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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항상 눈 앞에 있다

장백산-1 2016. 5. 9. 01:41

불법은 항상  눈 앞에 있다  

법상 | 2016.05.08. 14:02 http://cafe.daum.net/truenature/S27F/519 

 

 

어떤 학인이 만공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佛法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눈 앞에 있느니라”

“눈 앞에 있다면 왜 저는 보지 못합니까?”  “너에게는 나라는 相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보셨습니까?”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한다”

“나도 없고 스님도 없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 누구냐?”

 


滿空 선사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佛法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 눈 앞에 佛法이 있다고 하지요. 임제스님의

입처개진(立處皆眞), 마조스님의 입처즉진(立處卽眞), 승조스님의 즉사이진(卽事而眞), 석두스님의

촉목도회(觸目會道), 그리고 경봉스님의 목격도존(目擊道存)이 모두 바로 이 눈 앞에, 목전에 道가

있고 眞理가 있음을 가리키는 방편의 표현입니다. 장자도 ‘道無所不在’라고 하여 道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禪에서는 佛法이라는 道라는 眞理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고 우리 눈 앞에 이

렇게 확연하게 드러나 펼쳐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도 저 만공선사와 학인의 대화

에서처럼 ‘눈 앞에 道가 있다면 왜 나는 道를 보지 못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공스님께서는 그 이유를 ‘나라는 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 이유를 金剛經에서는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초기경전에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空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五蘊無我이지요. 즉 나라고 여기는 오온이 무아로 실체가 없는데

우리는 그 事實을 모르고 내라는 존재가 고정된 實體로써 實在한다고 錯覺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온을 나라고 여깁니다. 몸, 생각, 느낌, 의지, 분별의식 분별심을 나라고 여깁니다. 생각과

느낌을 바탕으로 의도를 일으키고 그 의도를 분별의식 분별심이 헤아려 분별하고 인식해서 아는

분별하는 마음을 나라고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나’라는 아상이 있으면, ‘나’를 구성하는 요소인

수상행식 즉 생각과 느낌, 의도를 종합해 의식이 헤아려 분별심을 일으키게 됩니다. 즉 ‘나’라는 생각의

핵심이 바로 식온, 즉 알음알이, 분별심입니다.

 

우리가 目前에 드러나 있는 眞理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나라는 것이 있다고 錯覺하는 生覺,

즉 分別心 分別意識 때문입니다. 아상과 분별심으로 인해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分別心이라는 妄想 煩惱 色眼鏡을 통해 보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 여기 현실

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 분별심 분별의식을 보는 것일 뿐입니다.

 

학인이 스님께서는 보셨느냐고 따져 묻자 만공스님께서는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我相만 있어도 못 보는데, 人相까지 있다면 더욱 볼 수 없습니다.

나다 너다 하고 區分짓는 마음이 바로 分別心입니다. 나와 너를 나누고, 중생과 부처를 나누어 놓고

어리석은 내가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은 부처가 되야겠다라는 마음이 바로 어리석은 分別心이고, 바로

이 是非 分別하는 마음 때문에 목전의에 펼쳐져 있는 道, 佛法, 眞理, 본성, 본래의 나, 근원의 나, 진짜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스님도 없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만공스님은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부럽을

보려고 하는 자 누구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면 과연

누가 무엇이 마음공부를 하고 깨닫겠습니까? 깨달음이란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부처(佛)임을 確認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눈앞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성품도

없고 성품을 보는 자도 없습니다. 눈앞 이 자리는 그저 텅~비어 空할 뿐이지만, 다만 방편으로 그렇게 나

너, 부처 중생, 성품 성품을 보는 자 등등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품을 보려고

發心을 합니다. 이뭣고 하고 끊임없이 살핍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보려고 하는 者, 그 者를 돌이켜

보십시오. 보려는 자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