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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를 통한 견성의 구조

장백산-1 2016. 4. 27. 14:31

화두를 통한 견성의 구조

 

눈으로 눈을 보려면, 눈은 눈을 볼 수 없죠. 눈을 감고 있으면 눈이 보이는가요? 안 보입니다. 눈을 떠도

눈이 안 보입니다. 눈을 감아도 눈이 안 보이고 눈을 떠도 눈이 안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눈으로 눈을 볼

수 있을까요?  화두는 이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본래면목, 불성, 내 안의 부처, 내 안의 주 하느님 아버지, 본성, 본심, 진심, 마음의 본래 성품, 진짜 나,

근원의 나, 본래의 나는 언제나 수지 않고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눈은 언제나 보고 있지 않습니

까? 눈은 모든 것을 보고 있잖아요. 그런데 눈이 눈은 못 봐요. 우리가 ‘佛性을 봐라’ 하는 말은 눈이 눈

을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단 말이죠. 佛性은 언제나 이렇게 우주에 충만하게 언제 어디에나 항상 드러

나 있단 말이죠. 언제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佛性을 볼 수가 없습니다. 볼 때는 보는 자

와 보는 행위와 보이는 대상에 佛性이 있고, 들을 때는 듣는 자와 듣는 행위 들리는 소리에 佛性이 있습

니다. 그런데 그런한 佛性은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불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습습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면 눈이 눈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요? 눈이 눈을 본다는 것은 뭔가 보는 순간에 ‘어! 보는 뭔가

가 있구나’ 하는 것이 그냥 확인되는 것 아니겠어요? 뭔가가 보여지니까 보는 작용을 하는 눈이라는 것이

있겠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는 바깥에 있는 사물, 대상만을 본단 말

이에요. 눈이 눈으로 눈을 볼 수가 없음으로 눈으로는 눈이 있음을 확인하지 못한단 말이죠. 언제나 우리는

눈으로 외부 대상 사물을 보고 있지만 눈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딱 보다 보니까, ‘아! 보여지는

대상이 있으려면 보는 뭔가가 있어야 되는 것이구나’ ‘아! 보는 作用, 그게 있으니까 눈이라는 게 있는 것이

구나’ 라고 탁 알게 된단 말이죠.

 

눈을 보려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든 짚어 주면서 ‘이것’하고 일러주면 그것을

보는 作用을 통해 눈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道를 보는 것 즉, 見性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道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든, 마른 똥막대기라고 하든, 차나 한 잔 하고 가

라고 하든, 그저 할~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한 대 딱 때려줘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禪問答에서는 다양한 方便을 통해 본래면목, 불성, 참마음(眞心), 佛性을 짚어주는 겁니다. 이렇게

본래성품, 佛性을 곧장 딱 가리키고, 짚어주는 行爲를을 直指人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직지인심을

해 주면,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궁금해합니다.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고  모

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리키고 짚어주는 것이 도대체 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음, 그것이 바로 화두입

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래면목, 불성을 딱딱 가리키고 짚어주면, 直指해 주면 그 대상을 보고 ‘거기 뭔가 道가

있나?’ 하고,  “뜰 앞의 잣나무다” 이러면 뜰 앞의 잣나무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뜰 앞의 잣나무 속에

뭔가 道가 있구나, 숨겨져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 버리면 이거는 도와는 아주 어긋나는 겁니다. 참나

라는 성품을 생각으로 찾으면 결코 참나의 성품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생각이 딱 끊어진 자리에서 道, 참나의 성품을 찾고자 하는 어떤 하나의 發心, 그 마음이 있어야 되고,

찾아야 되는데, 궁금하긴 하지만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잖아요. ‘오직 모를 뿐’하는 ‘모르겠다’하는 話頭

를 든단 말이죠. 그게 疑心입니다. 話頭고 공안(公案)이고 의정(疑情)이고 그 모르는 것으로 똘똘 뭉쳐 있

으면서 도, 본래면목, 불성, 참나의 성품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집중 될 때 결국 이제 話頭가 打破

되고, 한순간 확~ 하고 불성을 確認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죠. 물론 쉽게 되지는 않죠.

 

그러니 늘 뭔가 모르게 이걸 확연하게 알게 되기 전까지는 깝깝하고, 답답하고, 알아야 될 것 같고, ‘이생

에서는 풀어야 되겠다’ 하고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發心修行이고 話頭입니다. 話頭의 核心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간화선, 조사선은 도저히 모르겠다 하고 포기하거나, 두려워하지 마

시고, 그 모르겠다는 마음 그 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버텨 보십시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