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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선사의 핵심 가르침

장백산-1 2017. 6. 18. 00:54

달마 선사의 핵심 가르침


마음 바깥에 마음과 다른 별도의 다른 부처는 없고, 마음 밖에서 마음과 다른 깨달음과 열반, 해탈, 도를 찾을 수는 없다. 진리가 곧 마음이다. 마음이 곧 깨달음, 보리, 부처, 열반, 해탈, 도, 진짜 마음이니 마음 바깥에서 이름, 개념일 뿐인 부처, 깨달음, 진심, 보리, 부처,열반, 해탈, 도를 찾지 말라.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고 손발을 움직이는 행위 모두 각자의 神靈한 本性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도요, 도가 곧 선이요, 禪이 곧 진리요, 진리가 곧 法이다. 만약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각자의 본성을 보아야 하니, 본성이 곧 부처다.

 

마음은 본래부터 무시무종으로 늘 눈앞에 드러나 있지만, 그대의 분별심이 마음을 가로막아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선을 생각하면 선업이요 악을 생각하면 악업이니 생각 하나 일으킴에 천상이 생기고 생각 하나 일으킴에 지옥이 있는 것이다. 한 생각 조차도 일으키지 않으면 선업이니 악업이니 하는 일체의 분별 망상 개념이 모두 없어져서 천상과 지옥이라는 분별심도 자연히 없어진다. 천상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은 단지 이름이 천상이고 지옥일 뿐이지 천상과 지옥의 실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을 집착하는 범부에게는 천상과 지옥이 있고 집착하지 않는 성인에게는 분별심과 집착심이 없다.

 

어리석은 이는 분별 망상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분별 망상 번뇌를 끊으려는 집착 때문에 해탈 열반, 마음의 평화 마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분별 망상 번뇌가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분별 망상 번뇌를 끊겠다는 생각조차 놓아버려 항상 해탈 열반 대자유 대평화에 머문다. 만약 해탈 열반 대자유 대평화를 누리려는 사람이 생과 사가 분리 분별된 다른 것으로 보고, 분별 망상 번뇌가 열반과 분리 분별되어 있는 다른 것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분별 망상 번뇌의 감옥에 갇히고 만다. 번뇌 망상 분별이 해탈 열반 대평화 대자유와과 같은 하나로 보아야 해탈 열반 대평화 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도 생과 사의 분별에 집착하지 않으면 평생을 쌓아온 태산 같은 업장도 소멸할 수 있다. 일생을 수행했을지라도 임종에 이르러 생과 사의 분별 망상 번뇌에 집착하면 그 수행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분별 망상 번뇌의 포로가 되고 만다. 지금이라도 본래 마음의 성품, 본성, 불성, 자성을 깨달으면 또 다시 분병 망상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눈으로 사물을 보되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듣되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해탈, 열반, 깨달음, 道, 부처, 보리, 진심이다. 눈에 보인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눈이 선에 들어가는 문이 되고,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귀가 선에 들어가는 문이 된다. 사물의 겉모습만을 보는 사람은 그 사물에 집착해서 구속되지만 사물의 無常함을 깨달아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면 언제나 자유롭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화 자유, 깨달음, 부처, 도, 해탈, 열반, 본성, 불성, 자성이다.


[달마어록] 중에서

 

✔ 불교 경전에서 '부처' '여래'  ‘여래장’, ‘불성’, ‘열반’, ‘반야’, ‘진여’, ‘본각’, ‘일불승’, ‘원각’, ‘일심’ 등으로 표현하는 말을 禪에서는 주로 ‘마음’, 혹은 ‘법’  본래면목, 주인공, 무위진인, 입처개진 등의 명칭으로 표현한다. 이런 이름들을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착가해서 니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되며, 이런 이름들은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와 분리되어 서로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 우주삼라만상이 생생하게 쓰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마음’이라는 이름의 방편을 사용한 것이다.


마음이 곧 깨달음이니,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마음이며, 무엇이 본성인가? 일체시 일체처에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눈썹 찡그리고 눈 깜빡이고 손발 움직이는 것이 전부 각자의 신령한 본성, 마음, 도, 선, 부처, 여래, 깨달음, 진심, 부처다.


마음은 본래부터 이처럼 늘 눈앞에 항상드러나 있지만 마음이 중생의 분별심에 가려서 중생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허망한 분별심을 일으켜 경게 대상, 이 세상을 있다고 여기고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천상도 있고 지옥도 있고 온갖 분별이 있고 고통만이 보이지만, 분별 망상 번뇌와 아무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괴로움과 선악, 지옥과 천상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착각이 다 사라지고 없다. 텅 비어 확연한 마음의 본래 성품만이 무시무종으로 영원히 늘 드러나 있다.


헛되고 허망한  분별 망상 번뇌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중생이 허망하게 조작해낸 환상 환영일 뿐이다. 그러니 분별 망상 번뇌를 끊겠다는 생각 마음도 또 다른 분별 망상 번뇌일 뿐이다. 일으킨 그 어떤 생각일지라도 모든 생각은 전부 다 분별 망상 번뇌일 뿐이다.


‘이 자리’, ‘마음’, ‘법’, 부처, 여래, 깨달음, 진리, 본성, 불성, 진심, 본래면목,道, 무위진인, 해탈, 열반, 대자유, 대평화 등등은 텅~비어 확연하여 어떤 것도 붙을 자리가 없다. 성스럽다는 것조차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니 그런 것조차도 이것에는 없다. 확연무성(廓然無聖)이다. 확연하여 성스러울 것조차 없다.


겉으로는 망상이 있고 번뇌가 있고 분별이 있고 고통이 있고 생이 있고 사가 있고, 너가 있고 내가 있고, 가고 옴이 있고 있고, 시간과 공간이 있고, 음과 양이 있고, 선과 악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지만, 본성에는 아무 것도 없고 어떤 분리 분별도 없다. 다만 텅~비어서 열반이 번뇌다. 전혀 둘로 나뉘는 것이 없다.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이 본래 마음을 깨닫는 사람은 죽음도 그를 어쩌지 못한다. 그 에게는 업장도 허망한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고 깨닫고 나면, 본성을 확인하고 나면, 마음을 확인하고 나면 이 세상이 空한 사실을 깨달으니, 삶이 의미가 없거나,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지도 못하고, 직장 생활도 못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法, 진리, 부처, 여래, 깨달음, 본성,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진심, 道, 해탈, 열반, 대자유, 대평화,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나 볼 것은 똑같이 다 보지만 보는데 집착하지만 않는 것이다. 온갖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눈 귀 코 혀 몸 뜻이 전부 禪, 法, 道, 진리, 부처, 여래, 깨달음, 본성,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진심, 진심, 해탈, 열반, 대자유, 대평화로 들어가는 門이 된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등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다 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아 그것들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전부 다 행하지만 행하는 바가 없다. 이른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다. 


정신적 물질적 현상세계인 이 세상의 무상함을 깨달아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잘 사용하며 살면서도 이 세상 모든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깨달았다고 해서 돈을 안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열심히 벌면서도 돈에 집착이 없으니 많이 벌어도 좋고 못 벌어도 좋다. 부지런히 돈벌이를 하면서도 돈벌이에 얽매임이 없다. 그러다 보니 집착이 없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한 생을 여행하듯, 연극하듯, 놀이하듯 살아간다. 대자유인으로 사는 것이다. 남들과 대동소이한 듯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대자유를 음미하고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