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김영삼 정부때부터 약속했던 ILO핵심협약 비준, 이번엔 될까?

장백산-1 2017. 9. 6. 17:58

김영삼 정부때부터 약속했던 ILO핵심협약 비준, 

이번엔 될까?

입력 2017.09.05. 21:46 수정 2017.09.06. 08:56




전쟁 · 독재 거치며 노동권 왜곡
노조법 · 교원 · 공무원노조법 등 
결사의 자유 · 강제노동금지
ILO핵심협약 위배조항 수두룩

정부에선 국내법 조항 이유로 
비준약속 해놓고 번번이 안지켜 
새정부 '선법개정 후비준' 방향 잡아 
전문가들 "정부입법으로 결자해지"

[한겨레]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으로 국가 위상에 걸맞은 노동기본권 보장을 이루겠습니다.”

지난 5월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내용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도 포함됐다. 그러나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한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 정부는 1991년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한 이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1996년 가입하면서 현재의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1998년 당선자 신분으로 국제노동기구 대표단을 만나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한 바 있다. 2005년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도 정부가 비준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동안 국제노동기구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한국이 경제규모에 비해 낮은 노동기준을 갖추고 있어, 핵심협약 비준과 이행을 통해 이를 개선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국제노동기구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협약 미비준은 물론, 미비준에 따른 노동자들의 단결권 침해 등 노동탄압 등에 대해 무더기 권고를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일 문 대통령이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을 만나 핵심협약 비준 의사를 밝히면서, 이번에야말로 그동안 미뤄 왔던 협약 비준이 가능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특히 비준 과정에서 협약 내용에 위배되는 국내법을 어떻게 고칠지도 관심사다.

 중국·마셜제도·팔라우·통가·투발루 그리고 한국 이 나라들은 국제노동기구가 1998년 ‘노동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과 권리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며 회원국에 내놓은 8개의 ‘핵심협약’ 가운데 결사의 자유 협약(87호·98호), 강제노동금지 협약(29호·105호) 등 4개를 모두 비준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은 나머지 4개 핵심협약인 균등대우 협약(100호·111호), 아동노동금지 협약(138호·182호)은 비준했다. 지난달 기준 국제노동기구의 187개 회원국 가운데, 결사의 자유 협약 87호를 비준하지 않은 국가는 33곳(17.6%), 98호는 22곳(11.8%)이고, 강제노동금지 협약 29호는 9곳(4.8%), 105호는 12곳(6.4%)에 그쳤다.

한국이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제노동기구는 핵심협약 미비준 회원국에 비준 전망과 미비준 사유를 연례보고서로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8월 한국 정부는 연례보고서에서, 결사의 자유 협약은 “공무원 단결권에 관한 국내 법조항 문제”, 강제노동금지 협약은 “의무 군복무로 인한 사항”을 주요 사유로 제시했다. 지난 정부들도 비슷한 이유를 들어 비준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국내 법제도가 국제노동기준에 비해 뒤처지게 된 이유로 분단과 전쟁, 독재를 거치면서 국가가 노동기본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해 왔다는 점을 든다. 조경배 순천향대 교수(노동법)는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노동조합의 존재와 활동은 ‘반국가적’인 것이 됐고, 1961년 군사쿠데타로 경제성장 지상주의와 정치적 군사주의는 노동기본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빌미가 됐다”며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 시기에 형성된 기본틀은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어떤 법 고쳐야 하나 국내법은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4개 협약과 상당 부분 위배된다. 먼저 결사의 자유 협약의 경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노동조합법) 대부분의 조항, 이를 준용하고 있는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87호 협약(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협약)은 “노동자와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며, “노동자·사용자단체는 그들의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관리 및 활동을 조직하고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갖고, 노동자·사용자단체는 행정당국에 의해 해산되거나 활동이 정지돼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노동조합법에는 행정관청이 노동조합의 설립신고가 법이 정한 요건에 맞지 않을 경우 신고서를 반려하도록 해, 행정당국이 노조를 해산하거나 활동을 정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판례상으로는 구직자·실직자·특수고용노동자 등의 노동조합 가입과 조직 권한을 부여하고 있으나, 노동조합법에는 ‘노동자’(근로자)로 한정돼있는 상태다. 공무원노조법·교원노조법 역시 노조법과 마찬가지다. 정부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두고 있다는 이유로 ‘노조 아님’ 통보를 하거나,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에 해직자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설립신고를 반려해 왔던 것, 또 최근까지 법원이 정부의 이런 처분이 위법하지 않다고 판결한 이유도 해당 법령 때문이다. 노사간 자율적으로 정한 단체협약을 행정관청이 시정하도록 명령할 수 있게 한 제도나, 노조 임원의 자격을 제한한 제도 역시 협약에 위배되는 것으로 지적된다. 이 밖에도 협약 내용을 해석하는 국제노동기구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를 형법상 업무방해로 처벌하거나, 노조법에 ‘합법파업’ 범위를 제한한 내용 등도 한국 정부에 시정을 ‘권고’했다. 병역법의 공익근무요원·산업기술요원 등의 ‘대체복무’가 협약상의 ‘강제노동’에 해당해, 강제노동금지 협약에 위배된다.

 정부가 비준 계획 내놔야 노동계는 핵심협약 비준을 줄기차게 강조해왔고, 핵심협약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 ‘보편적 인권’이라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비준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특히 핵심협약이 규정하고 있는 내용들이 한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협약 비준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금지 등 미비준 핵심협약에서 요구하는 것은 헌법상 노동3권과 차별금지 원칙의 발현”이라며 “(핵심협약이 규정하는) 국제노동기구의 목표가 우리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목표와 다르지 않은데, 이는 회원국들의 의무임과 동시에 보편적 노동의 이념에 바탕을 둔 최저기준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비준 절차와 비준에 수반되는 법 개정, 비준 시기다. 헌법은 핵심협약 비준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다. 해당 협약들은 비준 전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협약을 비준할 경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기 때문에, 관련 법을 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준하게 되면 협약과 법률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선비준 후법개정’이냐 ‘선법개정 후비준’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는 상태다.

김선수 변호사는 “협약을 비준하면 법률 효력이 있기 때문에 후법 우선 원칙에 따라 그에 미치지 못하는 법률보다 우선원칙을 갖게 된다”며 “법률에 위반되는 사안을 모두 평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먼저 법 개정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은 비준 자체를 어렵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김진 노동위원장도 “노조법·교원노조법·공무원노조법 등 상징적인 법을 먼저 개정해 놓고 비준한 뒤 나머지 충돌 부분은 차차 개정하면 된다”고 밝혔다. 반면 청와대는 지난 4일 문 대통령과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의 면담이 끝난 뒤 서면 브리핑을 통해 “국제노동기준에 맞게 국내 노동법을 정비하는 문제는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 만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양보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협약 비준을 ‘선법개정 후비준’으로 방향을 잡고, 이 과정을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풀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에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조경배 교수는 “현재 문제가 되는 노동법들은 모두 정부 입법으로 정부가 결자해지해야 한다”며 “국회에 맡겨서는 안 되고 정부가 입법안을 내 협약 비준을 위한 어젠다를 주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비준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위해서는 국내법이 협약과 상충하는지 여부에 대한 관계부처 협의와 법제처 검토가 필수적으로, 국내법 개정안과 비준안을 함께 제출하는 것이 빠른 비준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라며 “개정이 필요한 법조항을 검토해 올해 안으로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로드맵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5일 오후 서울 종로5가 청계천 전태일다리를 찾아 전태일 기념상에 함께 헌화하고 있다.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은 '서울시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