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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끝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장백산-1 2017. 12. 30. 22:52

"삼성이 끝냈다고 끝난 게 아니다"

반기웅 기자 입력 2017.12.30. 18:07



[경향신문]
돈 주고 떠난 삼성 … 곪아가는 태안
서울역 광장에서 삼성의 무한책임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태안군 주민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0년 전 일이다. 삼성중공업의 크레인 부선 삼성1호가 충남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 북서쪽 5마일(8㎞) 해상에서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를 들이받았다. 그 충격으로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싣고 있던 원유 1만2547㎘(1만900톤)가 태안 앞바다와 인근 해상을 뒤덮었다. 삼성중공업과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는 민ㆍ형사상 책임을 져야 했다. 법원 판결로 사고 가해자는 ‘삼성’과 ‘허베이 스피리트호’임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역대 최악의 해양오염사고는 ‘태안 기름유출사고’로 불렸다. 보통 해상오염사고에는 선박 이름이나 원인 제공 기업의 이름이 붙는 게 관례다. 1995년 씨프린스호 사고처럼 국내 유조선 사고에는 선박 이름이 붙었고, 1989년 알래스카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엑손 발데스(Exxon Valdez) 사고 역시 정유회사 이름인 엑손과 선박 이름인 발데스를 합해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 재앙을 이르는 명칭에서 가해자 ‘삼성’은 사라졌다. 엉뚱하게도 피해자 ‘태안’이 전면에 나섰다. 삼성이 일으킨 사고에 ‘태안 기름유출사고’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삼성의 과실은 희석됐다. 실제로 지난 2010년 학계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삼성-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와 ‘태안 기름유출사고’라고 이름을 다르게 붙여 기사를 읽게 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삼성-허베이 스피리트호’ 기사를 읽은 학생은 사고의 책임을 기업에 돌린 반면, ‘태안’ 기사를 읽은 학생은 사고를 자연재해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김찬국 한국교원대 환경교육과 교수는 “삼성이라는 이름이 빠졌을 때, 경제적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업 이미지와 관련한 막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은 셈”이라며 “만약 삼성 이름이 붙었으면 삼성이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 전 국민들이 기억하기 때문에 삼성이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 원인을 제공한 삼성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이유다. 지난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에서 페놀을 강에 흘려 보낸 ‘두산’을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고 수습과정에서 삼성중공업의 안이한 대처는 사고 직후부터 도마에 올랐다. 삼성은 사고 40일이 지나도록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첫 공식 입장 발표는 검찰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 이후에 이뤄졌는데, 그 사이 처지를 비관한 태안 주민 3명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다. 결국 사고 발생 50일 만에 삼성 측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 삼성중공업은 이번 사고가 삼성 측의 과실이 아니라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태안 피해 주민들은 책임을 피하려는 삼성의 태도에 분노했다.

12월 6일 태안기름유출 환경참사 발생 10년 기자회견장에 뿔논병아리 사진 모형과 오염 현장 시료 샘플이 놓여 있다. / 권도현 기자

책임소재를 가리는 과정은 내내 삐걱거렸다. 삼성중공업은 사고 이후 배상책임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먼저 삼성중공업은 손해배상책임을 50억원으로 제한하는 책임제한절차를 법원에 신청했다. 피해 주민들은 삼성 측이 악화된 기상상태에서 무리한 항해를 했고, 예인줄은 부실한 데다, 사고 당시 교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사고의 책임이 삼성중공업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주장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2년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삼성중공업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삼성중공업의 손해배상 책임은 56억원으로 마무리됐다. 피해 주민들이 신고한 피해액 4조2271억원의 0.13%에 불과한 금액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소유주 책임제한제도를 지렛대 삼아 헐값에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남현우 서해기름유출공익법률상담소 변호사는 “삼성 때문에 사고가 났기 때문에 원인을 제공한 삼성중공업에 책임이 있고 전액 배상하는 것이 맞다”며 “검찰과 법원이 내린 판단에 원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피해주민 보상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08년 삼성중공업은 서해안발전기금으로 1000억원을 출연하기로 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발전기금 액수를 3600억원으로 늘렸다. 태안 지역에 직원을 파견해 사고대책본부를 열고 지원사업을 벌였다. 지역상품권 280억원어치를 구입하는 한편 7개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주민 숙원사업에 돈을 들였다. 임직원들에게는 태안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지역 경제 활성화와 사회공헌 활동에 해마다 100억원을 투입, 2013년 말까지 약 594억원을 집행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삼성중공업의 지원사업에 대해 석연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자매결연 사업은 일부 선택 받은 마을에 혜택을 몰아주는 형식이어서 주민들 간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08년 8월 태안군수가 긴급 읍ㆍ면장 회의를 열고 삼성과의 자매결연을 자제할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태안 만리포에서 숙박업을 하는 전완수씨(56)는 “자매결연을 맺어봐야 삼성 홍보에만 놀아난다”며 “서로 악감정 없을 때가 자매결연이지 사람 죽여놓고 결연하면 그게 자매결연이냐”고 되물었다. 모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기순씨(66)는 “기름 70%가 여기 동네에서 회수됐지만 우리는 자매결연 안 맺었다”며 “혜택을 제일 못 받았다”고 말했다.

그나마 삼성중공업과 그룹이 진행하던 지원사업 대부분은 2013년 삼성중공업이 3600억원의 지역발전기금을 출연하기로 합의한 시기와 맞물려 중단됐다. 태안 지역상품권 구매는 이뤄지지 않고 있고, 삼성중공업 직원들도 더 이상 여름철에 태안을 찾지 않는다. 탈 많았던 자매결연사업 역시 교류가 끊겼다. 태안에 있던 사고대책본부도 2015년 문을 닫았고 담당자는 회사를 그만뒀다. 사실상 태안에 대한 삼성의 지원사업은 모두 끝났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회사가 2015년 큰 적자가 나면서 2016년부터는 (지원)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라며 “그룹 미전실(미래전략실)도 없어지고 했기 때문에 더 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은 떠났지만 가장 큰 뇌관은 그대로 남아있다. 주민 보상 문제다. 삼성중공업이 내놓은 지역발전기금을 어느 지역, 누구에게, 얼마만큼 나눠야 하는지가 문제의 핵심이지만 삼성은 이 문제에서 손을 뗐다. 오랜 진통 끝에 대한상사중재원이 분배 비율을 정했다. 하지만 기금 수령 방식을 놓고 주민들 간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발전기금은 몇 년 전부터 준비가 돼 있다”며 “(분배) 부분은 우리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환경복원 문제와 주민들이 겪는 후유증에 대해서도 삼성은 할 말이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환경오염 문제는 환경부에서 환경영향평가를 해서 문제가 없다고 결론이 난 사안”이라며 “주민들 입장에서는 트라우마를 얘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쨌든 다 마무리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삼성-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 이후 6명의 지역주민이 처지를 비관해 세상을 떠났다. 바다는 기름으로 뒤덮였고 생태계는 파괴됐다. 보다 못한 123만명의 자원봉사자들은 기적처럼 바다를 되살렸다. 하지만 그 사이 지역공동체는 사라졌고 주민들은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 삼성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