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와 수구냉전 세력의 동거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입력 2019.08.09. 10:47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최근의 불안한 변수들, 즉 러시아의 영공침범,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 중국의 패권주의와 미국의 국익우선주의는 한국에겐 커다란 위협 요소들이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 안보 등 전방위적인 불안 요인 중 일본의 노골적인 '경제 선전포고'는 일본이 한국의 우방이라는 면에서 다른 나라들의 잠재적 도발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일본은 조선을 강압적으로 병탈한 침략국가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모두 일본이 잉태했다. 대법원 징용배상 판결과 안보를 빌미 삼아 경제보복을 감행하는 일본의 행태는 아시아를 침략하고 조선을 식민지배하면서 자행한 갖은 만행의 폭력성과 야만성, 후진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식민체제와 분단체제의 역사적 기원이 일차적으로는 일제라는 외부적 요인이겠지만, 친일의 내부적 요인 또한 흘려보낼 수 없다. 대한제국 이래 친일의 존재에 대한 담론이 다시 떠오르는 이유이다.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조선은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의 의해 분단을 맞고, 전전긍긍하며 해방정국의 추이를 엿보던 남한의 친일세력은 미군정에 재빨리 편승했다.
미군정은 효율적인 남한 통치를 위해 숙달된 관료와 경찰 등이 필요했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거나 일본으로부터 수혜를 받은 자들과의 이해관계의 일치는 이 땅에 일제 잔재 청산을 원천적으로 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분단에서 비롯된 냉전은 남한에 반공국가의 수립을 가져왔고, 친일파는 반공의 우산아래 신분을 세탁·유지하며 오히려 국가의 요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친일과 반공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쿠데타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서도 유용한 도구였다. 냉전이데올로기와 재벌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은 군사정권 유지의 두 축이었고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사회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전략물자 수출우대 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한 일본의 이른바 '백색국가' 제외는 안보와 경제적 적대행위에 다름아니다. 사실상의 경제 선전 포고와 다름없는 일본의 행위는 2차 대전 이후 숨죽이던 일본의 극우세력이 한반도를 둘러 싼 안보지형을 흔들고, 이를 틈타 '전범국가'에서 '전쟁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일본에게 한반도 평화와 문재인 정권의 존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일본은 내년 한국 총선에서 극우성향의 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대선에서 보수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다시 평화헌법 개정의 호기로 삼으려 할 것이다.
일본은 '전쟁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의 존재가 필요하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정세에서 평화 프로세스가 불가역의 흐름으로 정착된다면 개헌의 명분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은 북한 미사일 도발을 빌미 삼아 9·19 군사합의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당으로 상징되는 수구냉전 세력도 북한을 외부의 적으로 상정하여 안보논리를 강조한다면, 신북풍을 선거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정치공학 작동의 공간이 생길 수 있다. 결국 극우세력의 집권은 한반도 안보지형을 다시 냉전시대의 긴장관계로 되돌릴 수 있고, 북미 관계도 악화될 수 있다. 정확히 일본이 바라는 구도다.
해방 직후로 시계를 돌려보면 미국에게 한반도 통일은 관심 밖의 사항이었다. 1945년 9월 7일 동경에서 맥아더는 한반도 통치안에 대한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한다. 내용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하여 미군의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졸지에 또 다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고 패전국 일본은 오히려 미국의 보호를 받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해방 전에 수립된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동맹에서 비롯한 인민위원회는 불과 25일만 존속한 셈이다. 1945년 9월 9일 미군정청의 아놀드 소장이 미 군정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미군정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9월 14일 한국의 경찰 조직은 일제 시대의 모습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는 척결되지 않았고, 이후 이승만과 한민당 등 보수세력과 일제에 협력했던 세력은 보완적 관계로 한국 수구의 기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벌어진 1948년 제주 4·3 항쟁과 여순 민중 항쟁 등의 역사적 배경과 진상 규명은 군사정권과 독재정권 및 보수정권에 의해서 가려지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한국에서 일제 잔재 청산의 실패와 반공주의는 역사왜곡과 개혁지체로 나타났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규명 없이 일제 잔재 청산은 요원하다. 한국 내부의 일제 잔재 청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일본의 침략적 근성에 대해서 정파와 계급을 초월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반공주의가 한국현대사를 규정했던 요인이라는 집단지성의 정착이 긴요한 이유이며, 우리 내부의 일제 잔재와 냉전의식을 걷어내지 못하면 극일(克日)은 불가능하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ccr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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