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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진실' 알린 벽안의 증언자 .. 신군부 '재갈' 물리려 사찰

장백산-1 2019. 4. 8. 22:04

[단독] 


'광주 진실' 알린 벽안의 증언자 .. 


신군부 '재갈' 물리려 사찰


이현미 입력 2019.04.08. 19:29 수정 2019.04.08. 20:05



신군부 회의록 · 외무부 문서 확인 / "광주서 사망한 시민 2000명 달해" / 클라크 · 페리, AFP 등에 증언 / 전두환 신군부, 외신 보도 후 항의 / 외무부 "공개해명 해달라" 반발 / 각국 대사에 '왜곡보도 표명' 지시 / 허위사실 유포 관련 문건 만들어 / 美평화봉사단 끝내 조기활동 종료 / 신군부 · 美 정부 협력관계 정황도

1980년 7월15일, 스웨덴의 수도 스톨홀름 비르예르 얄스가탄(Birger Jarlsgatan)에 위치한 AFP통신 지사 앞. 두 달 전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미국인 2명이 다가왔다. 이들은 AFP의 문을 열고 들어와 코리아(Korea)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자신을 ‘스티븐 클라크(Steven Clark)’와 ‘캐럴린 페리(Carolyn Perry)’라고 각각 소개한 남녀는 2년간 한국에 파견돼 보건의료 증진에 힘쓴 미 평화봉사단원들이었다.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 앞을 계엄군이 기관총을 설치한 채 지키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이들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목격한 국가의 학살을 알리기 위해 힘썼다. 클라크와 페리는 “광주에서 사망한 한국인은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147명이 아니라 2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의 증언은 AFP를 통해 전 세계에 전달됐다.
두 사람은 곧 이어 UPI 지사를, 다음 날인 16일에는 로이터(Rerter)통신을 방문했지만 해당 통신사들은 기사를 실어주지 않았다. 23일에는 덴마크로 날아가 현지 일간지인 ‘AKTUELT’(2001년 폐간)와 인터뷰를 갖고 “한국인들은 북한 공산주의자보다 (한국 군부를) 더 무서워한다”고 전했다. 21일 AP통신은 AFP통신을 인용해 두 사람의 증언을 다시 소개했다. 
  
푸른 눈의 이방인들이 유럽 언론사를 전전한 이유는 하나였다. “한·미 양국이 감추려 하는 광주의 잔혹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외신 보도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발칵 뒤집혔다. 신군부는 두 사람에 대한 신원 색출 작업과 함께 주한 미대사관에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시정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계속 (미대사관에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강력 항의했다. 한국에 체류 중인 미 평화봉사단원들에 대한 감시도 강화했다. 1966년부터 한국 재건에 힘쓴 미 평화봉사단은 신군부의 압박과 함께 1981년 활동을 조기 종료했다. 
  
8일 세계일보가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미 평화봉사단원의 광주사태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조치 및 대책’ 등 관계부처 문건과 각국 대사관에 보낸 외교 문서에 따르면, 신군부가 5·18 이후 외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해외 언론에 왜곡된 사실을 전달했던 작업 과정이 드러난다. 미 평화봉사단 관련 신군부 회의록과 당시 외무부 3급 비밀 문서가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1980년 7월23일 당시 외무부가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미 평화봉사단원의 광주사태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조치 및 대책’ 보고서
◆푸른 눈의 증언자 사찰한 신군부

5·18에 대해 증언한 미 평화봉사단원 중 잘 알려진 인물은 1987년 ‘광주항쟁: 내부의 시각(The Kwangju Uprising : An Inside View)’ 보고서를 발표한 팀 원버그와 1999년 5·18 소설 ‘기쁨의 씨앗(The Seed of Joy)’을 펴낸 윌리엄 에이머스, 5·18 당시 외신 기자들의 ‘귀와 입’ 역할을 했던 데이비드 돌린저 등이다.

AFP 스웨덴 지사 등 유럽 언론을 방문한 스티븐 클라크와 캐럴린 페리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클라크와 페리는 세 사람 중 두 명의 가명이거나 한국을 위해 애썼던 제3의 인물일 수 있다는 추정이 나온다.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사망자 수를 축소 발표한 전두환 신군부의 거짓말과 군부 학살을 폭로한 두 사람의 AFP 인터뷰는 당시 정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겉으로는 쉬쉬해도 각국 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발송하고 미 평화봉사단에 대한 사찰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1980년 7월19일 외무부가 주스웨덴대사에게 발송한 AFP 관련 항의서한으로, 스티븐 클라크와 캐럴린 페리가 광주 참상을 알리기 위해 유럽 언론사를 방문한 기록이 정리돼 있다.
외무부 3급 비밀문서 등에 따르면 AFP 보도 3일 뒤인 1980년 7월18일 당시 이모 외무부 미주국장은 주한 미대사관의 블랙모어 정무참사관을 면담하고 “미 평화봉사단원이라고 자청한 미국인 2명이 밝힌 내용은 전혀 근거 없는 날조이며 북괴의 광주사태 관련 선전을 의도적으로 부추기려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외신에 공개해명을 해주길 바란다”고 항의했다. 
  
블랙모어 참사관은 이에 “이들이 한국에 근무 중이라면 추방 조치를 하겠지만 이미 떠나 버렸으므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고 하면서도 자체적으로 파악한 5·18 당시 광주에 체류했던 평화봉사단원의 명단을 신군부에 넘겼다.

외무부는 21일 주미국·일본·캐나다·호주·뉴질랜드 대사에게 “각국 인사 및 언론계에서 미 평화봉사단원의 광주사태 관련 발언 문의가 있을 경우 왜곡·과장 보도로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임을 표명하길 바란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고, 하루 뒤에는 당시 청와대 과장이 참석한 ‘미 평화봉사단 관계기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골칫거리가 된 평화봉사단을 내쫓기 위한 명분과 AFP 증언자 색출 논의가 이뤄졌다.

회의록에 따르면 문교부 관계자는 “평화봉사단의 긍정적 면이 컸던 것은 사실이나 필수적이며 크게 유익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고, 보건사회부 관계자는 클라크와 페리로 추정 가능한 인물에 대해 “6월13일 출국한 보건단원 중 스티븐 훈지커 및 캐럴린 턴비필이 있다”고 설명했다. 
◆미 평화봉사단 활동 조기 종료

문건을 보면 당시 신군부와 미국 정부가 협력관계에 있었던 정황도 드러난다. 주한 미대사관의 몬조 대사대리는 25일 박동진 외무장관과의 면담에서 “한국을 떠난 일부 몰지각한 자들에 대해 언론 자유를 통제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며 신군부의 적극적 대응 요구에는 선을 그으면서도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원을 이끌었던 메이어 단장이 봉사자들에게 엄중 경고와 주의를 주도록 조치했다.

외무부는 일련의 조치를 정리한 ‘미 평화봉사단 2명의 광주사태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조치 및 대책’ 문건을 만들어 ‘대통령 각하’와 국무총리에게 보고했고, 중앙정보부는 평화봉사단원의 인적사항을 조사한 보고서를 작성해 관계 기관에 전달했다. 평화봉사단원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시작하자 외국인들에 대한 사찰·감시를 강화한 것이다. 미 평화봉사단은 1982년으로 예정됐던 활동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광주민주화운동 1년 뒤 대부분 한국을 떠났다.

클라크와 페리는 1980년 7월23일 덴마크 현지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며 “인권을 논하면서 ‘광주사태’ 후 2억달러의 원조를 한 지미 카터(당시 미 대통령)는 위선자”라고 꼬집었다.

조진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이날 세계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미국인의 눈으로 만행이 알려지는 건 신군부의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에 철저히 차단한 것”이라며 “미 정부기관이 만약 평화봉사단에 영향을 미쳤다면 미국 역시 신군부 학살만행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병기 의원은 “이번 문건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의 실상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활동했던 평화봉사단원들의 발언까지 전두환 정부가 조직적으로 왜곡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진실을 밝히는 추가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현미·안병수 기자 engin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