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치니 억.." 첫 보고서 쓴 '홍 경감'은 지금도 말이 없다
안영춘 김규남 입력 2017.01.15 18:16 수정 2017.01.15 21:16
박종철 30주기에 만난 '홍승상'씨
지휘라인 아닌데 사건경위서 작성 당시 동료 "윗선 보고용으로..
청와대까지 올라가 못 고친 듯" 검찰기록 진술서조차 없어
예외적 거듭승진 훈장까지 타 퇴임하곤 안보강연 다닌 흔적
<한겨레> 만나 "아는 것 없고 알아도 말 못한다"
홍승상 그의 이름은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 몇 군데에 등장한다. 고문 경찰관들은 다들 사건 경위서를 작성한 인물로 그를 지목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사건 경위서에 처음 등장해 어느덧 전설이 돼버린 저 ‘악마의 문장’의 ‘공식 저작권자’는, 그러나 사건 당시 거의 주목받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홍승상(79). 1987년 5월29일, 검찰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2차 수사를 마무리하고 고문 경찰관 3명과 사건 은폐 지휘관 3명을 추가 기소했다. 그도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 대상에서 빠졌다. 법원에 제출된 수사기록에는 그의 진술조서조차 들어 있지 않다. 그는 운 좋게 관심의 사각지대에 비켜서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무구했던 것일까? 혹,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비호된 것은 아닐까?
홍승상 그는 사건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소속이었다. 직제로는 대공수사 2단 5과 1계장, 계급은 경감이었다. 물고문은 2계에서 이뤄졌으니, 지휘선상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건 경위서 작성을 맡았다. 검찰 수사기록을 보면, 홍 경감은 박종철씨가 숨지고 5~6시간 뒤인 1월14일 오후 5시께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해 사건 경위서 작성에 들어갔다. 홍 경감과 문답을 나눈 고문 경찰관들은 검찰 수사에서 하나같이 자신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거나, 홍 경감이 그 문장을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윗선의 지시를 받아 작성됐을 가능성은 없을까. 경찰은 그날 저녁 7시30분쯤 그걸 들고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에게 가서 화장 처리를 재가해 달라고 졸랐다. 경위서를 완성하고 길어야 1~2시간 뒤쯤으로 추정된다. 윗선과 조율하고 재가받기에는 빠듯한 시간이다. 최 부장검사는 훗날 퇴임 뒤 “그 경위서는 누가 보더라도 고문사였다”고 여러차례 말했다. 김용갑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2007년 언론 인터뷰에서, 경찰의 보고 내용에 대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다들 ‘못 믿겠다’ ‘어처구니없이 우긴다’는 반응이었다고 전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돼 실형을 산 당시 한 경찰관은 이와 관련해 최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홍승상씨가 한 것은 맞다. 위에 보고하기 위해 보고용으로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상황이 달라졌으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것이다. 보고가 청와대까지 다 올라갔으니까. 첫 단추를 잘못 꿴 거다.”
역설적으로 이 시나리오가 전국민적 저항에 불을 질렀음에도, 검찰이 작성자를 제대로 조사한 흔적은 없다. 직접 고문에 가담해 2차 수사 때 구속된 황아무개 경위한테서 홍승상의 이름을 들었던 김동섭 당시 검사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었던 사람 아니냐”며 “이름만 겨우 기억난다”고 말했다. 2차 수사에 참여했던 이승구 당시 검사는 “고문한 경찰관을 밝히는 게 급선무였고, 워낙 터무니없는 얘기여서 수사 초점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2차 수사의 도화선이 됐던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2차)에는 “1월15일부터 18일까지 줄곧 박종철군의 가족을 동행, 감시하고 조작 은폐를 위한 (고문 경찰관) 가족(에 대한) 회유와 금품제공 등에 가담한” 홍승상 경감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성명서 발표를 이끌었던 함세웅 신부는 “1차 수사 때 구속됐던 경찰관의 친형이 찾아와 경찰이 가족을 회유하고 협박했던 내용을 소상히 얘기해서 알게 된 내용들”이라며 “‘그들은 경찰이 아니라 차라리 조폭이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홍승상 그는 사건 이후에도 유독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사건 발생 3년 뒤인 1990년 1월 경정으로 승진한다. 이듬해 7월에는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는다. 이어 1994년 12월에는 홍조근정훈장을 받는다. 1997년 1월 총경으로 승진해 전남 화순경찰서장에 부임했다가 40여일 만에 경기 성남 분당서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김일성 북한 주석 조카 이한영 피습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대공 전문가로서 긴급 투입된 것이다. 1차 수사 때 구속됐던 조아무개 경위는 2000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그 시나리오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아는데, 나중에 보니 훈장까지 받았더라”며 배반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1996년 8월 경찰관으로 재직하던 아들(당시 29·경위)이 교통사고로 숨지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그해 연세대 사태 때 밤샘 경비와 연행 학생 밤샘 조사를 하면서 쌓인 피로로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가 났다고 한다.
1998년 퇴임 뒤에는 안보 강연을 하러 다닌 흔적이 있고, <현장에서 본 좌익의 실체>라는 책을 펴냈다. 대한민국재향경우회 기획조정위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그는 신장질환으로 7년째 매주 3차례 서울대병원에서 신장투석을 한다. 투석을 받을 때마다 꼬박꼬박 노트에 혈압을 메모하는 등 환자들 가운데 가장 성실하게 건강 관리를 한다고 알려졌다. 홍승상 그는 <한겨레>가 병원을 찾아가 어렵사리 질문을 던졌을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의 관련성을 전면 부인했다.
“첫 단추를 잘못 뀄다”고 말한 경찰관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처리가 예외적이었다고 짚었다. “1986년에는 대공사건에서 의문사가 생겨도 이슈화된 적이 없다. 기무사나 다른 데서 해도 문제화되지 않았다. 그땐 우리만 문제가 돼서 불만도 없지 않았다.” 이것이 초등학생도 믿지 못할 허술한 시나리오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숨은 이유이자, 이 사건이 의문사로 남아 있는 다른 사건들과 함께 여전히 미제 사건일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안영춘 오승훈 김규남 기자 jona@hani.co.kr
수차례 전화와 문자에도 인터뷰를 거부하던 홍승상(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2단 5과 1계장)씨를 11일 오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두 차례 만났다. 말기 신장암을 앓고 있는 그는 30년이 다 된 사건을 시간대별로 소상히 기억할 정도로 총기가 있었지만, 초기 보고서 작성과 은폐 · 조작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알아도 말할 수 없다’고 둘러댔다. 다만 사건 초기 박종철씨 유족들을 만나 금품제공 등 회유에 나선 일이 있냐는 질문엔 “(유족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의 초기 보고서를 직접 썼나.
“아니다. 난 그날(1987년 1월14일) 오전 10시부터 경기도경에서 대공수사인력 집체교육이 있어서 거기에 있었다. 본부(남영동)에 돌아오니 저녁 5시였다. 내가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벌어진 뒤였다.”
-조 경위 등 당시 관계자들이 초기 은폐 시나리오 작성자로 홍 계장을 지목한다.
“조 경위가 그런 얘기를 했는지 (당신) 말만 듣고서 알 수가 없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얘기할 수 없다.”
-당시 고문 경찰관이나 은폐조작에 관여한 이들 처벌 받았는데 유일하게 처벌 피했다는 얘기가 있다.
“내가 관여한 게 없기 때문에….”
-사건 은폐·조작과 관련해 2차 검찰 수사때 조사받지 않았나.
“(대검) 중앙수사부에 가서 두차례 조사를 받았다. 무혐의가 나왔다.”
-사건 초기에 박종철 유족들 만나서 금품제공 등으로 회유하려고 했다는데.
(재차 묻자) “만난 적은 있다.”
-회유한 적 없나.
“….”
-30년이 됐다. 이제는 사실을 좀 밝혀야 되지 않나.
“아는 것도 없고 설령 알더라도 말할 수 없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1987년 1월14일 오전 11시께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당시 22살)씨가 숨졌다. 치안본부(현 경찰청)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였다. 경찰은 수배 중인 선배의 소재를 물으며 그를 물고문했다.
박씨는 참고인 신분이었다. 열혈 운동권 학생이 아니어도 당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선배의 소재’를 묻는 경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끌려갈 수 있었다. 학생들은 공포에 떨었다. 부모들은 ‘내 자식도 언제 끌려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경찰은 사건을 은폐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쇼크사했다”는 ‘변사사건 발생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문치사가 아닌 쇼크사라는 뜻이다. 시신 화장을 거부하고 부검을 지시한 검사, ‘물고문이 있었다’는 검안의와 부검의의 고백, 그외 많은 이들의 용기가 은폐 시도를 막아냈다.
1987년은 대선이 있던 해였다. 민주화요구가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이런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됐다. 4월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은 없다’고 선언(4·13 호헌조치)하면서 이렇게 모인 민심은 ‘호헌철폐·독재타도’ 구호 아래 단결했고,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검찰은 이 사건을 세차례 수사했다. 사건 발생 열흘 만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 2명을 구속기소했다(1차 수사). 같은 해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이 조작됐다. 공범이 더 있다”고 폭로한 뒤 고문에 직접 가담했던 경찰 3명과 사건을 덮으려했던 경찰 3명을 구속기소했다(2차 수사). 이듬해 2월 경찰 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3차 수사).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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