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수행, 수행을 하되 수행함이 없는 수행
참된 수행은 有爲의 수행이 아닌 無爲의 수행입니다. 無爲의 修行이란 수행을 하되 수행함이 없는
수행을 말합니다. 기존에 미리 알고 있던 내용대로 열심히 마음을 조절하고, 통제하고, 갈고 닦아서
마음을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행위를 수행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본래의 마음, 본래면목, 참나, 근원의 나, 본래의 나, 시비 분별하는 마음의 본래성품, 본성은 단 한
번도 더러워진 적도 없었고, 없어진 적도 없었으며, 오염되고 훼손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따로 본래
면목, 참나를 찾기 위해 무언가를 行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다만 이 세상을 상대로 시비하고
분별하는 허망한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눈 앞 目前인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當處의 밝은 眞理를
보지 못하고, 분별망상이라는 固定觀念, 色眼鏡에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일단 걸러서 보기 때문에 當處의 밝은 眞理 대신 어둡고 허망한 분별망상이 만들어내는 虛像만을 볼
뿐입니다.
혜능과 신수의 이야기는 修行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수가 읊은 ‘몸은 깨달
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와 티끌을 없애라’는 게송에,
혜능은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다. 불성은 늘 청정하여 한 물건도 없
거늘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는 게송으로 답했습니다.
혜능의 말처럼 佛性은 늘 청정하여 한 물건도 없이 텅~비어서 거기엔 티끌 먼지가 끼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修行을 통해 없었던 佛性을 새롭게 있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불성에 끼인 티끌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修行이란 그렇게 造作하고 有爲의 노력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무엇이 眞正한 修行일까요? 無爲의 참된 修行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無爲의 修行은 어떻게
行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방법을 인위적으로 반복하고 숙달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고 닦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렇게 의도적 인위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수행이라면, 수행은 오히려 쉽겠지요. 그런 것이 수행이라면, 어쩌면 국가대표나, 해병대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 혹은 학교에서 1등 하는 사람들이 훨씬 깨닫기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대승불교 경전이나, 티베트 불교에서는 하나같이 修行 代身 ‘發아뇩다라삼먁삼보리心’, ‘發보리心’,
‘發心’을 강조합니다. 조계종단의 소의경전인 金剛經에서도, 特別한 修行法을 열심히 갈고 닦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般若心經이나 六祖壇經에도 그런 말은 없지요. 그런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金剛經
에서 29번이나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修行의 核心이 바로 發아뇩다라삼먁삼보리心 卽, 發보리心이기 때문입니다. 佛敎 즉,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을 마음공부라고 말하는 理由는 바로 發心하는 宗敎하는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터득하는데 있어서 가장 重要한 마음자세는 바로 發心입니다. 부처님께서 얻으셨던 最上의
깨달음을 나도 얻겠노라고 하는 發心이야말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입니다.
특정한 수행방법으로 오염된 마음으로 갈고 닦아서 깨닫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 간절하게 깨닫겠노라고
發心을 함으로써 깨닫는 것이 수행입니다. 간절하게 發心은 했는데,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은 없기에, 이
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생각 마음이 사방으로 콱 막히게 됩니다. 깨닫기는 해야겠는데 도저히 모를 뿐
입니다. 이뭣고가 궁금은 한데, 방법은 없으니 답답합니다. 바로 이 답답함, 막막함, 모를 뿐임의 궁금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깨닫고는 싶은 간절함 그것이 깨달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오직 모를 뿐의 疑心, 疑情으로 생각 마음이 사방으로 콱 막혀 있다보면 저절로 무의식적으로
시비 분별하는 생각 마음이 길을 잃게 되고, 시비하고 분별하는 생각 번뇌 망상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깨달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話頭는 일종의 수행방법이라기 보다는 無爲의 修行 즉, 수행
을 하되 수행함이 없는 수행으로써, 간절한 發心은 했지만, 방법도 없고, 길도 없고, 노력해도 도저히 안
되는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에 갇히게 만드는 方便입니다.
結局 깨달음,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修行이 아니라,
진리, 깨달음을 얻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發心입니다.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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