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廻光返照)
정상좌(靜上坐)는 현사(玄沙) 스님을 찾아뵙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후에 천태(天台)에 머무르며
30여 년 동안 山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戒, 定, 慧 삼학(三學)을 두루 공부하고 품행이 고고하였다.
선(禪)을 공부하는 자가 정산좌 스님께 물었다. “앉아있을 때면 마음과 生覺이 어지럽게 흩어집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정상좌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과 生覺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바로 그 때,
오히려 어지럽게 흩어지는 마음과 生覺을 되돌려가지고 어지럽게 흩어지는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를 參究해 보아라(회광반조).
참구해봐도 어지럽게 흩어지는 마음과 生覺이 일어나는 그 자리가 없다면 어지럽게 흩어지는 마음과
生覺이 어느 곳에 있겠느냐? 참구하는 그 마음과 生覺을 되돌려가지고 어지럽게 흩어지는 마음과 生
覺이 일어나는 그 자리를 참구하면 能히 참구하는 그 마음과 生覺은 어떻게 있겠느냐?
또한 能産能活하고 能히 비추는 밝은 智慧[主觀]은 本來부터 이미 완벽하게 텅~비었고, 因緣이 되는
對相 境界[客觀] 즉, 온갖 現象으로 現始되어 나타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 또한 텅~비어 고요하다.
能히 텅~비어 고요하면서 고요하지 않은 것은 能히 고요하게 할 主觀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밖으로 비추면서도 비추지 않는 것은 비춰지는 인연이 되는 대상 경계(객관) 즉, 온갖 현상으로 현시
되어 드러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 경계(객관)과 지혜(주관)이 모두
텅~비어 고요하면 마음과 生覺이 便安해지니, 이것이 根源으로 돌아가는 요긴한 길이다.”
- 인천보감
禪, 人間 마음의 本性(本來性稟)을 공부하는 데 있어 銘心해야 할 點은 對相 境界(객관)를 法으로 오인
(誤認)하면 않된다는 事實입니다. 境界는 인간이 知覺할 수 있는 것이고, 知覺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
에 分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좌선을 하니까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합시다. 그 때 經驗한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음
은 하나의 對相 境界, 눈앞에 있는 事物과 같이 認識의 主觀에 의해 포착되어 지각된 것으로 고정불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하기 前에는 없었던 마음이 잠시 다른 對相에 대한 關心이 희미해지자 고요
하게 가라앉은 마음이라는 對相 경계가 認識의 무대에 등장해서 지각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고요
하게 가라앉은 마음은 그렇게 잠시 머물다가 또 다른 대상의 등장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없던 것, 대상, 경계 즉, 객관이 새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變하는 것, 변하는 정도의
차이가 認識에 知覺되고 分別되는 것은 眞理, 참다운 法, 眞實한 理致가 아닙니다. 모든 대상 경계의
本質은 연기(緣起), 곧 무상(無常), 무아(無我), 공(空), 中道, 慈悲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 경계와 대상 경계의 本質인 연기, 무상, 무아, 공, 중도, 자비는 결코 둘이 아니지
만(不二), 그렇다고 대상 경계와 하나도 아닌 것이 바로 法, 眞理입니다. 경계는 知覺되고 分別되어
認識할 수 있는 것이지만 法, 眞理는 知覺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分別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知覺과 認識, 分別心의 根源, 그 자체입니다.
비유하자면,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 경계 사물들은 눈을 통하지 않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대상 경계 사물을 보고 지각하고 인식하고 분별하는 눈 자체를 對相化하여 볼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눈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러할 때, 비록 눈을 對相化하여 지각하거나
분별해서 인식할 수는 없지만, 보이는 대상 경계 사물 하나 하나에서, 심지어는 특별한 대상 경계
사물을 보지 않더라도 그 모든 것이 그것들을 보고 있는 눈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 경계 사물이 그대로 보는 눈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
경계 사물을 떠나서 따로 눈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에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 경계 사물과 보는 행위가 다 한 덩어리로 있습니다.
모든 대상 경계 사물들을 지각 분별 인식하는 마음, 의식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눈앞에 지각 분별 인식하는 마음, 지각 분별 인식되는 대상 경계 사물, 지각 분별 인식하는 행위가 다
한 덩어리로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 마음, 그 의식 자체를 지각하고 분별해서 인식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지각과 모든 분별과 인식이 마음과 의식의 존재를 증명해 줍니다.
지각하는 마음 자체를 지각하려 하면, 분별하는 의식 자체를 분별해서 알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지각과
분별이 멈출 수 있습니다. 그 때 자칫 그것을 아무 지각이 없는 상태, 아무 아는 것이 없는 상태처럼
지각하거나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지각이며 분별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각과 분별이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곳에 몸소 도달해야 합니다. 지각과 분별 그것들의 나온 근원으로 돌아갈 때 진정한 변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갈 곳이 사라진다, 의심 덩어리만 홀로 드러나 있다, 은으로 된
산과 철로 된 벽을 마주한 것 같다는 표현들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길이 없는 길, 둘이 없는 하나로 가
는 길입니다.
깨달음이란 이제까지 이미 도달해 있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헛된 노력을 해 왔다는 사실을, 그
렇게도 찾고 싶었던 대상, 깨달음이 바로 그렇게 찾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
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거대한 착각, 너무나 어이없는 실수, 우주적 농담에 헛웃음이 나오는 일이 깨달음입니다. 눈을 보려고
하는 것이 바로 눈이었고,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었으며, 의식을 지각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의식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본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안 것이 없고, 아무것도 지각한 것이 없는데도, 그것이 모든 것을 다
본 것이고, 모든 것을 다 안 것이고, 모든 것을 다 지각한 것입니다. 모든 의문들이 그 근원으로 돌아가
소멸합니다.
언제나 밝아있는 이 마음, 언제나 깨어있는 이 의식, 어떤 대상 경계를 지각하고 분별하기 이전에 그것
은 이미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주관과 객관, 행위가 한 덩어리로 녹아든 그것은 결코 알 수는
없지만 모를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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