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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삶 그대로가 불국토, 무한한 장엄이다

장백산-1 2016. 5. 1. 20:15

이 세상, 삶 그대로가 佛國土,  무한한 장엄이다 |법상스님의 금강경과 마음공부 
 소함 | 2016.05.01. 12:34 http://cafe.daum.net/truenature/S87Y/40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 함은 곧 불국토를 장엄한다 함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불국토를 장엄한다 함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불국토는 별도로 장엄할 필요가 없다. 불국토는 본래부터 이미 더없이 완벽하고 완전해서 더 이상

손 댈 곳이 없는 곳이다. 추가적으로 어떤 장엄이 따로 필요한 불국토 즉, 부처의 영토라면 이미

그곳은 불국토가 아니다. 스스로 완전한 곳 그곳이 모든 부처님의 영토 즉, 불국토, 정토다.

 

그러므로 보살은 부처의 영토인 불국토, 정토를 장엄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불국토, 정토는 장엄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장엄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런 말이 필요 없다.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인 모든 불보살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바로 부처의 영토, 정토이기 때문이다.

 

부처의 영토라는 불국토, 정토는 어떤 곳인가. 부처님 나라의 영토이며, 깨끗한 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처의 영토, 땅이란 特別히 定해진 地球上의 어떤 場所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空間이 아니다.

만약 어떤 特定한 空間領域을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라고 한다면 그곳은 이미 더 이상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가 아니다.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는 特別하고 分明하게 定해진 空間領域이 없고  별도로

境界線을 그을 수도 없고 그을 필요도 없는 그런 곳이다. 부처의 영역, 불국토, 정토라는 境界를 긋는 순간

이미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는 사라지고 없다.

 

깨달음도 시간과 공간을 超越해서 시간과 공간의 區別이 없는데 하물며 어떤 特定한 空間領域을

特定해서 그곳을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지역을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라고 한다면 그 지역에서 벗어나 있는 지역은 예토(穢土), 卽 더러운 땅이 될 것인데,

그렇게 깨끗한 땅과  더러운 땅으로 나누고,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놓고 그 둘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땅을 가지고 어찌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처, 깨달음은 털 끝만큼의 분별 차별도 없이 완전하게 평등하다. 깨달음, 부처는 그 어떤 분리

나뉨도 없고, 양쪽으로 분리된 두 극단도 없다.


그러니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를 장엄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불보살 卽,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영토인 지금 여기 있는 이

세상인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를 더 이상 장엄할 아무 이유가 없다. 아니 부처가 부처의 영토를

장엄한다는 말 자체가  눈이 눈을 본다는 말과 같다.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그들 자체

그대가 불보살이고 불보살의 영토, 불국토, 정토이다.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인 우주삼라만상만물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놔두고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부처들이고 보살들인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부처의 나라, 극락세계, 불국토, 정토이며 동시에 無限한 莊嚴으로 있는 것이다.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의 장엄은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의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만 그 이름이 부처의 영토, 불국토, 정토의 장엄이라 하는 것이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p.194-195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