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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법과 유위법이란?

장백산-1 2016. 4. 29. 11:48

무위법과  유위법이란?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받는 이유가 인과응보로써 즉 괴로움의 原因이 될 만한 행위을 했기 때문에 그

果報로써 괴로움이라는 結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業報를 불러오는 行爲를 業行, 혹은 有爲行

이라고 한다. 유위행에서 有爲란 ‘意圖的이고 作意的임’의 의미를 지닌다. 즉 유위행이란 내가 分明

意志나 意圖를 가지고 行한 行爲를 뜻한다. 오온(色受想行識)에서 行蘊을 말한다.

 

십이연기에서 無明-行-識 할 때 그 行 또한 有爲行이다. 어리석은 무명으로 인해 유위행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알음알이인 分別心(識)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알음알이, 分別心인 識

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흔히 말하는 衆生心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이 識, 즉 分別心,

分別하는 意識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괴로운 곳이라고 分別해서

바라본다. 십이연기에서는 바로 이 識의 原因이 行이라고 한다.

 

이처럼 유위행 즉 의도적인 행은 반드시 어떤 結果를 가져온다. 좋은 행 善行은 善한 結果를 가져오고,

나쁜 행인 惡行은 나쁜 結果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의해서  우리의 삶, 세상, 현실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즉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결과라는 현실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意圖가 더 중요한 要因인 것이다.

 

유위법이라는 의도적인 행위와는 반대로 분명하고 확실한 意圖가 개입되지 않는 自然스러운 있는 그대

로의 行爲를 無爲法이라고 말한다. 즉 유위법은 의도를 가지고 행위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무위법은 分明한 意圖를 가지고 行爲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意圖 없이 행하

는 行爲이기에, 실제로는 행위를 했지만, 행위를 한 바가 없는 것이다. 즉 행위는 있지만 그 행위에 따른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 행위이다. 즉, 무위행은 유위행과는 달리 業報라는 삶, 세상, 현실을 창조해내지

않는 행위이다.

 

깨달음을 터득한 사람의 행위가 무위행이다. 하되 한 바가 없는 행위이다. 행위에 어떤 흔적도 남지 않으며,

結果 業報를 남기지 않는다. 행위 그 자체로 그 행위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은 이는 하루

종일 일하고, 生覺하고, 行動하고 남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 행동를 했을지라도 전혀

아무것도 한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런 망상 번뇌를 남기지 않고, 아무런 業報를 남기지 않는다.

 

금강경에서 ‘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 바로 無爲의 마음을 내라는 것을

뜻한다. 마음을 냈지만 마음을 낸 바가 없는 것이다. 마음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執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할 마음을 냈지만 내 스스로 열심히 일했다는 相에 머물지 않으며, 내

가 열심히 했으니 그 結果를 얼마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의도도 전혀 없다. 그저 열심히 일했다는 그 자체로

끝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결과에 따른 불행이나 번뇌에도 시달릴 일이 없다.

 

수행도 이와 마찬가지다. 참된 수행은 유위의 수행이 아니라 무위의 함이 없는 수행이야말로 진짜 수행이

다. 그래서 진짜 수행은 해도 한 바가 없는 수행이다.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어내거나, 조작하는 수행은 참

된 수행이 아니다. 유위로써 행한 수행이라면 유위의 결과, 업보가 있을 뿐이지만, 깨달음은 유위로써 다

다를 수 없는 무위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힘들여서 유위로써 만들어낸 것은 生死法 生滅法 因緣法이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消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眞理는 생겨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진리, 깨달음은 有爲心으로 마음을

갈고 닦아서 얻을 수 있는 물건아니다. 내가 하는 수행이 함이 없는 무위인지, 유위에 치우쳐 있는 것

은 아닌지를 돌이켜 보자.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