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은 불평등으로 완성된다
‘본인이 식사당번인데 왜 밥을 안 하는 거야?’, ‘본인이 담당한 구역을 청소하기로 해놓고 왜 청소안해? 등등, 요즘 ‘공동체운동’ 관련 공부를 하면서 대부분 공동체 내 갈등과 불화는 심오하고 거창한 문제가 아니라 공평하게 하기로 한 식사 당번, 설거지 당번, 청소 당번 등과 같이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닫는다.
공동체 안에서 평등하게 나눈 역할분담을 누군가가 그 역할 분담을 게으름 피우거나 안하게 되면, 결국 다른 누군가가 대신 희생하는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희생과 괴로움이 너무 사소하고 말하기엔 자잘해서 그냥 넘어가곤 하지만, 그런 역할 분담을 게으름 피우거나 안하거나 하는 것이 해소되지 않고 계속 쌓이면, 결국엔 터지게 된다. 공동체 구성원이 N분의1로 역할 분담을 평등하게 나누고 그 분담한 역할을 잘 실천해야지만 공동체가 건강하게 잘 유지될 수 있다.
또 다른 장면을 보자. 한동안 싸우고 갈등하고 말도 하지 않던 부부가 어느 날 저녁에 마주앉아 진솔하게 긴 대화를 나누고 그 간에 오해를 풀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화해한다. “내가 잘못했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화가 나서 심한 말을 했어.”, “아니야. 오히려 내가 당신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 살피지 못하고 막말을 했어. 내가 더 잘못했어.” 이 부부는 서로가 더 잘못했다고 자신이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대화 이후 이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평화로운 더 깊은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더 잘못했다고 참회하는 마음,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평화를 만든다.
네가 50을 하면 나도 50을 한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하는 평등이다. 조직의 공식적 원칙은 당연히 평등해야 하며 그렇게 합의하고 선언돼야 한다. 그러나 조직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기계적 평등이 있을 수 있을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내가 60을 하면 상대는 40밖에 못하는 경우가 있고, 물론 그 반대도 있다. 내가 더 많이 조직에 기여했고 상대가 나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고 추궁하게 되면 서로 간에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계적 평등의 욕심이 강할수록 인간 간에 미묘한 불평등을 견디지 못하고 불만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불만이 불화의 원인이 된다. 53의 일을 한 나는 손해 봐서 억울하고, 47밖에 일을 한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피해를 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적인 평등에 대한 집착은 인간 간에 미묘한 불평등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공동체의 갈등과 분란을 만들어 공동체를 파멸시킨다.
공식적 관계에서 주고받는 50대50 또는 N분의1의 평등원칙은 중요하다. 그러나 공동체의 개인적 관계 속에서 50을 줄 테니 50을 달라는 것은 거래(去來, 장사적인 잇속)이지, 공동체적 관계에서는 그런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다. 오늘 날 사회라는 공동체는 단순히 경제적 이익과 돈, 이해관계에 집착해 인간관계 조차에 계산기를 두두리며 이익을 보려고 한다. 내가 30밖에 안주면서 남에게 또는 단체에게 70을 요구한다. 남편은 부인에게 40을 주면서 부인에게 60의 역할을 기대하며 결혼한다. 바로 그 40 대 60의 간극만큼 불화와 갈등이 커지기 마련이다. 이런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내가 손해를 봤고 억울하다고 생각해 불화가 시작되고 결국 파탄을 맞는다. 이처럼 평등(平等)에 대한 집착은 반평화(反平和)의 요인이 된다.
성서에도 “누군가 5리를 가자고 요청하면 10리를 가주라”는 말이 있다. 5리를 같이 가자고 부탁해서 5리만 가면 부탁한 상대방을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이 되지만, 5리를 넘어 10리를 같이 가면 나는 남을 돕는 사람을 넘어 내가 길을 가는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의 뜻이 이런 것이다. 지금 처해있는 곳에서 모든 일의 주인이 되라는 선지식의 말씀이다. 상대가 50을 부탁하면 나는 그 이상의 70 또는 150을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받아들여 이 상황에서 주인이 되는 것, 수처작주(隨處作主)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먼저 넘치게 하는 20 내지 100이 바로 공동체의 자비와 사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50, 70, 80을 했다고 계산하지 않는 것, 상대가 20, 30, 40을 했다는 계산을 벗어나야 평화가 실현된다. 그런 세상이 평등을 넘어서는 삶, 바로 ‘모심(母心)’의 세상이다.
이렇듯이 계산 없는 평등은 사람들의 자발적 불평등, ‘모심’을 통해 완성된다. 이처럼 모든 평화는 자발적으로 억울하고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직이 어려울 때 앞장서서 먼저 손해보고 희생하며 해결에 나서는 사람이 누군지를 보면 그 조직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다.
‘보왕삼매론’에서도 “억울함을 당해서 그 억울함을 밝히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의 평화를 이루는 가르침이다. 부부관계가 평화롭다면 서로 계산하지 않듯이, 남북관계가 평화로우려면 퍼주기만 한다느니, 경제적 이익이라느니 하는 계산을 해서는 안된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ecogil21@naver.com
[1476호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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