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허공 같은 본래성품(本性)

장백산-1 2019. 4. 8. 11:51

허공 같은 본래성품(本性)

 


< 질문 > 많은 말씀을 듣다보니 그 말씀들이 서로 충돌하여 또 다시 장애가 생깁니다.


     

< 답변 >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면 쓸모없는 지견(知見), 지식, 알음알이(識見)만 늘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이 말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오. 참으로 그렇소. 이 말의 참뜻을 알았거든 말은 기억해 짊어지고 다닐 


이유가 전혀 없소. 단적으로 말해서 말은 ‘말은 본래 빈 것이다’라는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 있는 거라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런데도 계속 말 속에 뭔가 담긴 뜻이 있어서 묻고 대답하는 어간에 오묘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그런게 지금 여러분이 내가 말하는 법문을 듣는 방식이오. 그런 방식으로 알아들은 말을 가지고 평생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데만 머리를 굴리는 습관이 붙었기 때문에, 뭔가 보이고 뭔가 들리면 보고 


듣는 가운데 그 뭔가에 이름을 지어붙이고 의미를 부여해서 이러쿵저러쿵 지견, 견해, 지식, 식견, 알음


알이만 지어내고, 각자의 알음알이가 옳은지 틀린지만을 서로 견주고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그것은 지금 


동쪽으로 가야할 사람이 터무니없이 서쪽으로 내달리고 있는 격이오. · · · ·




말은 그냥 소리일뿐, 소리의 파동일뿐이요. 말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소. 말 소리는 다만 울림일 뿐인데 


그 소리에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실체가 없는 그 의미를 따라 꼭두각시 춤을 추고 있는 거요. 그게 


깨치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요.



그러나 근본성품, 본래성품을 밝히고 나면 타(他), ‘다른 것’이란 있을 수 없소. 근본성품에는 장애가 있니 


없니 하는 분별은 애초부터 붙을 여지가 전혀 없소. 그러나 아무런 장애가 없는 무애자재(無碍自在)함을 


집착하고 있는 한은 아직도 이 육신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오. 사람들은 수행의 주체인 육신이 뭔가를 


가로막고 장애를 주는 것처럼 생각해서 육신을 꺼려하기 때문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기를 원(願)하는 


거요. 그렇게 자유자재하기를 바라고 있는 한은 계속 수행의 주체가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요. 그럼 


영영 근원(根源), 근본성품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요.




근원, 근본성품은 마치 허공(虛空) 같아서 자유니 부자유니 하는 분별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소. 본성은


일찍이 문턱을 넘었갔던 적도 없고 문턱을 넘어온 적도 없기 때문에 무엇에 묶인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될 


수 없소. 묶였던 적이 없으니 풀려날 일도 없고, 문턱을 넘지 않아 물들었던 적이 없으니 다시 깨끗해 질 


일도 없는 거요. 본래성품은 도무지 조작할 일이 결코 없소. 바로 그 근본성품이 도(道), 부처(佛)라고 


부르는 방편(方便)상의 이름이요. 모든 말과 모든 의미(뜻)은 근본성품, 도(道), 부처(佛)로부터 비롯된 


거요.



행여 이 말을 듣고 ‘말의 뜻을 알아듣지 않아야 올바로 가는 것이구나’ 하는 또 하나의 그릇된 지견을 지으


려 하지 마시오. 말귀를 알아들어도, 알아듣지 못해도 둘 다 깨달음, 근본성품, 도(道), 부처(佛)과는 전혀 


상관이 없소. 자신의 천진한 본래성품, 깨달음, 도(道), 부처(佛), 본래의 나, 본래면목,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現前)을 등지고 겉으로 드러난 말과 뜻이라는 망령된 허망한 업식(業識)을 


좇아 벌써 본래성품, 근본성품, 깨달음, 도(道), 부처(佛), 본래의 나, 본래면목, 눈앞, 목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現前)  바깥으로 달려나갔기 때문이오.



- 대우거사님 / 가산님 제공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