해를 없애버렸다”
고 답하고 있다. 나아가 “여래는 모든 견해, 모든 짐작, 모든 ‘나’라는 견해, ‘나의 것’이라는 견해를 깨버렸고,
떠났으며, 멸해 버렸고, 없앴기에 그 어떤 사견도 생겨나지 않아 해탈을 얻었다”고 설하고 있다. 사실 이 세
상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일도, 그른 일도 없으며, 의미 있는 일도 의미 없는 일도 없다. 그저 한바탕이라는
텅~빈 진실 위에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中道的인 行爲와 事件들이 連續的으로 이어질 뿐이다. 실체 없는
하나의 큰 바다 위에 비실체적인 파도만이 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져갈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八正道의 正見 즉 ‘올바른 견해/식견’은 어떤 특정한 견해만을, 특정한 종교만을, 특정한 사상과
진리만을 ‘올바르다’고 규정짓는 치우친 견해가 아니다. 中道的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다. 고정된 실
체적인 진리와 견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무아), 같은 견해가 인연 따라 진리가 되기도 하고 진리가 아
닌 것이기도 하는 연기적인 견해이고, 그렇기에 그 어떤 특정한 견해만을 절대적으로 추종하거나, 혹은 특
정한 견해를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처럼 정견이란 이미 정해진 올바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나 판단 분별로 바르다고 규정된 어떤
견해가 있다면 그것은 정견이 아니다. 아무리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를 설했을지라도 그것은 정견이 아니라,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뿐이다. 참된 정견은 뭐라고 이름지을 수도 없고, 머릿
속에서 개념지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생각, 감정, 욕망, 의식 같은 것들로 投映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봄일 뿐이다.
정견을 선불교에서는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곧장 바라본는 뜻에서, 卽心, 차심, 直心이라 하여 곧장 이 마음
이라고 설한다. 분별이 개입됨 없이 곧장 직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그렇게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곧
바로 진리를 보는 것이란 뜻이다. 즉 정견으로 이 세상을 볼 때 곧바로 진리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분별망상으로 걸러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불법, 마음, 본래면목을 곧장 바라
보는 것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한다. 정견으로 이 세상을 올바로 보는 것이 곧 견성이다. 정견으로 볼 때
우리 앞의 현실은 괴로운 예토가 아니라, 하나도 숨겨져 있지 않은 있는 그대로가 불국토, 입처개진의 진실
된 세계인 것이다.
정사(正思)의 수행
팔정도의 정사는 정사유(正思惟) 혹은 정지(正志)라고도 부르며, ‘바른 생각’ ‘바른 뜻’ 혹은 ‘바른 마음가짐’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에서도 ‘바른’이라는 것은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상에 대해
생각할 때 실체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생각을 의미한다. 또한 사유하
되 그 사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함이 없는 생각이다. 즉 생각하되 생각한 바가 없고, 필요할 때 생각을 사용
하지만 그 생각에 구속됨이 없는 생각을 말한다.
마음속에서 좋거나 나쁜 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내 생각’이라고 여기기 쉽다. 좋은 아이디어
가 하나 떠오를 때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거나, 이기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나는 이기적이다’라고 여김으로
써 그 올라오는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좋은 생각이 일어날 때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나쁜 생각이 올라올 때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생각
하나를 가지고 양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고,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와 무아, 중도에 대한 무지
에서 오는 바르지 못한 사유일 뿐이다.
연기와 무아, 중도적인 사유라면 그 생각 또한 무아임을 알아서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실체화하지 않는
다. 오온과 십팔계에서처럼 생각도 느낌도, 의지도 모두 인연 따라(연기) 생겨난 것일 뿐 고정된 실체가 있
지 않으며(무아), 그렇기에 어떤 특정한 생각에 치우쳐(중도) 집착(무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정사유란 어떤 생각이나 사유가 일어날 때에도 그것이 비실체적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고,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그렇기에 누구도 과도하게 미워하거나,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처럼, 사유하되 사유한 바가 없는
것이야말로 참된 정사유다. 생각의 주인이 되어, 생각을 써먹기는 할 지언정, 그 생각이란 꿈과 같은 허망한
虛想 幻想임을 알아 스스로 만든 그 생각에 휘둘리고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정사유는 特定한 방식
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의 생각을 바른 생각이라고 여겨 그런 생각을 하기 위해 애쓰고 노
력하는 것이 정사유의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 얻는 것이 아니다. 애쓰고 노력해 얻어
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취하고 버리려는 생각이기에 중도적이지 않은 것이다. 불법은 취하고 버리는 공부
가 아니라,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는 중도의 공부다. 참된 중도에 바탕한 정사유는 바른 사유를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여 정사유를 선택하고 악사유는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生覺이나 마음 자체가 分別妄想일 뿐이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다. 보통
수행하는 이들은 고요한 삼매를 얻으려고 생각을 억눌러 없애려고 애를 쓰는 것을 수행으로 알지만 수행
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필요한 생각이나 마음을 꺼내어 사용하되, 그 생각 마음에 전혀 걸림이 없는 것이다.
생각하되 생각한 바가 없는 그것이 참된 정사유이다.
그
래서 『잡아함경』에서는 정사를 ‘어떤 것이 정사인가. 탐욕을 뛰어넘은 생각, 성냄을 없앤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정사유를 실천하게 되었을 때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싫
어하지 않으며 그 어떤 잘못에 대해서도 성내지 않는다. 또한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애착함
으로써 탐욕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러한 정사유는 일체 모든 대상을 무한히 자비롭게 바라볼 뿐 타인
을 해치려는 생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생각도 실체가 없는 것인줄 안다면 그 생각을 대상으로
집착하거나, 성내거나, 해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어(正語)의 수행
팔정도의 정어는 ‘바른 말’ ‘올바른 언어생활’로 해석될 수 있다. 바른 생각이 현실을 만들어내는 업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라는 언어 또한 힘을 가진 행위다. 의업 즉 생각이 강력한 힘을 가진 업력이라면, 그
의업의 강력한 힘을 현실로 구현하는 첫 번째 기관이 바로 입이며, 말이다.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떠도는 생각일 때는 아직 현실을 창조하는 힘을 지니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말로 튀어나오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강력한 힘을 지닌 업력이 되어 업보를 불러오게 된다. 실제로 우리
腦는 소리 내어 말을 하면, 자신이 한 말도 외부에서 입력하는 지시적 정보로 받아들여서 그 방향으로 작
업을 한다고 한다. 『식물의 정신세계』에서는 식물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 끝에 시들어 버린
다고 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여기서 말한 말의 힘과 창조력, 구업의 업력은 마치 꿈 속에서 꿈을 창조하는 것처럼 허망
한 창조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신구의 삼업으로 삶을 창조하지만, 그 창조된 삶 자체가 비실체적인 空한 것
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어에서 바르다는 의미도 물론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 무분별을 의미한다.
‘올바른’ 말을 해야하겠지만, 올바르다는 그것이 정해진 실체적인 바른 것은 없다. 인연따라 바르다거나
바르지 않은 말이 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인연따라 너와 내가 서로 連結되어 있음을 안다면 상대방을 향해
욕설을 한다거나, 거짓말이나 이간질하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에게 하는 행위가 곧 나에게 하는
행위이라는 연기적 自覺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비로운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무아와 중도라는 자각이 바탕이 된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을 내포하는 언어나
치우친 언어를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상대방을 향해 옳다거나 그르다는 양 극단의 판단이 내포된 말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무분별의 말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향해 격앙된 말투로 큰 소리를 쳤을지라도, ‘그 녀석이 나에게 화를 냈다’거나, ‘나를 미워한다’거나 하고
판단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그가 나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고만 말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서 현실을
걸러서 해석한 언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표현들이 사용될 것이다.
根源에서 볼 때, 중도와 무분별에 입각한 정어란, 모든 필요한 말을 다 하면서도 전혀 그 말에 사로잡히지
않는 언어습관이다. 말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象徵이며, 方便임을 알기에 그 말의 뜻을 따라다니며 그
말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럴 때 모든 말은 의미와 분별을 지닌 하나의 뜻이 담긴 말이 아닌 그저 잠시 인연
따라 필요해서 사용할 뿐, 그 말의 뜻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바로 그 때 모든 말은 진언이 되고, 화두가
된다. 사실 참된 정어를 구현한 수행법이 바로 話頭라고 할 수 있다. 화두는 그 말의 뜻을 따라가 이해해서
는 안 된다. 뜰 앞의 잣나무나 마른 똥막대기, 이뭣고라는 말은 그 말의 의미 속에 무슨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은 하나의 방편일 뿐, 諾處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화두는 바로 그 말 뜻을 알려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직지인심이라고 하듯, 진리, 법, 마음을 곧장 가리키기 위해 방편으로 만든 語 以前의
소식이다.
이처럼 바른 말은 그 말 뜻이 무슨 실체적 의미가 있다고 여겨 말 뜻을 따라 이리 저리 휘둘리는 말이 아닌,
다만 인연따라 필요에 의해 사용할 뿐, 그 말에 사로잡히거나 휘둘리지 않는 말이다. 그렇기에 수도 없이
많은 말을 하더라도 한 마디도 한 바가 없는 것이야말로 참된 말이며, 정어이다.
정업(正業)의 수행
팔정도의 정업이란 바른 행위다. 앞서 설명했듯이, 팔정도를 이 삼업에 대비해 본다면 정사는 의업, 정어는
구업 그리고 정업은 신업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정견이라는 무명이 사라진 바른 견해가 먼저 있고
나면 정사라는 의업이 바로 설 수 있고, 그 다음으로 입으로 짓는 구업과 연이어 몸으로 짓는 정업이 바로
설 수 있는 것과 같은 순서의 이치라 볼 수 있다.
정(正)을 연기, 중도, 무아, 자비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정업은 ‘연기’적인 견해와 사유가
바탕이 된 바른 행위를 의미하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행위를 의미하고, 실체론적인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무아’의 행위이며, 결과적으로 살생과 도둑질, 사음 등의 몸으로 짓는 악업을
여읜 ‘자비’로운 행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너무 게을러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거나, 혹은 몸을 너무 혹사 시키는 양 극단을 떠나 조화로운
중도로써 적절히 일하고, 운동하고, 움직이며 행위하는 것이 곧 정업이다. 또한 이 몸이 지수화풍이 인연
따라 모여 인연 가합된 무아임을 모르고, 이 몸을 ‘나’라고 착각하여 집착하게 되면 외모지상주의에 빠지
거나, 이 몸이 병들고 늙게 될 때 내가 붕괴되는 어리석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잡아함경』에서는 “어떤 것이 정업인가.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을 떠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가 바탕이 된 바른 행위는 곧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으며, 사음을 떠난
행위인 것이다.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을 떠난 청정한 행위이다.
이와 같은 바른 행위야말로 우리 불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생활 속의 ‘몸의 수행’인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
이든 자연만물이든 살생하지 않는 불살생의 행위가 바로 정업의 수행이며,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자비롭게
나누어 주는 행위가 바로 정업의 수행이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청정한 행위가 바로 정업의 수행인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 동식물 등에 대한 파괴와 살생 등의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정업이라는 수행에 어긋나는
행위가 된다. 인간의 동물 살생을 보면, 가축들은 인간의 단순한 식욕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생명의 정신
에 반하는 무자비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성장촉진제, 성호르몬, 항생제 등을 과다하게 투여 받으며 대량
사육과 대량사육을 강요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식 때문에 사육되고 죽어가는 동물로 인한 환경오
염 또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 약 12억마리의 사육면적은 전 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그들은 수억
명을 넉넉히 먹여 살릴만한 양의 곡식을 먹어치우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소의 증가는 열대우림 지역이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되는 등 열대우림 파괴의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 욕망에 의한 동물사
육과 살생은 결국 엄청난 환경오염을 재촉하고 있다. 이 모두가 정업 즉, 바른 행위가 아닌 삿된 행위다.
결국에는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에 무지하여, 인간만이 자연보다 우월하며, 우위에 있다는 어리석은 분별심
으로 인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며, 자연을 약탈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불투도라는 정업을 지키지 못한 어
리석은 업인 것이다.
정업, 즉 바른 행위란 결국 연기, 무아, 중도, 자비, 무분별, 무집착, 무주의 행위다.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에 끄달려가지 않는 것이다. 그 행위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행위의 결과가 없다. 유위
행이 아닌 무위행이기 때문이다. 정업 즉, 무위행은 해도 한 바가 없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은 이는 온갖
행동을 해도 그 행동이 업보를 가져오지 않는다. 해도 한 바가 없는 무주, 무위의 행이기 때문이다. 바른
정업이란 이처럼 하되 한 바가 없는 집착 없는 행이다.
正命의 수행
팔정도의 정명은 ‘바른 생활’ ‘바른 생계’, ‘바른 직업’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릇된 생활태도를 버리고 정당
하고 바른 생활을 정당한 직업과 생계로써 해 나가라는 것이다. 정명은 출가 수행자에게는 바른 생활수단을
의미하고, 재가자에게는 바른 직업을 의미한다.
주로 출가자들이 행해야 할 바른 생활, 바른 생계에 대해 『중아함경』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할지라도 여러
가지 축문을 써서 삿된 생활을 존속하지 말라’고 했고,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점을 치며 살아가는 것’ 또
한 바른 생활수단이 아님을 설하고 있고, 『잡아함경』에서는 ‘정명이란 의복, 음식, 침구, 탕약을 법에 맞게
구하고 법에 맞지 않는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부적을 써 주거나, 점이나 사주, 관상을 봐 주는 등의 행위를 경제적 생활수단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가르
침이 출가자의 정명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왜 부적이나 사주나 관상을 보지 말라고 하셨을까? 이 또한 정
명에서 ‘바른 생활’의 ‘바르다’는 뜻이 연기, 무아, 중도, 자비 사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과응보와 연기적
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라는 업 지은 바대로 업보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행위를 하고 살았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일 뿐, 부적을 써서 지니고 다니는 등의 요행을
바라거나, 사주를 보고 피해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인과응보를 모르는 삶일 뿐이다.
보통 초기불교에서는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의복, 음식, 침구, 탕약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출가 생활을 위해 재가자에게 받는 보시에 대해서도 법에 맞게 구할 것을 요구하
고 있다. 법에 맞는다는 것은 곧 연기적으로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온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억지로 보시 받기 위해 재가자에게 요구하거나, 구걸하거나, 점이나 관상을 나쁘게 봐 줌으로써 복을 지
어야 한다고 겁박하거나, 자신의 깨달음이 높은 것처럼 꾸며 보시를 하도록 유도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출가자 뿐 아니라, 재가자를 위한 정명도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무기를 사고파는 것’, ‘술이나
고기나 독극물 등을 사고파는 것’ 등이 정명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맛지마 니까야』에는
‘사기를 치는 것’, ‘남을 배신하는 것’ 등을 설하고 있다. 무기를 사고파는 것은 생명을 해치는 도구이기
때문이고, 술이나 고기, 독극물 또한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기를 치는
것과 남을 배신하는 것 등을 생활수단으로 삼는 직업들 또한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설해지고 있다.
결국 바른 생활은 연기법을 생활화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인연 따라 스스로 정직하게 노력하여 얻은
의식주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인연법을 안다면, 복권이나 대박을 꿈꾸는 등의 요행을 바라거나, 투기, 고리
대금 등의 바르지 못한 생활을 저절로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연기법에서는 일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가 곧 나이며, 상대가 잘 될 때 나
또한 잘 될 수밖에 없는 상의 상관적인 자비사상을 설하고 있다. 요즘 기업에서도 함께 성장, 발전해야 할
동반자로 생각하는 상생경영, 동반성장이 많은 대기업들의 주요 경영 방침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연기
적인 직업윤리이며, 정명의 실천이 아닐까.
이러한 정명의 가르침은 『법구경』의 “마치 저 벌이 꽃의 꿀을 모을 때 그 꽃의 빛과 향기를 다치는 일이
없이 다만 그 맛만을 가져가는 것처럼 비구가 마을에 들어갈 때도 그러하다”라고 한 것처럼, 자연의 질서
를 거스르지 않고,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의식주에 만족하며, 나를 위해 상대를 헤치거
나 빼앗는 일 없이 모두 함께 공존 공생하는 조화로운 삶의 실천이다.
正精進의 수행
어제에 이어 팔정도의 정정진이다. 정정진은 정방편이라고도 부르며 ‘바른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정진은 팔정도의 나머지 지분의 실천에 있어 중간에 쉼 없이 게으르지 않는 노력을 행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중아함경』에서는 “이미 생긴 나쁜 법을 서둘러 없애고, 아직 생하지 않은 나쁜
법을 서둘러 생기지 않게 하고, 아직 생하지 않은 선한 법을 서둘러 생기게 하고, 이미 생한 선법은 물러
나지 않도록 머무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고, 『잡아함경』에서는 “꾸준히 힘써 번뇌를 떠나려 하고 부지
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물러나지 않도록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정정진은 꾸준히 힘써 번뇌를 떠
나고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물러나지 않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이미 생긴 나쁜 법을
서둘러 없애고, 아직 생하지 않은 나쁜 법을 서둘러 생기지 않게 하며, 아직 생하지 않은 선한 법을 서둘러
생기게 하고, 이미 생한 선한 법은 물러나지 않도록 머무르게 하는 것으로, 이는 37조도품의 4정근을 의미
한다. 결국 정정진은 선법을 증장하고 악법을 버리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여기에서 선법과 악법은 단순히 선행과 악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
음의 요인이 되는 7각지 등으로 마음관찰, 기쁨, 마음집중, 평안 등을 더욱 더 지속되도록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며, 악법은 육근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적 욕망이나, 악의(惡意), 남을 해치려는 마음 내지는 탐진치
삼독심 등을 서둘러 없애고 생기지 않도록 끊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법을 서둘러 없애기 위한 노력으로는 눈귀코혀몸뜻 육근의 감각기관을 잘 보호하고 감각활동을 잘 관찰
함으로써 감각기능과 활동이 탐욕과 악의 등 나쁜 법들이 육근을 통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의미
한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무분별로써 볼 뿐, 감각적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
는 것이나, 귀로 어떤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를 분별하여 나쁜 소리나 악담에 휘둘리지 않는 노력 등을
正精進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선법을 증장하기 위해서는 7가지 깨달음의 요인이 되는 칠각지를 꾸준히 닦아야 한다. 칠각지란
염각지, 택법각지, 정진각지, 희각지, 경안각지, 정각지, 사각지를 말하는 것으로, 염은 마음관찰을, 택법
은 법에 대한 고찰을, 정진은 노력, 희는 기쁨, 경안은 가볍고 경쾌한 마음, 정은 바른 선정, 사는 평온과
평정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꾸준히 증장시키고자 노력해야 하는 마음가짐이 바로 이것이다. 염각지는 생활
속에서 늘 깨어있는 마음관찰을 유지 시키는 것이며, 택법각지는 일체 모든 존재가 연기이며, 무아임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를 닦아 가야 함을 말하고, 정진각지는 꾸준한 노력을, 희각지는 마음이 언제나 기쁘
고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경안각지는 그러한 희각지의 기쁨을 넘어 마음이 가볍고 평안
하여 고통 받지 않는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정각지는 바른 선정을, 사각지는 좋거나 싫은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양 극단을 버린 채 좋고 나쁜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고 평안을 지키는 여여
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정진은 나아가 다른 모든 팔정도 덕목들을 중도 포기 없이 꾸준히 닦아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바른 견해를 지속적으로 유지 시키고, 올바른 사유와 올바른 말, 생각, 행동, 직업, 나아가 올바른 선정과
깨어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좋은 수행이 있고 가르침
이 있다고 할지라도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을 피우려는 사람이 나무를 조금 비비
다 말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아 결국 불을 얻지는 못하고 말 것이다.
正念의 수행
正念은 ‘바른 전념’ ‘바른 깨어있음’ ‘바른 관찰’ ‘바른 알아차림’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중아함경』에
서는 正念을 “안의 몸을 관찰하기를 몸답게 하고 내지 느낌·마음·법을 관찰하기를 느낌·마음·법답게 하나
니 이것을 正念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正念이란 몸을 있는 그대로 몸답게 관찰하고, 느낌을 느
낌 그대로 느낌답게 관찰하며, 마음을 마음 그대로, 법을 법답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는 몸·느낌·
마음·법을 관찰함에 있어 아무런 偏見과 分別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도 六根으로 六境이라는 대상을 늘 본다. 눈으로도 보지만, 귀로도 들어본다고 하고, 코로는
냄새 맡아 본다고 하며, 혀로 맛 본다고 하고, 몸으로도 느껴본다, 생각해 본다고 하듯이 六根은 언제나 보
는 것을 그 기능으로 한다. 즉 우리는 언제나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대상 경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分別心에 끼워맞춰서 알음알이, 색안경을 끼고 대상 경계
를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기 妄想 속의 虛妄한 世上만을 보고 있다.
正念이라는 것은 곧 分別心과 알음알이, 六識으로 걸러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分別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사실 수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요즘 위빠사나라고 하여 마음觀察이라는 것을 특별한 고도의 수련인 것처럼 이야기하고는 하지만, 사실
본다는 것은 애써서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六根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六境을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고난도의 묘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며, 엄청난 정신집중이 있어야만 바로 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알아차림’이라는 위빠사나의 수행이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가장 단순하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다만 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행하고 있는 것이지,
특별히 수행하는 사람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쉽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중생들은 있는 그대로
의 세상을 自己 思考方式대로, 자기 生覺에 걸러서, 자신의 내면에 온갖 判斷 分別의 필터를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 끼워맞춰서 解釋하고 바라보는 習慣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六識(分別識)이다. 볼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이름 붙이고 좋다거나 싫다는 分別의 꼬리표를 붙여서 대상을 보
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분별해서 애착을 일으키고, 어떤 사람은 밉다고 분별해서 싫어하는 마음
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대상을 집착하여 갖고 싶지만 가지지 못할 때 괴롭고, 싫은 대상을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되지 않을 때는 괴로워지는 것이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고, 그저 한 존재를 아무런 판단
분별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연히 그 사람으로 인해 괴롭
거나 애착하거나 미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바른 관찰, 위빠사나,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이처럼 대단한 노력과 집중력과 수행력이 필요한 특별한 수행
법 같은 것이 아니다. 存在의 가장 自然스러운 狀態요 전혀 힘쓸 필요가 없는 상태다. 즉 이것은 有爲法이
아닌 無爲法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노력이 필요 없다. 그러나 있는 그대
로의 對相을 자기 思考方式대로 分別하고 解釋하고 判斷하여 옳고 그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야
말로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인가? 正念이라는 것은 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다만 分別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正定의 수행
팔정도의 정정은 ‘바른 선정’, ‘바른 마음집중’을 뜻한다. 『잡아함경』에서는 “마음을 어지러이 흐트러
지지 않게 하고 굳게 거두어 가져 고요한 三昧에 든 一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바른 마음집중은
하나의 對相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四念處가 바로 마음집중의 근
거”라고 함으로써, 몸과 느낌, 마음과 법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것을 바른 마음집중이라
고 설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觀察과 마음集中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진다. 이를 지관(止觀)이라고도 하는데,
지(止)는 ‘멈춘다’는 의미로 온갖 번뇌 망상과 혼란스러운 마음이 모두 멈추어지고 고요한 삼매의 상태를
말한다. 때로는 이러한 고요한 삼매에 이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身受心法이라는 특정 대상에 마음을 집
중하는 수행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正定을 통해 마음이 身受心法이라는 사념처의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혼란함이 사라지고 고요해지게 된 바탕에서, 고요히 관찰하는 正念의 수행이 이어질 수 있
는 것이다. 이 지관수행을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도 부른다. 사마타라는 집중 수행을 통해 삼매에 이르게
되고, 위빠사나의 수행을 통해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
이러한 止觀을 다른 말로는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止’의 사마타 수행은 禪定을 가져오며, ‘觀’이라는 위빠
사나 수행은 智慧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모든 수행자가 실천하고 배워야 하는 3가지 배울
것인 삼학(三學)은 바로 이 定慧에 계(戒)를 덧붙인 것에 다름 아니다. 戒定慧 三學이야말로 불교 수행과 실
천의 核心인 것이다.
마음집중을 통해 삼매를 얻는다고 했는데, 쉽게 예를 들면 책에 완전히 몰입되어 책 속에 빠져들어 집중하
게 되면 독서삼매에 빠져 주변에서 이름을 부르더라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몰입이 되곤 한다. 이처럼 어떤
대상이 되었든 그 대상에 깊이 몰입하여 집중하게 된다면 어떤 대상을 통해서든 삼매에 이를 수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책도 도움이 되는 양서에 몰입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겠지만, 폭력적이거나, 욕망을 부채질하
거나 하는 바르지 못한 책에 집중하게 된다면 독서삼매는 있을지언정 그 결과는 좋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集中의 對相이 重要한 것이다.
그렇기에 正定에서의 ‘올바른’은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라는 바른 법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되었든 바르게 마음이 집중되고 관찰된다면 그 대상이 無常하고 無我이며 잠시 서로 連結된
因緣 따라 만들어진 緣起的인 假合物임을 洞察하게 될 것이다. 바른 마음집중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극단에 치우친 생각에 집중하거나, 어느 한 쪽만을 전적으로
고수하거나, 애착하거나 미워하는 양 극단의 대상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지혜와 자비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참
된 正定이다.
根本的인 意味에서 正定이라는 올바른 禪定은 앞의 正念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올라오는 分別心, 妄想
煩惱을 억지로 찍어눌러서 이뤄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방편으로는 초심자들에게 특정한 대상에 집중하도
록 이끌어 줌으로써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의 힘을 길러주기도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선정은 곧 사라
질 수밖에 없다. 올바른 禪定은 人爲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存在의 가장 自然스러운 天眞한 本然
의 상태다. 분별 망상 번뇌로 들끓면서 생각이 날뛰는 상태는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우리의
평소 意識이 이처럼 分別 妄想에 휘둘리기 때문에 正定이 늘 깨진 상태로 삶을 살게 되는 것일 뿐이다.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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