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 문태준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밭에서 노랗게 익은 뭉뚝한 늙은 오이를 따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 샘물)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를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곤 당신의 등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궃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저녁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푹 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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