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삼성공화국은 막을 내렸나

장백산-1 2017. 9. 1. 23:17

삼성공화국은 막을 내렸나

입력 2017.09.01. 21:16 수정 2017.09.01. 22:16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반올림·삼성노동인권지킴이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삼성 뇌물 사건 1심 선고를 앞둔 8월2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이재용 엄중 처벌 촉구’ 등의 문구가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

‘삼성 뇌물 사건’의 1심 재판부는 사건의 본질을 이렇게 압축했다. 삼성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자본권력의 상징처럼 군림해왔다. 자본권력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다 보니 사회의 정상적 견제에서 벗어나 민주공화국의 정체성까지 훼손하는 것을 우려하는, 이른바 ‘삼성공화국’ 논란을 야기했다. 논란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핀 것은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과 검사들에 대한 뇌물 제공이 드러난 2005년의 삼성 엑스(X)파일 사건이다. 자본권력이 막대한 금력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우려는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기업들이 민중의 간섭과 공공의 감시에서 벗어나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힘을 확대해 나간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삼성 같은 일개 기업이 입법·행정·사법·언론·학계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가공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도 삼성공화국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삼성물산 합병이 시장 원리에 어긋나는데도 거의 모든 증권사들이 찬성보고서를 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자금에 수천억원의 손실이 나는데도 찬성표를 던졌다. 사실상 삼성의 ‘나팔수’ 노릇을 자임하고 나선 언론도 빼놓을 수 없다. 심지어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조차 무력화됐다. 과연 삼성이 아닌 다른 재벌이라면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삼성공화국의 실체는 이른바 ‘장충기 문자’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장충기 전 사장은 삼성에서 정보 및 대관업무를 총괄해온 인물이다. 언론사 간부들은 그에게 광고청탁은 물론 자신의 사외이사 자리와 자녀 취업을 부탁했다. 사회 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잊은 채 기사로 보은(?)하겠다는 낯뜨거운 충성 다짐을 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의 고위 인사는 온갖 정보를 보고하듯 넘겨줬다. 그중에는 내부인사 같은 기밀사항까지 들어 있다. 2007년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이 “청와대 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삼성에 내용이 보고된다”고 말한 게 사실이었다. 판사와 검사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인사청탁을 했다. 정부 인사를 삼성이 좌지우지한다는 세간의 얘기가 과장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들이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은 삼성에서 일하는 사위의 인사청탁을 했다. 그는 “자식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국민은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삼성을 위해 해준 일들을 궁금해한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의 조준웅 특검은 이건희 회장의 혐의 가운데 상당수에 면죄부를 줬다. 또 회사에 수천억원의 손해를 끼치고 수천억원의 세금을 탈루했음에도 징역 7년만 구형했다. 그는 특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지만, 얼마 뒤 아들이 삼성전자에 특채된 사실이 드러났다. 경제개혁연대의 이상훈 변호사는 “삼성처럼 장기간 조직적이고 상시적으로 관리하는 정경유착의 경우 청탁과 뇌물을 직접적으로 연결짓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삼성 뇌물 사건의 1심 재판부가 뇌물공여, 횡령 등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도 이재용 부회장에게 징역 5년만 선고한 것을 두고 비판과 불신의 목소리가 가시지 않는 배경이다.

삼성 뇌물 사건의 유죄 판결로 삼성공화국은 이제 끝났을까? 삼성공화국이 막을 내리려면 삼성이 먼저 변화의 노력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이 부회장 등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즉시 항소했다. ‘장충기 문자’ 관련자들도 침묵 속에 숨어 있다. 문재인 정부도 아직까지는 진상 파악에 적극적으로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서울변협의 전 인권위원장인 오영중 변호사는 “민간인은 제쳐놓더라도, 최소한 기밀을 누설하고 인사청탁을 한 공직자, 법관, 검사 등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책임추궁이 필요하다”며 “자본권력이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국가 전체를 부패시키는 것을 근절하지 않는 한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적폐청산도 요원하다”고 말했다.

곽정수 경제에디터석 산업팀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