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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교의 많은 방편

장백산-1 2016. 5. 7. 00:31

많은 종교의 많은 방편


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 말로 하라면, 부처(佛)가 되는 것, 見性成佛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事實 불교의

핵심은 부처(佛)가 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本來부터 이미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

이 부처(佛)라는 事實을 自覺하고 確認하는 것입니다. 이 宇宙萬物,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고 온전한 眞理, 佛(부처)의 나툼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본래가 부처인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전부 眞理, 부처로써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찬’에서는 이를 ‘大道常在目前 雖在目前難睹 (대도상재목전 수재목전난도)’라 하여

‘無限한 道는 늘 눈앞에 있지만 비록 道가 눈앞에 있더라도 그 道을 보기는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온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자기의 사고방식 고정관념인 과거의

색안경을 쓰고  判斷하고 分別하기 때문에 이 완전하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제 스스로를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여기고 괴로운 존재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과거 세상과 지금

여기 현재 세상을 분리 분별하는 바로 이 分別心 分別하는 意識이 인간의 마음, 중생심 중에서 가장 대표

적인 작용인데요, 이 分別心은 나아가  가짜 나인 이 몸과 느낌 감정, 생각 상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도 의지, 분별심 분별의식 卽, 色 受 想 行 識을 전부 진짜 나, 본래의 나라고 여기면서 나라고 착각하는

我相을 키워가는 겁니다.

 

바로 이 我相, 色受想行識, 六識, 十八界 이런 것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 망상, 分別心 분별의식 卽, 분별되고 구분된 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바로 이 分別心,

분별된 相으로 因해 人間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 즉, 부처의 실상, 여래의 진실한 뜻, 眞理의

實相을 보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생각 마음이라는 과거의 색안경을 쓰고 '

가짜 나' 혼자만의 妄想世界 幻想世界, 虛想의 삶만을 보고 즐기면서 속아 살아가는 겁니다.

 

眞理의 實相 卽,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은 텅~비어 空한 모습

이기 때문에 이 眞理의 實相 자리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겁니다.

텅~비어 空한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 卽,

眞理의 實相은 識(意識)의 認識 對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意識이 認識할 수 있는

것들만을 認識해서 알고있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언어라는 方便을 빌려서 텅~비어 空한 眞理의 實相에 

本來面目, 佛性, 主人公, 本性, 自性, 法性, 禪, 法, 道, 心, 佛(부처) 혹은 神이라고 수많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실 많은 宗敎, 思想들이 있지만 그것들 또한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면 바로 이 참된 本性에

대해 텅~비어 空한 眞理의 實相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터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참된

眞理를 불교만큼 확연하게 직접적으로 가리켜 보여주고, 見性 이후의 보림수행까지를 체계적으로 이

끄는 방대한 실천체계는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지요.


인도의 유명한 수행자나, 역사 속에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들, 요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적인 거인들

이라 불리는 이들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그것이 佛法에서 말하는 소위 本性을 얼핏 본 사람이거나, 쉽게

말해 見性을 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공부까지 수순하게 끝마쳐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분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사실 마음공부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見性이 아니라 見性 以後의 保林 공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보림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바른 가르침은 오직 불교에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다만 다른 종교나 사상

에서도 일부 견성이라고 할 만한 성품에 대한 언급은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모든

참된 종교나 사상의 전통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사실 이 世上 모든 것들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생겨나와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것을 方便의 말을 빌려서 굳이 創造主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老子나 장자는 이것을 道라고 하고, 無爲自然이라 말합니다. 道德經에서는 ‘억지로 하는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억지로 일을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

하다’고 말합니다.

 

힌두교, 브라만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여, 나(我)가 創造神인 梵과 하나가 되어야지, 시비

분별하는 생각 妄想, 분별심 분별의식으로 세상 삶을 제 멋대로 살려고 하면 안 된다는 方便을 쓰고 있습

니다. 이처럼 어느 종교적 전통에서든지 비슷한 根源에 뿌리를 두 고 있어 보입니다. 다만, 그 자리에

確實히 契合하지 못하다보니, 이렇듯 약간은 어설픈 方便에 執着하게 되어, 眞實 즉, 텅~비어 空한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 卽, 眞理의 實相 진리의

참모습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이런 人類 歷史 속의 수많은 思想들을 보았을 때,

佛法을 만났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같은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